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받은 숱한 상(賞) 가운데 고향 마을 노인회 어르신들이 주신 '감사패'가 가장 소중합니다. 어르신들이 직접 만든 마을의 유일무이한 하나뿐인 상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영양군 청기면 구매리 여미골이 고향인 배영희(59) ㈜한국프라스틱 회장의 고향 사랑은 언제나 자랑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사실 배 회장의 어릴 적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3남 1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자식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가정 형편은 배 회장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서도록 했다.
배 회장은 청남초등학교와 입암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인근 안동과 대구 등지 고등학교로 떠날 때 배 회장은 낯설고 물 설은 부산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1년여의 부산 생활은 그야말로 산전수전이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고, 여기저기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불과 16살의 나이에 사회의 엄혹함과 냉정함을 온몸으로 배웠다. 배 회장은 "가정 형편도 그렇고, 집안이 너무 어려워 학교보다는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앞서 있었다"며 "1년의 부산생활에서 배운 절박함을 자립할 수 있는 동력으로 만들어 나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후 대구로 올라와 본격적인 직장생활에 나섰다. 자동차 백미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곳에서의 몇 년 경험이 지금의 어엿한 경영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자양분의 시간이었다. 18세에 20여 명 규모의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사장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와 바르게 익히는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배 회장은 "20살에 공장 일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방위로 군 복무를 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2년여의 고향 생활에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밭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22살 되던 해에 대구 침산동 월세방에서 생애 첫 공장을 차렸다. 말이 공장이지 월세방에서 혼자 부속품을 조립해 백미러를 만드는, 요즘 말로 '1인 창업'이었다. 그동안 배운 기술력과 성실함으로 겁 없이 시작한 창업이었다.
1년여 지난 후에는 대구 북구 무태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지인이 운영하는 공장에 세를 들어 산 것이지만, 본격적인 공장업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동차 부품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1980년 1인 창업으로 처음 공장을 차려 1985년에 사업자 등록을 내고, 1987년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구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었다. 단시간에 정상 궤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성서공단(경영산업사)에 3천300㎡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세워 옮긴 것이 1991년, 한국프라스틱을 세운 것이 2002년이었다. 이후 달성군 하빈면 1만6천여㎡의 부지를 매입해 사무실을 짓고 추가로 3만여㎡를 사들여 지금은 4만6천㎡ 규모의 공장으로 성장시켰다.
배영희 회장은 "이렇게 단기간에 사업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경험과 기술력이 바탕이 됐다. 시장 생리를 잘 파악해 제품으로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특히, 팔레트 시장에 진출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금형을 제작해 품질력으로 승부했다"며 "스스로 생산하고 판매하는 1인 10역을 맡는 등 솔선수범하면서 직원들이 가족처럼 일하고 있다"고 한다.
자동차 범퍼와 음식물 쓰레기통, 산업용 팔레트 등을 생산해오는 한국프라스틱은 현대자동차와 삼성, LG 등 대기업에 납품하면서 연매출 430억원, 국내 점유율 30%의 플라스틱 업계 2위로 성장했다. 지난 18일에는 충남 예산에 150억원 들여 공장을 짓고 가동에 들어갔다.
배 회장은 "단기간에 사업을 확장하느라 이렇다 할 사회활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불우이웃돕기와 소년소녀가장돕기 등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고향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치단체에 성금을 기탁해 왔다"고 했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청기면과 구매 마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돈을 내놓고 있다. 2015년과 2016년 2년 동안 영양군이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1천만원씩의 성금을 내놓았다. 2015년 청기파출소 이전 시에는 모든 집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향우회 등 고향을 위한 일에는 수시로 힘을 보태고 있다.
그는 고향에 대해 "항상 좋은 곳이다. 언제나 어머니 품 같은 곳이다. 어릴 때 아무리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도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나는 어딜 가더라도 고향 영양과 청기에 대해 자랑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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