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공격해오자 남한산성에 숨은 왕
전쟁이냐…평화냐…
한반도 위기 속 우리 현실과 맞닿아
'삼전도의 굴욕'으로 기억되는 패배의 역사가 스크린으로 기품 넘치게 재현되었다. 2007년 출간 이래 70만 부 판매, 100쇄를 돌파하였으며, 대산문학상을 받는 등, 어마어마한 문학적 기록을 남긴 김훈의 원작 소설 '남한산성'을 각색한 영화다. 정확히 소설 출간 10년 만에 '남한산성'은 영화로 탄생하였다.
소설은 남한산성에 갇힌 왕과 두 충신의 팽팽한 대립,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날카롭고 통찰력 있게 묘사하는 힘 있는 작품이다. 이렇듯 거대한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일은 매력적이지만 난항으로 가득하다.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힘 있는 묘사 스타일과 생생한 표현력을 살려내면서도 거대 규모의 영화로서 가져야 할 대중성과 상업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이루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은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에서 살아나야 한다. 전쟁의 스펙터클보다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의 말로 하는 전쟁이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가 문제다.
'도가니'와 '수상한 그녀'의 황동혁 감독이 이 엄청난 미션을 떠안았다. 보육원 폭행사건에서 법정투쟁까지, 소설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도가니'에서 진실과 거짓이 대립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긴장감의 폭발력을 그려내는 연출력은 이미 입증이 되었다. 관객 동원력까지 가진 감독으로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박수받을 일이다. 황동혁 감독의 첫 사극이자, 이병헌과 김윤석, 투 톱 연기파 스타의 앙상블 또한 처음 시도되는 일이다.
때는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조선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선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진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침입하며 일어난 47일간의 전쟁이다. 명나라를 버리고 새로운 군신 관계를 맺으라고 요구하는 청나라에 대해 청의 요구를 들어주며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청과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가 대립한다. 인조는 척화파에 기울었으며,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 왕은 청의 공격으로 고립된다.
380년 전의 사건은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다. 돌고 돌아 바로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한반도 전쟁 위기 상황에서 주변국과 긴장 관계에 놓인 우리의 현실과 영화가 겹쳐 보인다. 전쟁이냐 평화냐, 대답은 뻔하지만 국민뿐만 아니라 대립적 위치에 있는 정치인들도 설득해야 하며, 자존심을 지키면서 주변국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 지도자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인조를 둘러싼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라는 흥미진진했던 순간을 되살리는 것은 의미가 크다. 여전히 우리에게 놓인 현실이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극은 현실의 우화라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
두 충신의 말로 벌이는 치열한 혈투를 재현하는 이병헌과 김윤석의 팽팽한 연기 대립이 큰 볼거리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들이 내뱉는 많은 대사의 향연은 클로즈업으로 꽉 채워진 그들 얼굴의 미묘한 근육 떨림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전해진다.
전쟁 스펙터클로 상업성을 높이기보다는 말의 대립과 얼굴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영화에는 진중함과 품격, 그리고 우아함이 채워진다. 이전 성공한 사극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작품이다. '마지막 황제'(1987) 등 사극과 시대극 경험이 많은 세계적인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을 담당하여 영화에 고상함을 더한다. 눈 덮인 을씨년스러운 산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내는 촬영 또한 수려하다. 올 추석에는 예술 사극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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