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이 내린다. 동짓달 해 뜨기 전에 내리는 눈이 땅에 앉자마자 얼음판이 되어버린다. 앞서가는 젊은이들의 각기 목 같은 다리도 휘청거린다. 좁은 골목에 차를 몰고 들어올 아들이 염려되어 큰길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미끄럼을 탄다. 읍에서 사는 동생 집에 가려고 벼르던 터라 미룰 수가 없어서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들은 오지 않고 119와 견인차들만이 굉음을 내며 얼어붙은 도로 위에서 곡예를 한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들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집에서 내려오다 약간의 사고가 났습니다. 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저는 걸어서 출근해야 합니다." 화 탕 지옥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장단을 맞추려는 순간 걸어서라는 말이 앞을 가로막으며 천당과 극락을 한꺼번에 안겨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소리로 외쳤다.
한나절이 되어서야 아들 몰래 사고가 난 곳에 가 보았다. 마을회관 옥상에 달린 소리통에서는 이장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연거푸 흘러나온다. "주민 여러분, 오늘 아침 8시경에 마을회관 앞 비탈진 곳에서 동네가 터 잡은 이래로 가장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트럭 2대와 승용차 2대가 서로 엉키어 빼도 박도 못하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절대 차를 몰고 나오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그 시간에 워낙 사고가 많이 나다 보니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채 그대로이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가 없는 것은 아마도 인근에 있는 죽림 사 부처님께서 긴 팔을 펼치셨는가 보다. 중간에 끼여 제일 많이 찌그러진 아들의 차 안을 들여다본다. 운전석과 앞 의자에 놓인 두 개의 방석, 둘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엮어 만든 들꽃 무늬의 십자수 올이 아들의 심정처럼 보푸라기가 일었다. 그리고 변속기에 야무지게 묶여 있는 낯익은 댕기도 그녀의 마음처럼 회색으로 변했다.
아들은 열일곱 해 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차를 장만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나라에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한 가지도 특출한 것이 없는 아들의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 할부금만 차의 무게만큼 안고 백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신은 한 번에 다 뺏어가지는 않는가 보다. 달포가 지날 무렵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만나던 여자 친구가 온다는 것이다. 해가 저물 무렵 기차역에서 모시고 온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너른 마당이 좁을세라 풀쩍풀쩍 뛰었다. 첫눈에 그녀를 본 느낌은 지금도 가을 별빛처럼 또렷하다. 훤칠한 키는 자로 잰 듯 아들의 어깨와 마주했으며 하얀 이가 보일락 말락 웃는 모습은 박꽃처럼 은은했다. 또한, 북청 색 우단으로 만든 댕기로 얌전히 묶은 머릿결은 등줄기를 타고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무뚝뚝하고 정감 없기로 소문이 난 남편도 삼대 외아들의 여자 친구는 그리 귀했는가 보다. 저녁상 앞에서 평소 나한테는 못 알아듣는다고 아예 꺼내지도 않던 유식한 문자까지 써가며 입이 귀에까지 걸린다. 이날까지 그런 대접 받아 본 적이 없지만, 더 자랑스럽고 행복한 것은 아마도 자식 일이기에 그런가 보다.
밤길에 서울까지 보낼 수가 없었다. 새 이부자리를 깔아 누이고 나니 은근히 걱정이 밀려온다. 과년한 처녀를 이렇게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쪽 부모님 마음도 헤아려졌다. 이쯤 해서 조심스레 집안 사정에 대해 운을 뗐다. 묻고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집안 이야기 아닌가.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며 자신은 외동딸이라고 했다. 어렵게 말을 하고는 먼 길 탓인지 먼저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밤이 이슥하도록 깊은 시름에 빠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묻지 말 것을. 인연이 아니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아프다. 날이 밝아 와도 입은 소태보다 쓰다. 어제의 순간들은 머잖아 태풍이 쓸고 갈 듯 불길하다. 이 무거운 마음을 모른 채 그녀는 다음을 약속하고 떠났다.
아들은 다시 이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녀가 기차를 타고 여행 삼아 오갔다.
그러기를 계절이 또 한 차례 붉은 옷을 갈아입을 즈음,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린 날짜에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들은 그녀를 위하는 핑계를 대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당겨졌을 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을.
몇 번의 약속이 어긋나고 흰 눈이 그녀의 발자국 소리처럼 내리던 늦은 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잠결에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그녀의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캐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오빠를 부탁합니다." 심장에 총 한 방 맞으면 온몸이 이렇게 될까. 차라리 피라도 철철 흘렸으면 정신이라도 차릴 터인데. 마치 지구의 종말이 내게만 온 것 같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반성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거대한 토사만 남긴 태풍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쓸려가 버렸다.
아들은, 세워놓고 코 베어 간다는 서울 바닥에서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연인으로 의지하며 온 마음을 주었을 것이기에 나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아프고 외로울 것이다. 한동안은 자동차 속도위반, 음주운전 등등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녀의 간절한 부탁을 말하지 못한 채, 지켜보는 내내 나는 죄인이 되어 고개만 숙였다.
청춘남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한참이나 본다. 아들도 한때는 천하를 가진 것처럼 저리 웃었을 텐데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사람들의 눈총에 골목길이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자식이 그토록 원했던 행복을, 부모로서 작은 불쏘시개 역할도 못 한 것에 참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흔히들 사랑에는 원칙도 없다지만, 한쪽에 짚신을 신고 다른 쪽에 구두를 신는다면 절름발이밖에 더 되겠는가.
깊이 생각하면 이번 사고가 아들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체취가 묻어있던 자동차도, 그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댕기며 방석도 함께 보냈으니 새 그릇에 새 밥 담기를 소망한다.
고양이 부부가 담 밑에서 서로의 등을 기댄 채 자고 있다. 저 미물들처럼 아들에게도 이제는 허름하지만 입을수록 편한 옷 같은 그런 사랑이 봄풀처럼 돋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느덧 흰 귀밑머리로 홀로 밥을 먹는 아들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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