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마지막 전투의 서막
가을에는 무심코 지나가는 바람 한 점에조차 다디단 향내가 배어 있다. 그러나 일선군의 들녘에는 바람조차 멈추어 정적만 흘렀다. 서쪽 하늘의 끝자락을 베어 물고 늘 당당하게 솟아 있던 대본산(금오산)이 웬일인지 잔뜩 웅크려 있었다.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낙동강의 물빛은 저 홀로 깊어갔다.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일선군에서는 언제 또 몰아닥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모두 숨을 죽였다. 어둠 속을 떠돌던 그믐달이 새벽녘에 잠시 나타났다가 햇살 속으로 사라진 아침, 다급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무덤처럼 깊은 침묵을 깼다.
개경에서 온 전령은 전시 태세를 갖추라는 왕건의 명령을 전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전운이 감도는 일선군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궁과 훤술은 숭신산성에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고 무기를 점검했다.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라는 왕건의 지시에 따라 추가로 모병을 했으며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왕건은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의 귀부와 신라의 항복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대업의 꿈이 한발 다가옴을 느꼈다. 신검에게 당한 마음이 복수의 불꽃으로 타고 있던 견훤은 급기야 왕건에게 후백제와의 전쟁을 간절히 요청해왔다. 왕건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전을 결심하고 체계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정윤(正胤)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내어주어 천안부로 보내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것은 신검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북방 전선을 대비하게 하여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견훤에 이어 항복의 뜻을 전해온 박영규에게도 신검을 반대하는 세력과 뜻을 모아 고려 군사를 맞겠다는 다짐도 받아두었다.
총동원령을 선포한 왕건은 북방에 있는 여진족의 병력까지 불러들였다. 모든 군대가 집결하려면 병참의 이동 또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은 낙동강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모든 조건을 갖춘 일선군을 그 최후의 장소로 선택했다. 아도화상이 점지한 들판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끝낸 왕건은 군사를 움직여 결전의 날을 향하여 출발했다.
◆바람조차 숨죽인 일선의 들녘
왕건의 행렬은 먼저 천안으로 향했다. 일선군으로 바로 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장소를 정해두고 적을 유인하여 그 안에서 싸우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고려의 군사가 천안부로 모여드니 신검은 모든 병력을 전주로 집결시켰다. 권력 기반이 약한 신검으로서는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을 증명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고려의 군사들이 합세하기 전에 공격을 하려 했다. 그러나 왕건은 산책을 나온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후백제의 진영을 훑어보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우회하고 말았다. 고려군을 요격하기 위해 신검은 왕건의 군대를 따라 일선군으로 이동했다.
뜸해지는 주인의 발걸음 소리에서 감정까지 읽은 것인가. 전란이 다가옴을 느낀 들판의 곡식들은 결실을 거부한 채 시들시들 말라갔다. 후백제의 전선에 포진해 있던 병력을 포함한 전국에서 집결한 병력이 일선군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천안에서 출발한 왕건은 본대를 이끌고 문경새재와 죽령을 넘어 냉산 아래에 있는 낙산리 진영에 도착했다.
뒤로는 숭신산성이 든든히 버티고 있고 일곱 개의 창고는 곡식과 무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방군과 호족들이 보낸 병력을 더하여 10만에 가까운 군사들이 여진나루를 건너 낙동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갔다. 겨우 익어가던 얼마 남지 않은 곡식들은 군사들의 발아래 무참히 밟혔다. 전쟁 중에 밟히는 것이 어찌 곡식뿐이었을까.
왕건의 군대는 일리천(감천)이 흘러드는 강창나루 아래에 도착했다. 김천과 선산을 거쳐 동쪽으로 내려오던 강물은 이곳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왕건은 적을 맞으려면 마땅히 일리천을 건너야 했다. 신검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기에 필사적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그 절실한 심리를 이용하려는 왕건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거기에다 견훤이 스스로 선봉에 서기로 했으니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이길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전략이 또 어디 있으랴. 거리를 두고 적을 지켜보기에는 일리천 둔치가 적격이었다. 선봉인 좌군에 견훤을 세웠으며, 그 옆으로 중군과 우군을 세워 마군과 보군을 골고루 배치했다. 왕건이 속한 중군의 후방에는 명주의 호족으로 고려에 귀부한 왕순식의 마군을 세웠고, 김선궁이 이끄는 일선의 병력과 호족들이 보낸 병력을 함께 배치했다.
한편, 신검의 부대는 논산과 탄현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일선군의 서쪽인 송림리 앞들에 자리 잡았다. 강을 따라 올라가던 신검은 고려의 진영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암중모색하여 절묘한 묘수라도 계획한 듯 신검은 적과 더 가까워지기 전에 고려군의 복장을 갖춘 병사 몇 명을 서둘러 서쪽 들판으로 내보냈다. 숨죽이고 있던 강바람이 들판을 훑고 지나가니 적의 진영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신검에게는 결사적인 싸움이 될 것이며 기필코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다. 일리천이 가까워지자 자신을 중심으로 선봉인 우군에 용검을, 좌군에는 양검을 세워 군사를 배치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대치하고 있는 전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일선의 들녘에 깃든 뭇 생명도 불어올 태풍에 숨을 죽였다. 견훤은 아들과 싸워야 하는 기구한 운명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복수심으로 일어설 뿐이었다. 신검의 병력에 대한 탐색을 끝낸 견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견훤과 대치한 후백제의 우군에서는 옛 임금인 견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후백제의 진영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를 섬기던 장수들이 창과 칼을 버리고 강을 건너서 견훤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견훤은 그들을 통해 신검의 소재부터 먼저 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강을 건너 적의 무릎 아래로 항복하는 장군들을 보고도 후백제 진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벌써 기가 죽은 것은 아닐진대 진정 신검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적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었던 왕건은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왕건이 진군 명령을 내리기 위해 칼을 높이 드는 순간 그의 바로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한 병사가 왕건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몸으로 막은 것이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놀랍게도 고려군의 복장을 한 후백제의 병사였다. 그는 지난날 신검의 궁궐에서 막대기를 던져 멧돼지를 넘어뜨린 병사였다. 신검은 그를 통해 극적인 반전을 구상했었다.
산속에 돼지를 풀어놓고 수없이 많은 단도를 던지게 했다. 덕분에 병사들은 날마다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결전의 날을 맞아 허리춤에 칼을 숨기고 자신을 엄호할 병사와 함께 적진으로 숨어들었다. 일리천 언저리를 거슬러 올라 강을 건넜다. 야산을 타고 내려 중군의 후방에 잠입했다. 지방군과 호족의 병사들이 섞여 있어 아무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병사 하나가 수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모두가 강 건너 후백제의 동향에 정신이 팔렸을 때 그는 단도를 빼 들었다. 살아있는 돼지에게 수없이 던졌던 칼날이 왕건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그는 실패의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신숭겸 장군 그가 살아 있었다
그가 던진 단도는 어느 병사의 오른쪽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왕건은 의무병에게 자신의 목숨을 살린 병사를 최선을 다해 치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피를 흘리며 거꾸러져 있던 병사는 신음 사이로 '폐하'를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음성이었다.
"너는 누구냐?" 왕건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몇 년 전 선궁과 함께 들판에서 스쳐 지났던 외팔이 털보였다. 비록 한쪽 팔은 없지만, 장정 서넛의 몫을 거뜬히 하는 자이기에 간곡한 그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선궁이 그를 이번 전쟁에 참여시켰다고 했다. 잘못 들었나 생각하고 왕건이 일어서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폐하의 발바닥에 파군성은 아직도 빛나고 있사옵니까?" 파군성은 북두칠성의 일곱 개 별 중 하나다. 왕건의 발바닥에 일곱 개의 점이 그와 같아서 신숭겸은 농담 삼아 파군성에 해당하는 점을 자신의 별이라고 떼를 썼었다. 왕건은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신숭겸의 목소리였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묻은 목 없는 시신은 제가 아니라 김락 장군이었사옵니다. 제가 폐하의 어마를 타고 적을 유인하던 중 뒤따라온 김락 장군이 제게서 말을 빼앗았사옵니다. 그날 장군은 저에게 홀로 피신 중인 폐하를 걱정하며 폐하를 꼭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제가 폐하로 가장하기 위해 발바닥에 점을 그릴 때 김락 장군도 몰래 자신의 발바닥에 점을 찍었다고 했사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숭겸이 자네가 맞는가?"
꿈 같이 펼쳐진 현실이 믿기지 않는 왕건은 털투성이인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숭겸이 자네가 맞구나. 왜 그때 알아보지 못했을꼬.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더냐?"
왕건의 눈길이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에 머물자 숭겸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폐하 저로 인해서 큰일을 거스를까 두렵사옵니다. 꼭 대업을 이루시고 돌아오시옵소서. 폐하께 할 말이 많사오니 그때까지 제가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숭겸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냉정하게 판단하고 신속하게 대응해야 했던 왕건은 꼭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김락 장군, 그대의 이름을 평생 잊지 않으리라. 신숭겸 장군 꼭 지켜봐다오. 최후의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대의 잃어버린 팔을 기필코 찾아 주리니.'
신검이 중군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왕건은 사로잡은 후백제 군사를 묶어 중군 앞에 꿇어 앉혔다. 견훤의 무릎 아래 엎드렸던 장수들도 함께 세워 신검의 기를 제압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묘수를 부린 신검의 다급한 심정을 읽었으니 왕건은 이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가을 햇살은 공평하게 들판으로 내렸다. 그 속에 있는 단맛을 뽑아내는 자가 승리의 기쁨을 누리리니. 다시 빼 든 왕건의 칼끝이 번쩍였다.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일리천을 건너는 고려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승자도 패자도 원하지 않았던 일선군의 들판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엎드려 있어야 했다. 후삼국 최후의 전쟁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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