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례의 추억…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권상

늙으면 잠이 짧아진다더니 근래에 내가 그러하다. 초저녁에 잠이 들면 보통 새벽녘에 눈이 떠지고 만다. 시계를 보면 새벽 서너 시 어름이다. 눈을 감고 누운 채 자리에서 뒤척이다 보면 옅은 잠이 슬쩍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잠이 달아나고 만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듯 생각이라는 놈은 지치지도 않고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대부분은 지나간 일들이고 과거의 얼굴들이다. 특히 요즘 자주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젊은 시절, 바쁘게 사느라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요새는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내 생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참으로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그 시절이 내 생애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면, 아스라한 청춘의 기억들이 청쾌한 수박향기처럼 다가온다.

그녀를 만났던 때는 1957년 여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김천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 혼자서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기차여행이었다. 같은 반 친구였던 규하가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규하는 김천 지례가 고향인데 대구에 유학을 와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자기 마을 이야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재밌게 들어주는 내게 여름방학 때 꼭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하였다. 지례에 와서 동재를 넘어 오면 마을이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 자기 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나는 규하가 말하던 시골마을을 즐겁게 상상했고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방학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마침내 큰 가방에 책과 옷가지를 넣어 일주일 정도 친구 집에서 묵을 예정으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대구역에서 기차표를 끊고 마침내 기차에 올라타게 되었을 때 낯선 세계와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의외로 기차 안은 한산했고 자리가 반쯤은 비어 있었다. 나는 객차 중간쯤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부드러운 녹색 의자는 푹신하고 안락했다. 멍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내가 책이라도 꺼내 보려고 가방을 열었을 때였다.

"저기요."

고개를 들어보니 웬 여고생 두 명과 열 살쯤 된 사내아이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어쩐지 초조한 얼굴이었다. 뛰어왔는지 숨도 차 보였다. 여학생 중 하나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게 대뜸 말을 건넸다.

"학생, 미안한데요. 저 뒤쪽에 선생님들이 머리 조사하고 있으니 함께 가족 여행하는 것처럼, 합석하면 안 될까요?"

"예, 좋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 세 사람은 내 맞은편 좌석에 얼른 앉았다. 교복의 배지를 보니 H여고 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재빠르게 교복 윗주머니 덮개에 달린 배지를 포켓에 말아 넣었다. 그리고 앞머리를 최대한 늘어뜨리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자꾸만 당기며 매만졌다. 그녀들의 머리는 그 무렵 유행하던 오드리 햅번 스타일로 짧게 커트되어 있었다. 그즈음에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고 있었고 대구에도 이미 '햅번 스타일'이라는 머리 모양이 대유행일 때였다. 이 여학생들도 멋 부린다고 그런 머리모양을 하는 바람에 사회지도교사의 눈을 피하느라 내 자리까지 온 모양이었다. 머리며 옷매무새를 황급히 가다듬은 여학생 하나가 뒤쪽을 힐끗 뒤돌아보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어기 저 뒤 칸에 사회지도 교사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일어나 두리번거리면서 그쪽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열차 앞 칸에 사회지도 교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 두 사람이 객실의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우리가 있는 객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새 학생들은 이해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단속이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풍기단속이라는 명분하에 학생들은 머리모양과 길이를 엄격하게 규제 받았다. 머리카락이 길거나 짧아도 안 되고 교복치마가 짧아도 안 되는 때였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나는 중년 남자들이 출입문을 열고 우리가 탄 객실로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때 그 중 키가 큰 여학생이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중간에 끼어 앉아 있는 아이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는 거였다. 일부러 큰소리로 고모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야 어쩌고 하면서. 누가 들어도 가족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대화를 그렇게 이끌어내었다. 다른 여학생 하나는 얼굴이 희고 귀여웠는데, 웃으면서 "맞아. 니 고모 말이 맞는 것 같다, 호호호." 하면서 맞장구까지 쳤다.

나는 그들의 임기응변에 놀라면서도 내심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나도 손에 책을 펴든 채 여학생들과 호응하며 함께 웃었다. 그들이 점점 다가왔다. 두 사람은 좌우로 살피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그들이 다가왔고, 우리들의 신경은 온통 거기에 모아져 있었다. 마침내 숨 막히는 순간이 다가왔다. 다행히 어린아이가 끼어 있어서인지 그들은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쳤다. 그들이 점점 멀어져 다음 칸으로 건너가자, 여학생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후유~큰일 날 뻔했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야."

"그나저나 개학 때까진 머리가 다 자라겠지?"

그녀들은 잠시 그렇게 조잘조잘 즐겁게 떠들더니 이윽고 맞은편 나를 향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거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사히 넘겼네요."

"이제 보니 대구상고 학생이네요."

어린 조카아이를 데리고 온 키 큰 여학생이 내 교복 배지를 보면서 말했다. 키가 작고 귀여운 여학생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지요?"

"김천에서 내려 지례까지 갑니다."

"어머, 그래요? 나도 지례에 사는 고모집에 친구와 놀러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지례는 무슨 일로?"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초행길이라 집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되었네요. 내가 그쪽 지리를 잘 아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귀여운 여학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 혼자 먼 길을 나섰던 나는 낯선 시골길을 어떻게 찾아가나 싶어 걱정을 했는데, 그 여학생이 그쪽 지리를 잘 알고 있고, 더구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윽고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키 큰 여학생부터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조카아이라는 조그마한 사내아이의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은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키 작고 귀여운 여학생이 자기 이름을 말했다.

"장복순이라고 합니다."

그 여학생은 눈이 크고 맑았으며 피부가 백옥 같았다. 그들은 3학년이라고 했다. 나보다 두 학년이 높았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여학생들과 마주앉은 상황이 쑥스럽고 부끄러웠지만 그들이 나보다 두 학년이나 위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편안한 마음도 들었다.

키만 멀쑥하게 컸지 숫기라곤 없는 나는 여학생과 마주 앉은 것도, 낯선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들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던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기차는 어느 새 김천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지례까지 가는 버스도 함께 타고 갔다.

"고마워서 그러는데, 같이 가서 점심 함께 먹어요."

버스에서 내리자 장복순이라는 여학생이 그렇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막상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나는 흔쾌히 그녀들을 따라갔다. 정류장 근처의 중국집이었는데 의외로 조용하고 깨끗했다. 분명 손으로 빚었을 짜장면도 맛있었다. 우리는 그새 많이 가까워져 식사 중에 서로의 학교 이야기, '로마의 휴일' 영화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등을 스스럼없이 나누었다.

"친구 집에는 며칠 묵을 건가요?"

"일주일 예정하고 갑니다. 그쪽은요?"

"우린 이틀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장복순 여학생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일주일 후 대구 가는 기차도 같이 타고 갔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주머니에서 친구집 주소를 적어놓은 쪽지를 꺼내 그녀들 앞에 내놓았다.

"이게 그 친구집 주소거든요. 어떻게 가면 되지요?"

쪽지를 들여다보던 장복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 고렴 마을이라고요?"

"예, 그렇게 적힌 대로 그 마을일 겁니다만, 왜요?"

나는 그녀가 놀라는 게 의아해서 그렇게 물었다.

"거기에 가려면 지금 여기서 시오리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산이 얼마나 험한지 몰라요. 가는 길에 민가도 없고, 여기서 오 리 정도 가면 민가가 두 채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채는 우리 고모부의 친척집입니다. 몇 번 가본 적이 있긴 한데, 어쨌든 지금 혼자서 거기 간다는 건 무리인 것 같네요."

"그래도 가야지요."

나는 산고개가 험해봤자 내 든든한 다리로 몇 시간만 부지런히 걸으면 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해 지기 전에는 친구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자 장복순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어떻게 마중도 안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그 험한 곳에 친구를 초대해놓고."

장복순은 진정 내가 걱정스러운지 내 친구인 규하를 나무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친구를 변명했다.

"그 친구는 내가 오늘 간다는 건 모를 거예요. 방학 때 아무 때나 오라고 했거든요."

요즘은 집집마다 전화가 개통돼 있지만 당시에는 전화가 없었다. 편지라도 보내 내가 언제쯤 방문할 것이라고 알렸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장복순에게 동재를 넘어가는 길을 자세히 전해 듣고 식당에서 일어났을 때는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 또 만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친구 집 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왠지 아쉬웠지만 나는 그들과 손을 흔들며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신작로를 한 오 분 가량 걸었을까, 이윽고 왼편으로 난 황톳길로 접어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말한 대로 넓은 하천이 나타났다. 하천변에는 고운 모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하천 가운데는 거의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를 만큼 깊이도 만만찮았다. 나는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무거운 가방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건넜다. 그리고는 하천 둑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산을 돌자마자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산과 강과 들, 그리고 길과 계곡이 한 데 어우러진, 생생한 대자연과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그곳은 정말 정신이 번쩍 뜨일 만큼 신선한 풍광이었다. 공기조차 달콤하고 싱그러웠다. 나는 그 경이로운 풍광에 도취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구불구불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면경처럼 맑았고, 계곡 군데군데에는 바위들이 그곳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도열해 있었다. 산기슭의 넓은 밭에는 수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난 누런 흙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그림 속의 한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림 속을 꿈꾸듯이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학생!"

돌아보니 저 멀리서 아까 헤어진 그 여학생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반갑고 놀라워서 발길을 멈추고 그녀들을 기다렸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숨을 헐떡이며 따라온 그녀들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학생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이 딱하고 걱정이 되어서 따라왔어요. 초행길이라 힘들 것 같아서 길 안내 해주려고요."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장복순이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학생이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기라도 할까 봐서요. 우리가 누나잖아요."

키 큰 여학생도 그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기쁘고 고마웠다. 안 그래도 어떻게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그런 근심이 금세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 길은 인적이 드물어 산짐승이 자주 나타나거든요. 우선 중간 지점인 우리 고모부의 친척집까지라도 바래주고 갈게요."

장복순이 그렇게 말했다. 내 발걸음은 더 경쾌하고 즐거워졌다. 우리는 모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맘껏 떠들고 웃으면서 춤추듯이 걸었다. 길가의 풀꽃을 꺾어서 계곡물에 배처럼 띄우기도 했다. 키 큰 여학생의 조카아이도 좋은지 마냥 퐁퐁 뛰면서 헤헤거렸다. 나를 바래다주겠다면서 빠른 걸음으로 쫒아 온 탓인지 그녀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햅번 스타일 앞머리도 땀으로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시원한 계곡 옆을 지날 때 키 큰 여학생이 걸음을 멈추더니 장복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 되겠다. 우리 여기서 등물이라도 좀 하고 가자."

금방 의기투합된 그녀들은 아이를 데리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내겐 '저기 나무 뒤에 가서 쉬라'고 하고서 말이다. 얼마 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들끼리 등물을 하면서 시원하다고 웃고 떠드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서 혹시 누가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하고 살피고 있었다. 그때 까르르 하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하얀 살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심장이 이유 없이 쿵쿵거렸다. 잠시 후 물기가 묻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그녀들이 왔다. 키 큰 여학생이 내게 말했다.

"학생, 학생도 더운데 등물을 하고 갑시다. 물이 참 시원해요."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어서 장복순도 나를 재촉했다.

"그래요. 땀을 많이 흘렸을 테니, 가서 등물 좀 해요."

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그녀들을 따라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웃통을 벗고 흐르는 얕은 물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장복순. 그녀가 두 손을 모아 물을 가득 퍼서 내 등에다 부었다. 시원한 물이 등허리에서 흘러내렸다. 짜릿함이 온몸에 퍼졌다. 그런데 몇 번 물을 부어주던 그녀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내 등을 부드럽게 미는 것이었다. 내 심장이 다시 세차게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쿵쿵. 쿵쿵. 쿵쿵.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성의 손길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아찔했다.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등물까지 한 우리들은 다시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목이 말랐던 나는 자꾸만 밭의 수박을 보고 침을 삼켰다. 수박을 보니 더 갈증이 났다. 이심전심이었던지, 그때 두 여학생 중 누군가가 '아 수박 먹고 싶다. 우리 수박 하나 서리할까' 라고 말했다. 산기슭에 펼쳐진 비탈 밭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수박들이 뜨거운 햇볕에 달콤한 수박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남의 수박을 허락도 없이 먹습니까?"

나는 주인 없는 밭에 들어가 수박을 훔쳐 먹자는 소리에 놀라 그렇게 말했다.

"시골에서는 그런 것을 도둑질이라고 하지 않고 '서리'라고 해요. 한두 개 따먹는 건 눈감아주지요. 수박서리, 참외서리, 닭서리, 고구마서리...호호호."

장복순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이 키 큰 여학생은 이미 수박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어디선가 주인이 나타나서 금방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불안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라곤 우리 일행뿐이었다. 짙은 녹색 잎으로 뒤덮인 수박밭 위에는 여름 하오의 강렬한 햇빛이 눈부시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느 새 키 큰 여학생이 수박 한 통을 따서 넓은 치마 깃에 숨겨 나왔다. 우리는 공범자가 되어 가슴을 두근거리며 얼른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우리는 햇볕에 달궈진 수박을 찬 계곡물에 담가 두고 수박이 차가워지기를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도저히 갈증을 견딜 수 없었던 우리는 돌멩이로 수박을 깨트려 맛있게 나눠 먹었다. 식지 않아 미지근했지만 알맞게 익은 붉은 과육에서 단물이 줄줄 흘렀다. 우리는 배가 불렀고 즐거웠다. 하지만 남의 것을 훔쳐 먹은 과보는 금방 되받고야 말았다.

얼마 못가서 우리는 모두 설사를 만났다. 배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설사가 좔좔 쏟아졌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숲 속에 들어가 몇 번씩이나 변을 보았다. 함께 저지르고 함께 겪고 있어서인지 우리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리고 번갈아 배를 움켜쥐고 뛰어가면서도 하하 호호 깔깔거렸다.

그녀들은 나를 자기들보다 어린 1학년이라 베이비라고 놀리며 어린애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언짢지 않았다. 도리어 내게 주어진 이 신선하고 달콤한 시간이 너무나 좋아서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장복순도 이렇게 말했다.

"학생 덕분에 고3 마지막 여름방학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되었네요."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더 좋았다.

오후 4시경, 드디어 우리는 그녀 고모부의 친척집에 도착했다. 오십대 중반의 아저씨가 장복순을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그는 부엌에서 삶은 감자를 바가지에 한 가득 내와서 우리 앞에 내놓았다. 먼 길을 걸어왔고 더구나 도중에 설사를 만나 진을 뺀 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었다.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학생은 이 깊은 오지에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냐?"

"고렴마을에 문규하 라는 친구 집에 가는 길입니다."

"뭐, 고렴마을이라고? 거길 가려면 동재를 넘어 가야하는데 이미 시간이 늦었어."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나는 얼른 그렇게 말했다.

"저 동재를 다 넘으려면 해가 빠지고 어두워지고 말아. 길을 잃고 만다고.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가라니까."

아저씨는 정색을 하시면서 나를 말렸다. 이 산은 험준하고 높을 뿐 아니라 밤에 호랑이 같은 산짐승도 더러 나온다고 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들도 말렸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가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내일 아침에 일찍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서 길을 나서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비록 허름한 오두막이라 해도 하룻밤 정도 묵을 수는 있었지만, 아저씨가 사는 방에는 삿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개미들이 어지럽게 기어 다녔고, 바닥은 모래 같은 것이 퍼석퍼석 일어났다. 이런 집에서 잠을 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말씀은 고맙지만 친구가 기다릴 것이라고 말하고는 가방을 들고 얼른 일어섰다. 벌써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단호한 내 행동에 그녀들도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더 말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다시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초입에 도착했다. 정말 그 아저씨 말대로 산은 웅장하고 높았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이 좁다란 산길이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끝도 없이 위로 올라가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겨우 몇 미터 올라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책이 들어있는 무거운 가방이 문제였다. 대체 친구 집에 놀러가면서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가져왔단 말인가. 내 어리석음을 수없이 후회하면서 던져버리고 싶은 가방을 손에 들었다가 어깨에 짊어졌다가 하면서 헉헉거렸다. 인적이 없는 숲은 나무와 풀이 우거져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간혹 숲속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저씨 말대로 호랑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가슴이 조여들기도 했다.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학생~~ 학생~~"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그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나는 반갑고 기뻐서 얼른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예, 여기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얼마쯤 기다리자 바로 아래의 모퉁이 길로 그녀들이 숨을 쌔근대면서 아이와 함께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처럼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장복순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안 놓여서요. 호랑이가 나타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겠지요? 호호호"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우연하게 기차에서 잠시 만난 사람일 뿐인데 이토록 나를 걱정해주고 도와주다니! 더구나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있는 연약한 여학생들이 동생도 일가친척도 아닌 나와 동행해주기 위해 이 험한 산길까지 따라와 주다니! 지금 생각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아 기운이 솟았다.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들처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길을 올랐다. 그녀들은 내가 가방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숲 속에서 나무 막대를 가져오더니 내 가방 손잡이에 꿰어 두 여학생이 나란히 들어주었다.

처음 만난 나에게 이토록 큰 친절을 베풀어주는 그녀들에게 이제는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내 가슴은 감사함으로 벅차올랐다. 나는 가방 대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산길은 오르고 또 오르고, 돌고 또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친척 아저씨가 들려준 동(똥)재의 전설이 실감났다. 옛날 현감을 태운 가마가 이 높은 재를 넘을 때 가마꾼들이 너무나 힘이 들어 똥을 쌀 정도였다 한다. 그래서 가마꾼들 사이에 똥재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힘든 산이라면 누구라도 큰 볼일을 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얼마쯤 갔을까, 산마루에 거의 다 왔다 싶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렀다. 하지만 산중의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쳤다. 얼마 못 가서 우리는 깜깜한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초행길이라 어디로 길이 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하여 길처럼 보이는 곳을 디디면서 걸었다. 맞잡은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눈 뜬 장님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소걸음 걷듯이 천천히 걸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행군이었다. 초조하고 막막했지만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싶어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천천히 길을 찾으면 될 것이라고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앞장을 섰다. 그러다가 우리는 혹시 저 아래 마을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으려나 싶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얼마동안 소리를 지르며 길을 헤매고 있는데, 산 아래쪽에서 "거, 누구요?" 하는 남자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살았다, 하는 감격에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기뻐했다. 알고 보니 친구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무사히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왔다.

친구네 집에 도착하자 규하가 깜짝 놀라면서 방에서 뛰어나왔다. 그것도 두 여학생과 어린 아이까지 동행하여 동재를 넘어 이 밤중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그마한 동네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동네 사람들도 하나 둘씩 규하네 집으로 모여들었다. 늦은 밤에 남의 집을 방문한 죄송함도 잠시,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너무나 기뻤다.

규하 부모님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안녕하세요? 규하 친구 권상진이라 합니다. 오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늦었습니다."

"어서오너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구나. 들어가자."

"니가 이렇게 올 줄은 몰랐다." 규하가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방학 때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초청은 했지만 막상 내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무사히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내 친구를 잘 안내해줘서 고맙습니다. 큰일 날 뻔했는데 무사히 잘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규하가 여학생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친구의 부모님은 토끼를 잡아서 우리를 대접해 주셨다. 아들의 친구가 놀러 왔을 뿐인데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해주니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늦은 저녁밥이었고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친구의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바깥채까지 있는 큰 집이었다. 안채의 넓은 마당 한켠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었는데 빨간 석류꽃이 불빛을 받아 초롱처럼 빛나고 있었다. 대청마루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우와, 저거 좀 봐라."

그러자 규하와 여학생들도 내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한가득 보석들이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하늘에다 눈부신 금가루를 흩뿌린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쏟아질 듯 반짝거리며 촘촘히 박혀 있는 무수한 별들을 보면서 그녀들도 신기해했다. 하늘에 어찌 저렇게 많은 별이 있었더란 말인가! 나는 마치 한 번도 밤하늘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찬란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이 어딨더라?"

크고 작은 무수한 별들 속에서 장복순은 북두칠성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그녀를 도와 북두칠성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살피는데 규하가 먼저 찾아냈다. 규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니 과연 일곱 개의 큰 별이 눈에 잡혔다. 선으로 연결하면 자루 달린 바가지 형상이 분명했다. 하늘 가운데에는 안개처럼 뿌연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고,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로 긴 꼬리를 남기면서 유성이 날아가기도 했다.

가슴이 벅찼다. 어제까지 내가 한 번도 상상할 수도 없는 장소에 와서, 또 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여학생과 이렇게 찬란한 밤하늘을 함께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고 낯설어서 어쩐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잠을 자러 갔다. 그녀들과 어린 아이는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로, 나는 사랑채 끝에 있는 규하 방으로 갔다. 방은 깨끗한 한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바닥은 들기름을 발라 노랗게 윤이 났다. 나는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너무 피곤했던지 나는 늦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동네에서 아줌마들과 처녀들이 잔뜩 규하 집에 모여 있었다. 야밤에 남녀 고등학생들이 고개를 넘어 찾아왔다는 소문은 조그마한 동네에 금방 퍼졌던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친구 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올렸다. 지난밤에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아침에 그분들을 뵈니 저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얼굴이 한없이 맑고 자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골에 사시는데도 힘든 농사일에 찌들려 사시는 분들 같지 않았다. 대청에는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온갖 나물과 귀한 간고등어까지 올라와 있는 진수성찬이었다.

아침을 먹고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니 한 20여 호가 되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규하의 집만 기와집이었다. 육간대청의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바깥채까지 있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이 깊고 깊은 산골마을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규하네 집은 대대로 그 지방에서 소문난 명문가였고 큰 부잣집이었다. 규하는 그 동네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귀한 댁 도령이었고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구까지 와서 유학하는 고등학생이었다.

규하는 우리 일행에게 동네 구경을 시켜준다며 안내했다. 기와에 푸른 이끼가 자욱하게 낀 오래된 사당을 보았고 비어 있는 시골분교도 구경했다. 분교 운동장에는 녹슨 시소와 그네가 있었고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까치가 와서 깟깟깟 울어댔다. 함께 온 여학생들이 아이와 같이 그네를 타고 있는 사이, 규하가 내 옆으로 와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 넌 두 여학생 중에 누굴 좋아하니? 우리 짝 지어서 연애 한 번 할까?"

나는 깜짝 놀랐다. 상상도 못한 말이 친구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냐? 나를 구해준 은인 같은 사람들한테!"

내가 단호한 목소리를 그렇게 말하자 친구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알았다, 인마야."

규하는 시골에서 살아서 순박한 면도 있었지만 부유한 집의 외아들로 자라서인지 말에 거침이 없었고 행동도 자유분방한 면이 있다는 걸 그때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난 후 그녀들이 돌아갈 채비를 했다. 산길에 밝은 규하가 여학생들을 지례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나도 가고 싶었으나 자꾸 몸이 어슬어슬 춥고 한기가 들어 도저히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잘 가세요.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대문 앞에서 두 여학생과 작별 인사를 하고 그새 정이든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장복순과 일주일 후 대구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헤어지는 아쉬움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꼬박 사흘을 헛소리까지 하면서 몸살을 앓았다. 열이 올라 온몸이 불덩이였다. 자상한 친구 어머니가 걱정을 하면서 한약을 달여 주고 간호를 해 주셨다. 낯선 경험에 대한 혹독한 신고식 같은 것일까. 친구와 공부를 하고 신나게 놀려고 계획했던 일들은 물거품이 되고, 산골 마을 친구의 방에서 열에 들떠 앓느라 시간을 거의 다 보내고 말았다. 사흘이 지나자 열도 내리고 조금쯤 거동을 할 수 있었다. 며칠을 더 쉬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 나는 규하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규하는 동재를 넘어 지례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김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고 있었다. 설렘과 기대가 온통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대구역에 마중 나와 있을 그녀, 밝고 귀여운 장복순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로 김천역에서 기차를 탈 때까지 그녀는 한순간도 내 생각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열에 들떠 혼미한 중에도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이틀간의 장면들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장면들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았다.

기차가 대구역에 도착했고, 대합실로 걸어가는 동안 내 가슴은 몸서리 칠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대합실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좁은 대합실에 어디 숨을 곳이 있을까마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합실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허탈함이 그 순간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오직 그녀만 생각했던 내 마음이,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부질없는 꿈인가 싶었다. 몸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진 채로 대합실 밖으로 천천히,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나는 아, 하면서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여학생.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장복순. 그녀가 광장 한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감격했다. 기쁨과 행복감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그 며칠 간 그녀에 대해 결코 내가 헛된 꿈만 꾼 게 아니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 차림으로 나온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 더 예뻤다.

"이렇게 마중 나와 주어서 감사합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고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걷기만 했다. 그녀도 말없이 따라왔다. 얼마 동안 걸었을까, 대건학교가 나왔고 우리는 그 학교 교정에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그녀가 띄엄띄엄 말을 했다. 그날 규하와 같이 그녀들이 동재를 넘어 지례로 나갔던 일. 고모 집에서 친구와 어떻게 지냈더란 이야기. 나도 그녀들이 가고 나서 이내 몸살이 나서 심하게 앓아누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친구 어머니가 극진한 간호를 해 주셨다는 이야기까지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를 만나 함께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심장이 뛰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 같은 바보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글쎄 그 흔한 다과점이나 빵집에라도 들어가 함께 하는 시간을 좀 더 가졌어야 했다. 그때까지 여학생들과 대화해 본 적도, 사귀어본 적도 없는 나는 그 순간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집이 반월당 고려다방 옆 골목이라고 해서 그날 나는 거기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에 만날 약속도 하지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고3이 된 나는 입시 때문에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하고 형제 많았던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공부를 잘했던 나는부모님의 기대가 컸다.

학교 담장 아래 보랏빛 라일락이 만개하던 날이었다. 저녁 무렵 교문 앞을 나서고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학생!"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졸업을 한 그녀는 이미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뛰어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던지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도 했다. 그녀는 졸업 후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조우한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학교 앞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 사이다 한 병을 사서 그녀와 나눠 마시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고 곧 삼촌 회사에 취직을 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상과 계열로 진학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대학생이 되면 우리 다시 꼭 만나자고 말했다. 그녀도 그러자고 말하며 발그레 얼굴을 붉히면서 웃어주었다. 그날도 그녀를 바래다주러 반월당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내 옆에서 길을 걷던 그녀가 갑자기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더니, 그녀가 소곤거리듯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저어기, 우리 오빠에요."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길 건너편 골목길에는 군복 입은 건장한 젊은이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권총이 꽂혀 있었다. 그는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지프차 문을 열더니 이내 차에 올라탔다.

장복순은 군인인 자기 큰오빠가 아버지보다 더 무섭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길을 건넜다. 반월당 오른 편에 고려다방이 있었는데, 그녀의 집은 그 다방 옆 골목길 안쪽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내가 대학생이 되면 꼭 만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했다. 그녀는 골목길로 들어가며 두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나는 그때부터 더 열심히 공부했다. 다시 그녀를 만날 때는 멋진 대학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해 겨울 마침내 나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k대학에 무시험전형의 원서를 냈다. 그때는 한 학교에서 한 명의 학생만을 추천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홀로 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 완전히 주관식 시험이었고 심층면접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합격했고, 집안의 경사라며 아버지는 동네잔치를 열었다.

그때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다들 가난하기 짝이 없었고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합격하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었다. 대학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길이 없었다. 소식을 전할 곳이 없었다. 다시 만날 날짜와 장소를 미리 정해두었다면 그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구체적인 약속 시간과 장소를 먼저 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 해 겨울 나는 우연하게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고려다방 골목길 근처에 서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골목길을 서성대며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했던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집 앞까지 바래주었더라면 집이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내게는 왜 그 만한 배짱이 없었던가! 정말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게 헤어지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골백번도 더 했다.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니 봐야 할 책과 해야 할 공부가 태산이었다. 다른 데 정신을 팔 여유가 없었다. 인천 소사에 있는 누님 집에서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면서 통학을 해야 했으므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기차를 타면 가끔 그녀 생각이 났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느 새 해가 바뀌었고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서 와야 할 등록금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초조하고 불안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대구로 가기 위해 무작정 서울역으로 갔다. 그런데 내 주머니에는 막상 대구까지 차비가 모자랐다. 내 옷깃에 있는 k대학교 배지를 본 어떤 고마우신 역무원 아저씨가 내 사정을 듣고 도와주었다. 왜관에서 기차를 탄 것으로 해 줄 테니 대구까지 가라고 하면서 표 한 장을 끊어준 것이다. 그날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문득 그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 꼭 만나기로 한 그 약속. 대학생이 된 나는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주소조차 모르니 편지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내려가면 그 고려다방 골목길을 샅샅이 수소문해서라도 어떡하든 그녀를 찾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미래고 운명인 모양이다. 그 결심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버렸다. 집에 도착하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둘째 형수가 가족들 몰래 계주를 하다가 사고를 내어 빚쟁이들이 본가에까지 들이닥쳐 부모님이 몸져 누워계셨다. 그 후 나의 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학비를 스스로 벌기 위해 뛰어 다녀야 했다. 장복순, 그녀의 얼굴이 언뜻언뜻 떠올랐지만 그녀를 찾아볼 겨를이 없었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영 통지서를 받았고, 나는 쫓기듯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내 홍안의 스무 살 언저리, 복사꽃 고운 빛으로 피어나던 그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시들어갔다. 나는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 규하를 다시 만난 것은 어느 해 여름운전면허 학원에서였다. 비록 이십여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한눈에 알아보았다. 우리는 반가워서 서로 포옹을 하고 한참이나 손을 놓지 못했다.

규하는 경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 나는 아내와 함께 그의 집에 초대받았고 그의 부인과 아이들도 만났다. 그는 팔달시장 옆 미나리 깡이라고 부르던 주택가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집 거실에는 일제 녹즙기가 놓여 있었는데, 규하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녹즙을 먹는다 했다. 하도 많이 사용해서 녹즙기를 두 번째 바꾸었다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는 당뇨를 앓고 있었다. 오래된 지병이라 했다.

우리는 그 뒤에 몇 번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만남을 가졌다. 아내에게 고등학생 때 규하의 집에 찾아가던 이야기며, 그때 도움을 받은 고마운 여학생 장복순이라는 이름을 말 한 것도 그때였다. 아내가 장복순을 나의 첫사랑이라고 놀리게 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언젠가 규하가 자기 고향마을에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지금은 지례에서 지프차로 갈 수 있는 길이 났으니 예전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우리 내외는 규하 내외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고실개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그곳은 옛 풍광은 사라지고 많이 변해 있었다. 야산은 죄다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고 도로가 개통되어 있어 크게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었으나 굽이굽이 아름답던 옛길의 정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규하 부모님은 그때에도 정정했으며,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리고 미리 준비했다면서 살아 있는 오소리 한 마리를 선물로 주셨던 게 기억난다. 그때 규하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도.

"그때 너 우리 집 찾아오느라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 그러니 집에 가져가 달여서 몸보신해라."

오소리 쓸개를 따로 떼 두었다가 소주에 담궈 한잔씩 마시면 좋다고 하는 말도 덧붙였던 것 같다. 나는 규하 말대로 살아 꿈틀거리는 오소리를 자루에 담아 가져와서 약 달이는 집에서 한약과 함께 달여 먹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내 생각이 짧았음이 분명했다. 그때 규하의 부모님은 어쩌면 지병이 있는 아들 먹이려고 오소리를 산 채로 잡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것도 모르고 나는 사양도 하지 않고 그것을 덥석 받아왔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한탄은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규하 때문에 드는 회한일 것이다.

같은 대구에 산다고 하나 서로 바빠서 한동안 소식이 뜸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규하가 죽었다는 부고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그의 장례가 끝나 있었다. 그의 아내에게 물으니, 너무 위급한 상황이라서 부모님이 와서 서울 큰 병원에 이송하였고 경황이 없어서 소식이 늦었다고 했다. 한창의 나이에 그는 그렇게 하직 인사도 없이 내 인생 무대에서 홀연히 내려가 버렸다.

어느덧 내 나이 일흔 하고도 여덟 해가 지났다. 우리 세대는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보리밥과 주먹밥으로 겨우 연명하면서 자랐다. 우리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산업역군이 되었고 '새마을'을 가꾸기 위해 새벽종이 울기 무섭게 일어나 일터로 나갔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가난하고 척박한 터전 위에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전쟁과 가난을 견디면서 거대한 파도에 떠밀리듯 그렇게 격랑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 속에서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아 길렀고 돈을 벌기 위해 무섭게 일도 했다. 내 사업이라는 걸 시작하고는 더욱 정신없이 바빴다. 그 세월이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새 내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늙는다는 것은 몸의 쇠퇴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나 정신이 함께 늙는 것은 아니다. 누가 말했던가.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만들지만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고.

나이가 많으니 좋은 점도 많다. 늘 어딘가에 매여 살아왔던 삶이 훨씬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다. 은퇴를 하고 나니 내가 갑자기 시간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도 요새는 많이 한다. 매주 친구들과 등산도 다니고 서점에 가기도 하고 음악을 듣거나 일기도 쓴다. 그리고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면서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새삼 고마운 사람도 많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많다. 누가 말릴 것인가. 고마운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고맙다 인사를 하면 되고, 보고 싶은 사람은 찾아서 만나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를 찾아 나섰다. H여고를 찾아갔고, 동창회 연락담당이라는 B선생을 만났다. 얼마 전 그 선생이 연락을 해왔다. 총동창회장과 연락이 되었다고. 그러면서 그가 그녀의 이름과 졸업년도를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해주었다. '57년 졸업생 장복순' 이라고.

B선생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부재중 전화'가 오지나 않았는지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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