매일신문

[데스크칼럼] 블랙리스트와 열린사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닫힌사회'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비판이 나왔다.

오직 국가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 국가는 개인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한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 설득 수단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닫힌사회다.

칼 포퍼는 1945년 이 닫힌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출간했다.

그리고 4년 뒤 '빅 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이 등장한다.

빅 브라더는 전체주의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이자, 허구적 인물이다. 빅 브라더는 개인 삶터 곳곳에 쌍방향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을 설치해 감시와 통제 수단으로 삼는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는 체제가 선전하는 거짓을 철저히 내면화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다. 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등을 이용해 개인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해야만 한다.

조지 오웰은 1949년 극단적 전체주의와 닫힌사회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은 소설 '1984'를 펴냈다.

그리고 68년이 지난 2017년 대한민국. 칼 포퍼와 조지 오웰이 그토록 우려하고 비판했던 닫힌사회와 텔레스크린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걷히지 않고 있는 듯하다. 바로 '블랙리스트'다.

독재국가나 전체주의국가는 어김없이 권력의 통제 대상으로 블랙리스트를 가공해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권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이념적 지향성이 다른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은 리스트를 만들어 일괄 관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감시나 통제 대상인 블랙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개인에 대한 뒷조사는 필수적이다. 출신과 학력, 경력, 인적 관계 등을 샅샅이 훑는다. 나아가 개인 계좌를 비롯한 금융'신상 조회, 미행, 도청 등은 그 도구로 활용된다. 이 같은 사찰이나 신상 조회 등은 어느 국가나 법적으로는 엄격하게 제한돼 있지만, 국민적 지지가 미약한 권위주의 정권일수록 정보기관을 이용한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다.

이런 면에서 반세기 전 빅 브라더의 비밀경찰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히틀러의 나치, 김일성에서 김정은으로 이어진 북한 정권의 통치 수단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민청학련이나 인혁당 등은 한국의 빅 브라더와 비밀경찰이 만들어낸 대표적 조작사건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독재와 군부정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민주화를 이룬 이 마당에도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떠도는 것은 왜일까.

취약한 정권일수록 정보기관이나 블랙리스트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를 옥죄기 마련이다. 정권 유지에 그만한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취약한 정권일수록 위기 국면이나 선거철에 간첩사건 조작, 북풍(北風), 연예인 스캔들 유포 등의 방식으로 국면 전환을 꾀해 왔다는 것은 이제 웬만한 국민이면 다 알고 있다. 1970, 8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국민들의 학습효과는 그만큼 컸다.

박근혜'이명박 정권에서의 블랙리스트가 최근 속속 불거져 나오는 것은 어쩌면 이들 정권의 권력 기반과 국민적 지지가 그토록 취약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보기관과 블랙리스트를 통해야만, 힘과 공포정치를 통해야만 정권 유지와 운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셈이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다고 칼 포퍼는 봤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류는 발전한다. 열린사회의 사람들은 토론을 통한 조정과 오류의 점진적 제거를 통해 사회는 발전한다고 믿는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열린사회는 권력이 힘과 공포로 국민을 다스려야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문재인 정권은 이 땅에 다시는 블랙리스트가 발붙일 수 없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덧붙여 블랙리스트에 대응하는 신(新)블랙리스트 운용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어두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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