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저 애미나이. 할머니는 평양북도 박천이 고향인 실향민이셨습니다. 할머니 하면 어려서 먹던 음식이 떠오릅니다. 피난민으로 계룡산 기슭, 아마도 지금은 계룡대가 있는 신도안일 겁니다. 대전에서 살던 내가 할머니 댁에 가면 갱엿 고는 냄새가 많이 났는데, 마을 전체가 엿을 고아 대전에다 팔곤 했습니다. 손바닥만큼 깨서 주시던 땅콩엿은 할머니의 냄새였고 대를 이어가는 끈적끈적함이 아닐는지 합니다. 이북 노인이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넓고 큰 사각의 앞치마, 그 옛날 패션. 빈손으로 사선을 넘어온 분이라 생활 속 절약은 말이 필요 없는 행동의 교과서이셨지요. 여름과 가을 사이 할머니 집에 가면 삼태기에 호미 들고 고구마 밭으로 갔습니다. 고구마 이랑을 헤집고 둔덕이 터지듯 갈라진 곳을 파면 덜 여문 고구마가 나옵니다. 쪄주시면 그렇게 맛이 좋았는데. 내 할머니, 고향에선 좀 살았다고 이 세상 끝날 때 결혼예복에 원삼 족두리 입으시고 관 속으로 여행 가셨습니다.
엄마는 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배우며 혼쭐이 많이 나고 울기도 하셨습니다. 맷돌로 밀을 갈아 밀가루를 내 먹었던 아픈 기억을 종종 하기도 하셨습니다. 곳간에서 끼니마다 내주는 곡식. 빨리 저녁 하라 호령에 통밀 넣고 맷돌질 하시는데 혼이 난 마음에 맷돌을 마구 돌리니 거칠게 나와, 이게 뭐냐고 또 호통하시며 할머니가 다시 가시면서 물 끓이라 하시어 우물가로 가서 물동이 들고 헹구다가 동이 째 던져 버리니 저 애미나이 보라, 저녁 굶어라, 할머니 호령에 엄마는 넋이 빠져 버렸었다고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옷 솔기를 깨끗이 못 빨면 다 꿰맨 옷을 마당으로 내동댕이치는 그리 무서운 어른이셨는데, 그래도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시 부모님, 남편 깨끗이 옷 지어 입혔다고 하시며 열여섯 살에 시집 온 눈물의 이야기. 그래도 딸을 내리 넷을 낳아도 서운한 내색은 안하셨다고 합니다.
엄마의 이북식 동치미, 그 맛은 요리 연구가도 울고 갈 것 같았습니다. 어찌 그리 사이다 같은 찡한 맛이 날까. 조그마한 무와 생강, 마늘을 주머니에 넣고 대나무 잎새, 소금뿐인데. 나는 흉내도 못 냅니다. 이북 음식은 투박하고 모양이 큽니다. 녹두 빈대떡도 큰 접시만하고 만두도 세 개만 담아도 그릇이 꽉 차고 인절미는 함지박에서 그냥 베어서 고물 묻히고 많이도 하셨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이북 음식이고 나는 충청도 맛을 내고 내 며느리 음식에는 호남의 맛.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호남이 바다를 끼고 있고 호남평야가 있고 해서 그런가, 김치도 그리 깊은 맛에다가 칼큼함이요, 육전도 충청도에선 못 보았는데 명절 준비하는 며느리 전 부치는 솜씨는 색감과 맛이 나이 먹은 나는 아무리해도 안 되는 것을, 며느리 솜씨는 타고 났나 싶습니다. 나는 오남매 맏며느리다 보니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면 음식 먹고 가지가지 봉지봉지 싸다보니 손 큰 며느리 소리가 듣기 싫지 않기에 많이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며느리는 명절 때만 되면 어머니 조금씩만 하세요. 처음엔 당황하고 서운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며느리 말이 현실적이고 맞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쌀독엔 쌀이 차야하고 물독엔 물이 차야 되고 연탄 광에 연탄 가득해야 마음 든든함이 아직도 있나봅니다. 엄마는 손에 땀 날 때 벌어라. 그 말씀을 잊지는 않았지만 살다보니 이제 할머니가 되고 뒷방으로 스스로 물러 앉아, 며느리의 돈 쓰임새를 말하고 싶지만 못했습니다. 어디 6.25세대를 이해하겠나요. 부모에게 받은 것 없고 몸뚱이 하나가 재산이었던 나는 집 하나 장만하느라 평생을 주린 배와 잠도 줄이면 살았는데.
날마다 배달되는 며느리 택배 상자를 쮸쮸 하면서 쳐다봅니다. 그러나 무어라 말을 할까요. 며느리도 자식이 둘이니 알아서 살겠지요. 호남 며느리와 이북 1.5세대 간 문화적 충격도 있었습니다. 이해라는 단어가 필요한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나고 손자, 손녀가 품에 안길 때 행복합니다. 이북 사람의 알뜰함과 충청도의 의복, 체면 유지를 중요시 하는 것과 호남 사람의 인정 많고 맛깔스럽고 푸짐한 밥상에 문화가 한 상에 차려지니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나는 할머니이며 내 할머니의 영원한 '저 애미나이'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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