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커지는 냉장고, 작아지는 나눔

아홉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냉장고가 생겼습니다. 그전에는 집에서 얼음이나 시원한 음식을 먹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동네 가게에서 얼음 한 덩어리 사서 바늘과 망치로 쪼아 쓰는 것은 어쩌다 한 번, 그래서 한여름에 얼음 띄운 수박화채는 제법 호사를 부린 음식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냉동 음식이란 것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냉장고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냉장고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개는 작은 냉동실 한 칸에 반찬 통 몇 개만 넣으면 꽉 차는 크기라서 냉동 음식을 쟁여 놓고 먹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어지간한 집에는 식구가 최소한 네댓 명을 넘다 보니 음식을 남길 만큼 장만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동네 골목길에서는 음식을 서로 나누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보관해둘 방법도 변변찮으니까 상하기 전에 나눠 먹는 게 상책이었지요. 그런 판국에 음식쓰레기가 웬 말입니까. 음식이 남겠다 싶으면 먼저 옆집과 나누고, 그래도 먹다 남은 음식이 나오면 개나 고양이에게 먹였습니다. 우리나라 가구당 냉장고 보급률이 100%에 가까워진 시점이 1980년대 후반입니다. 그러니까 한 세대 전만 해도 음식이란 쟁여 놓는 것이 아니라 나눠 먹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남겼다가 버리는 것은 가히 죄악 취급을 받았지요.

그런데 90년대 들어 양문형 냉장고가 출현하고 김치 냉장고가 등장하던 무렵부터 새로운 풍속이 나타납니다. 식구 수가 주는데 냉장고는 도리어 커지고, 반대로 냉장고는 커지는데 집에서 밥 먹는 횟수는 더 뜸해졌습니다. 게다가 냉장고의 크기와 마음 씀씀이의 크기가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음식을 나눌 기회도 줄어 갑니다. 이제는 냉동고 한구석에 몇 달째 꽁꽁 얼어 있는 고기며 생선이 없는 집이 드물지요. 그래서 어느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이렇게 여쭈었답니다. "어머니, 이 음식 냉장고에 넣었다 버릴까요, 그냥 버릴까요?"

음식을 얼렸다 버릴지언정 나눠 먹지 않는 세태입니다. 사람이 먹던 음식은 음식쓰레기 통으로 보내고, 개나 고양이 밥은 사서 먹이는 시대입니다. 음식을 나눠 먹을 식구 수가 줄어드는 만큼, 음식을 나누는 마음도 쪼그라드는 시대입니다. 저장하고 담아두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사라져 가고, 내 것을 챙겨두는 방법이 많아질수록 소유를 향한 탐욕과 집착이 커지는가 봅니다.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Marshall Sahlins)에 따르면 채집과 수렵에 의존했던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서 일해야 했던 시간이 하루 두 시간쯤에 불과했다고 하지요.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인류의 저장 기술이 늘어나면서부터 일하는 시간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답니다. 쉴 틈 없이 일에 시달리는 인간의 현실은, 자신의 필요에 관계없이 어떻게든 많이 쌓아두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는 뜻입니다.

한가위가 다가옵니다. 흔히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을 주고받지요. 그러면서 오곡백과가 풍성해서 넉넉하게 나누는 명절이라는 설명을 붙입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말이 안 되는 설명입니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성한 때에 나눔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차라리 보릿고개라서 나눠 먹는다면 그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지요.

모든 것이 풍요롭다 해서 저절로 나누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야 저장을 못 해서 나누어 먹었다지만 지금처럼 대형 냉장고에 김치 냉장고가 떡하니 자리 잡은 시절에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가운 음식을 쟁여 놓는 냉장고는 키워왔지만, 음식을 나누는 지혜와 미덕은 채 키우지 못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는 한가위였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의 넉넉함은 커져 버린 냉장고 용량에서 오지 않고 오로지 나눌 줄 아는 마음에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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