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끊어지지 않는 인연…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이말호

1, 일제강점기 때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이른 새벽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굴까? 이 새벽에,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질녀의 울먹이는 음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모, 엄마가 위독해, 새벽에 고려병원 중환자실에 왔어, 빨리 와!"하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쌀쌀한 꽃샘추위가 남아 있는데 창문틈새로 싸늘한 새벽바람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병고로 인해 앙상한 언니의 모습이 멀리 떠가는 먹구름같이, 살아온 인생역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해 나갈 기력이 다 소진되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삶과 죽음의 사투를 벌리고 있을 처절한 한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늘 입버릇처럼 이제 한 많은 이 세상 미련 없이 떠나고 싶다 하시던,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만......!

언니와의 인연이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인사가 될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발길을 재촉했다.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언니는 경북 고령에서 9남매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엄마가 언니의 태몽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큰 기대 속에 언니가 태어나 실망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했다고, 하늘에서 검은 말이 날아와서 엄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태몽 꿈이라, 장차 큰 아들이 태어 날 것이라고 믿었는데, 분명 저 애는 사주팔자가 드세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고 큰 걱정을 했다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작은 산 밑에 전의이씨 집성촌이 200여 가구가 사는 큰 부촌으로서, 조상대대로 양반 행세깨나 하면서 살아온 집안이었다. 조부모님 모시고 두 분 삼촌네 가족들과 20여명의 대가족이 한 집에서 살았다. 위로 오빠랑 언니 셋은 일본사람이 세운 학교에 다녔다. 이름도 일본이름으로 개명해서 집에 오면 원래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 당시에는 여자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몇 집 안 되었고, 유일하게 언니 셋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할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당시에도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늘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편견 때문에 할머니의 고집을 엄마가 다 감당했었으리라.

언니 셋 중에 순호 언니만이 머리가 뛰어나서 일본선생님 한 테도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다. 훗날 옛일을 회고하면서 그냥 촌 무지랭이로 살았더라면 평생 인고의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을......!

오빠랑 큰언니는 졸업하자마자 연이어 출가를 했고, 순호언니는 중학교까지 다니고 이듬해 사범학교에 진학 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차에 뜬금없이 아버지가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조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층층시하에 삼. 사촌 20여명이 한집에 살면서 늘 문제가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처리하다보니 홀가분하게 우리 가족끼리 만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게 다.

그래서 논밭이며 소도 팔아 철원으로 이사를 갔다. 이 바람에 순호언니의 교사가 되는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이때부터 순호언니의 불행한 그림자가 서서히 닥아 올 줄이야 ......!

여덟 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철원으로 이사 가면서 긴 여정의 길이 시작되었다. 칠곡지천으로 시집간 큰 언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 새벽 대구역으로 걸어서 찾아왔지만, 기차 시각이 변경되어 한 시간 전에 우리는 떠나고 없었다. 정거장 마당에서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를 훗날에 예기해 주었다. 어머니 또한 맏딸을 보지 못하고 떠나오는 바람에 서울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우리 가족은 다음날 철원 가는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철원까지 기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갔다. 철판으로 된 구멍 뚫린 다리를 건널 때 무서웠다. 나는 아버지 등 보따리 위에 얹혀 아버지 목을 꼭 잡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 때 6살짜리 막내오빠가 무섭다고 울면서 뒤돌아보다가 발을 헛디뎌 기우뚱 할 때 마침 뒤따라오던 큰 오빠가 붙들어 그렇지 하마터면 강물에 수장될 번 한 사실도 있었다. 나는 강을 겨우 건너 피난민처럼 들길을 한없이 걷다보니 발이 아파 그냥 길가에 주저앉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 때 따라오던 순호언니가 나를 업고 갔으며, 집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지쳐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 후 어머니는 약한 몸에 동생을 업고 다녀서 몇 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청천벽력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북이 살기 좋다고 소개했던 사람이 바로 사기꾼이란 사실을 알고는 우리 가족은 까무러치게 놀란 뒤였다. 알고 보니 그 때 이북에서는 허위선전을 해서 살기 좋다고 이남 사람들을 월북하도록 유인했던 작전에 아버지가 걸려든 것이었다. 이북에 오면 집이나 땅을 무상으로 지원해준다고 거짓 선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일제 강점기 그 시절에는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세금이니, 공출이니 하면서 다 빼앗아 가니까 이북에서는 그렇지 않고 잘 살수 있다는 허위선전에 속아 아버지가 큰 실수를 했지만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요, 이미 쏜 화살이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길이 더욱더 막막할 뿐이었다. 당시 농사를 지으려면 농기구나 소를 이웃에게 빌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그 때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이곳에 농사를 짓고 살려면 언니의 시아버지 될 분이 그 마을에서 유지였던 관계로 사돈으로 맺어지면 잘되니까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집요하게 그 동네에서 사돈을 맺지 않으면, 우리 집을 왕따 시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 허락을 했지만, 이번에는 엄마가 극구 반대하며 몸져눕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인천에 살고 있는 큰오빠가 달려와 당시 열일곱 살 된 언니를 열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신랑에게 어떻게 보낼 수 있느냐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 있던 순호언니는 참다못해 그 집으로 시집갈 결심을 하고 오빠와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차라리 내 한 몸 희생하면 어린 동생들이 좀 더 편하게 살지 않을까? 자청을 하고 나섰다. 엄마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언니의 결심을 꺾지 못했고, 그렇게 언니는 우리가족의 희생양이 되어 그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2, 시집살이

언니는 시집간 그 날부터 혹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물론 그 장본인은 시어머니였다. 당시 언니나이는 열일곱, 형부는 열다섯, 신랑은 비록 어리지만 언니에게 잘해 주었다. 시아버지 또한 며느리를 끔찍이 아끼고 점잖은 분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어머니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언니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한 마을에서 살았을 때 시어머니 얼굴은 반반했으나 성격이 표독스럽고 악랄했던 것으로 소문난 사람이라서 시아버지가 데리고 미리 이북으로 이사 와서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학식도 있고 워낙 호인이어서 마을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소문이 나있는 분이셨다. 시아버지와 신랑은 마을 일에 바빠 며느리가 시집살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밖으로만 돌아 다녔다. 시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언니에 대하는 태도가 더 심해갔고, 심지어는 밥 먹을 때도 부엌에서 혼자 먹도록 강요를 했다. 잔소리와 학대가 점점 늘어만 갔고, 언니는 혼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만 훔치는 나날이 지속 되었다. 부엌에서 밥을 해놓으면 시어머니가 나와서 밥을 푸고, 며느리 밥은 양식 아낀다며 누룽지나 긁어 먹으라고 했다. 혼자 부엌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면 계속 심부름을 시키고, 밥 한술 뜨면 하루 종일 밥만 먹는다면서 바가지에 물을 떠서 끼얹고, 밥그릇을 빼앗았다고 했다.

우리 언니는 옛날 일을 회고하면서 욕설과 고된 일은 참을 수 있어도, 배고픔만은 참아낼 수 없더라고 했다. 옛날 어른들 말에 의하면 귀머거리3년, 벙어리 3년, 눈감고 3년을 참고 살아가면 시집살이가 끝난다고 해서 그 때는 그 말뜻을 허투루 들었는데, 종일 고된 일을 참고 불평한마디 없이 그렇게 살았다. 그러한 나날이 계속되다보니 몸이 점점 야위어만 갔다. 멀리 출타했다가 돌아오신 시아버지가 언니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어디 아프냐고 물어 보시며 약이라도 한제 지어 먹이라고 시어머니께 말해 놓으면 들은 척도 안하고, 하루 종일 밥만 축내는데 무슨 약이냐고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순호언니는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려 친정이 한 동네인데도 친정한번 가지 못했다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훗날 순호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시어머니 등살에 하루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어서 늘 허기진 배를 곯았던 생각과 날아다니는 벌레라도 잡아먹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에 언니가 구박을 받고 산다는 것에 엄마 귀에 들어가면 엄마는 또 아버지를 원망하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꼬?

3, 다시 고향으로 탈출

이북에서 삶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험했다.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현지 상황에 아버지는 이곳을 떠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사돈에게 고향에 조부모님을 모신다는 핑계로 돌아갈 것을 얘기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는 이북으로 오는 것은 문제를 삼지 않는데 이남으로 가는 건 이미 통제가 심했고 언제부터인가 38선 주변에 인민군이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언니 시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무사히 넘어 올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 때 이북에서는 전쟁준비를 했던 때였다. 매일같이 젊은 청년들을 군청마당에 모이게 하고 이념교육은 물론 날밤을 세워가며 훈련까지 시키고 있었다. 형부도 일주일씩 나갔다가 오곤 했었다. 그 때 아버지의 직감으로는 몇 년 후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웃사람이 눈치 채지 않도록 차근차근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초소마다 언니 시아버지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놓고, 배도 한 척 구입을 했다. 마지막 관문은 임진강을 건너는 것이고, 38선을 넘을 때는 사돈의 힘은 작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농사짓던 도구와 살림살이들을 그대로 다 두고 몸만 빠져 나왔다. 나루터까지 사돈, 형부, 언니 셋이 배웅을 나왔다. 일 년 전만 해도 희망의 꿈을 품고 여덟 식구가 왔는데 이제는 초라한 모습으로 일곱 식구가 이웃도 모르게 야반도주 하다시피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가엾은 순호언니만 남겨두고 가야하니 부모님 마음인들 오죽 하였겠는가. 아버지는 골백번 사돈에게 며느리 잘 보살펴 주고, 사위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순간적인 잘못된 판단으로 온 가족이 고생을 하게 되고, 순호언니가 교사의 꿈은커녕 지옥 같은 시집에 두고 떠나려고 하니 마음이 아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 또한 울며불며 나 하나만 고생하드라도 우리 가족이 국경을 넘어 잘 귀향하기를 두 손 모아 빌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은, 엄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배위에 올랐다. 사르르 사르르 뱃사공의 노젓는 소리만 간간히 들으면서 모두 숨소리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쥐 죽은 듯이 뱃전에 엎드렸다. 강은 깊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초소에 들키는 날에는 모두가 죽는 목숨이다. 한밤중이라 인민군이 잠든 사이에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초소에 불이 번쩍하고 비칠 때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모두 불안해서 마냥 뱃전에 숨죽이고 있었다. 엄마는 신령님께 무사히 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빌었고, 초조한 불안 속에 아버지는 나를 꼭 껴안고 조금만 참으라고 일러 주었다. 결국 강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무사히 도착했다.

이제 남은 일은 임진강 다리만 넘으면 되니까 조용히 따라오면서 고개 숙여 초소 앞을 지나는 데 갑자기 초소 문이 열리면서 인민군이 총을 들고 나와 모두 손을 들라하고는 아버지 가슴에다 총을 들이댔다. 우리 가족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이번에도 아버지는 침착한 목소리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살길이 막막해 저 건너 친척집에 살러 간다고 말했다. 인민군은 우리가족을 훑어보더니 모두 아이들이고 가족 같아서 그냥 가라고 놓아 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마을로 가는척하고는 임진강 부근에 몸을 숨기고 준비해온 주먹밥을 먹었다. 그리고 밤이 되도록 기다리다가 한 밤중이 되어서야 우리일행은 움직였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다리를 건널 때 또 한 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특히 작은 오빠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형 앞에 한발 한발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다. 엄마는 신령님께 무사안일을 비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선두로 해서 뿅뿅 철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으로 시커먼 강물이 일렁이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이남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이제야 우리는 살았다고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도 눈물을 훔치면서 용하게도 잘 따라주어 살았다고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떠날 때와는 다르게 마치 전쟁 후 패잔병처럼 엄마와 아버지는 힘이 빠져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맏이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라고 하셨지만 순호언니를 두고 온 것을 계속 원망만 하셨다.

4, 시집 떠날 준비를 하다.

순호언니는 배고픔도 시어머니의 구박도 참아낼 수 있었던 건 우리 가족이 한 동네에 살았기에 이겨낼 수 있었지만, 친정마저 떠나고 없으니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떠난 후 밤마다 베개가 젖도록 울다 밤을 새우고, 시어머니의 패악은 날로 더 심해갔다. 시아버지와 형부가 언니를 두둔하면 갖은 욕설과 심지어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소리 지르며 때리기도 서슴치 않았다. 이제는 우리 집도 떠나갔기에 노골적으로 핍박을 일삼았다.

아버지가 떠나오실 때 언니를 불러 앉혀 놓고, "이제 넌 이집식구니까 살고 죽어도 이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양반가문에 여자는 한번 출가하면 아내와 며느리로서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친정에 욕되는 일은 절대로 해선 안 되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고……!

순호언니는 아무리 참아도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현실 앞에 점점 무기력해저만 가,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날로 더해만 가는 시어머니의 행패와 구박에 감당해 낼 자신이 없어졌다.

몇 번이나 죽으려고 강가로 뛰어갔다가 남의 눈이 있어 돌아오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어 보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은 마치 말라비틀어진 오이 속처럼 말라가, 눈은 휑하고 마음은 허공을 맴돌았다.

어느 날 언니는 이 집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탈출하기로 마음을 궂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이북에 있는 지도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생활방식을 바꾸었다. 마침 시누이는 시어머니와 달라서 심성이 곱고 착했다. 그리고 거센 어머니한테 기죽어서 잘해주는 언니 옆에만 따라 다녔다. 남몰래 누룽지도 갖다 주곤 했다. 언니는 시누이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글도 가르쳐 주고 수예도 가르쳐줄테니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당시 이북에서는 아예 여자들은 글을 배우지 않아 모두가 까막눈이었다.

저녁 먹고 나면 시누이 친구들이 대여섯 명씩 집으로 찾아오면 간간이 책도 읽어주고 글도 가르쳤다. 수예도 가르치니까 은근히 좋아서 날마다 찾아왔다. 올 때마다 그들이 간식이랑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그 때부터 언니는 배고픔을 해결하였고, 신랑이 밤늦게 오는 바람에 시어머니의 심술도 사그라졌다. 오직 이남으로 가는 목표만 있어 매사에 힘이 들어도 마음은 즐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때가오면 떠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은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이 숨겨 두었다. 처음부터 신랑 옷이랑 속옷 같은 것은 언제나 시어머니가 챙기고, 옷 갈아입는 것조차 시어머니 방에서 입기 때문에 언니 장롱에는 언니 것만 들어있어 열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가는 목표가 있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고 신랑한테는 잘 대해 주었다. 이 사람도 알고 보면 가엾은 사람이나, 어머니를 설득하기엔 아직은 역부족이고 색시한테도 기가 죽어 있어 때로는 밀어 내다가도 가엾어서 마음을 열고 받아주는 척 했다. 당시 이북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던 때라, 남편은 매일 밤마다 군청에 불려갔었고, 밤늦게 돌아왔다. 때로는 멀리 가서 일주일씩 훈련 받고 돌아오곤 했었다.

5, 부산으로 이사 가다.

우리 아버지는 이북 가서 결국 전 재산을 날리고 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어 가장으로 면목이 없고, 엄마는 늘 할머니 눈치 속에서 한숨을 쉬어야 했을 때였다. 우리 엄마는 몸이 허약해서 늘 자리에 눕고 순호언니를 지옥 같은 집에 팔아먹고 온 것이 마음이 아파 한 시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번에 또 부산으로 이사 갈 것을 계획하고 아무도 몰래 혼자 부산으로 내려갔다. 먼 친척이 부산에 살고 있어 취직이라도 해서 자리를 잡으면 가족을 데리러 온다고 하면서, 엄마에게만 일러 놓고 떠나셨다. 부두의 협동조합에서 사람을 채용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찾아갔다가 이력서를 내고 나오는데 조합장이 다시 불러서 들어갔더니, 아버지 필적을 보고 사무직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본에 가서 몇 년 있다가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돌아왔기 때문에 경력이 있었던 관계로 취직이 빨리되어 산꼭대기에 셋방을 하나 얻어 놓고 우리들을 데리러 오셨다. 이번에는 오빠 둘만 할머니한테 맡겨두고 작은 언니, 나, 동생이랑 다섯 식구가 셋방에 들어 살게 되었다. 작은 언니는 방직 공장에 취직을 했다. 아직 열다섯 공부할 나인데 집안 형편상 어쩔 수가 없었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마음이 아파서 언니만 보면 미안해 하셨다.

이듬해 겨울에 마을에 홍역이 돌았다. 막내 동생도 홍역에 걸려 열이 펄펄 났다. 그리고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해 동생친구들 열세명이 모두 하나같이 죽었다. 엄마는 셋방에서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그 때 나는 동생죽음을 전연 몰랐기 때문에 하얀 홑이불을 덮어 놓고 밤이 되면 산에다 묻을 요량인데 난 숨 막힌다고 자꾸 이불을 끄집어 내리니까 아버지가 날 끌어안고 "이제 강호는 숨 막히지 않고 먼 하늘나라로 가는 중"이라면서 이불을 벗기지 말도록 끌어안는 것이었다. 언니는 공장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의 얼굴이 퉁퉁 부운 것을 알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숨죽이며 우는 것이었다. 막내인 나는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 하루 종일 밥을 주지 않아서 엄마보고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졸라댔으니, 어처구니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 계시는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을 이북까지 데려가 고생시켜 놓고 이제 제 손으로 밥 떠먹을 수 있도록 키워 놓고, 살만하니 죽게 만들었냐고" 얼마동안 고향집에 오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려서 일 년 동안 고향엘 못 갔었다.

6, 시집에서 탈출

이듬해 6월 달이었다. 순호언니는 지난겨울부터 차곡차곡 계획하고 이북 전체 마을의 위치를 파악하고, 군청소재지와 관청을 지도를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있었다. 워낙 머리가 뛰어 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어 갔다. 때 마침 신랑이 이번에는 아주 먼 곳에 훈련 간다고 일주일이 되어야 집에 온다는 것이었다. 한 달은 도망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밖에서 자는 일도 있을 테고, 운이 좋으면 남의 집 아래채에서 잘 수도 있을 터이고,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 초저녁에 시누이 친구들이 와서 늦도록 수를 놓고 글공부도 하고 돌아갔다.

기회는 오늘밤이 제일 좋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 밤중에 미리 싸놓았던 보따리를 들고 버선발로 마당을 내려섰다. 안방에서는 시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시어머니, 시누이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싸리문은 시누이 친구들 보내면서 살짝 닫아 두어서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밀고 나왔다. 이남으로 갈려면 한탄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제일 먼저 강 쪽으로 찾으러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순호언니는 일부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철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지도를 보고 어디서 어디까지 가면 마을이 나타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곳에 숨어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 도망을 갔으며, 한곳에서 한 달가량 숨었다가 그 때 갈려고 계획까지 세웠다. 한 번도 가보지도 듣지도 못할 산골마을을 지도 한 장 들고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등에 업고 열아홉 어린 새댁이 시집을 뛰쳐나와 도망을 가는 것이다. 달빛마저도 어린 색시가 가여운지 말없이 가는 길을 따라와 주었다.

멀리서 개짓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며 깊은 밤중이라 인적은 끊어지고 언니혼자 계속 철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갔다. 인근 마을에 도착했을 땐 희뿌옇게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온 길이 30리 나 되는 것 같아 우선 안심이 되었다. 지금쯤은 며느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사람을 풀어서 강 쪽으로 찾아다닐 것이리라.

동네 한복판에 우물터가 보였다. 얼른 다가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올렸다. 밤새도록 30리 길을 달려 왔으니 목이 말라 목을 축이고 땀에 젖은 얼굴도 씻었다. 발이 아파 버선을 벗으니까 언제 돌부리에 채였는지 발가락 사이에 피멍이 맺혀 있었다. 여기저기 물집도 생기고 발을 씻고 돌아서 다시 버선을 신었다. 우물가에 앉아서 물 길러 나온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때마침 나이어린 새색시가 물동이를 이고 나와서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있으니까 옆 눈으로 보기에, 언니는 절뚝거리며 새댁 앞으로 다가갔다. 친정집 가는 길인데 발이 부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으니 오늘 하루 쉬어갈수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새댁은 언니 얼굴을 보고 발을 바라보더니 속으로 딱해 보였던지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며느리 뒤에 낯선 새댁이 발을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 되는 분이 "웬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언니는 인사를 하면서 친정어머니가 편찮아서 가는 길인데 발이 부어 걸을 수가 없어 염치불구하고 새댁한테 부탁했다고 하니까 우선 방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친정동네까지 가는데 20여리나 남아서 좀 쉬었다 갈려고 하는데 사정 좀 봐 달라고 하니까 새댁 사정이 그러하면 발 나을 때까지 있으라고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다. 그리고 신랑은 왜 같이 가지 않느냐고 묻기에 지난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사정이 그러하면 잠은 나하고 자면 된다면서 우리 새 애기하고 형제같이 지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착하신 시어머니도 있구나!' 하고 모든 일이 잘 될 것 만 같았다. 일단 며칠 지낼 곳은 해결되어서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이집 새댁 남편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하니까 시어머니가 먼 친척뻘 되는 새댁인데 친정 가는 길에 발이 부어서 며칠 쉬었다 가니까 군청에 보고는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북에서는 낮선 사람이 들어오면 군청에 신고를 하도록 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언니는 그 집에서 새댁 일을 거들어 주고 밭일도 도와주어 친하게 지냈다. 그 새댁도 언니를 동생같이 대해주며 무척 잘해 주었다. 일주일 쯤 되서 발이 다 아물어 하직인사를 하고 보따리 속에서 옷감 두 벌을 내어 고맙다는 표시로 드렸다. 처음에는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정으로 받아 달라고 했다. 언니가 시집올 때 혼숫감을 미리 장만해 두었던 것이라 이곳에선 만지기 어려운 고급비단이었다.

언니는 그 집을 나와 지도에 표시된 데로 또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종일 걸어 해질 무렵에야 굴뚝에 연기가 나는 마을에 도착했다. 시댁을 도망 나와 오면서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훔치고 있는데 중년쯤 보이는 아주머니가 광주리를 옆에 끼고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얼른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드렸더니, 언니를 빤히 쳐다보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실 먼 길을 걷다보니 발을 다쳐 하룻밤 신세를 지자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며 사정을 했다. 그랬더니 따라오라면서 자기 집으로 갔다. 그 마을에서는 제법 좋은 집으로 방이 여러 개 있는 큰 집이었다. 아이들이 다 커서 건넛방에 있고 이 방은 자기혼자 기거하고 있으니까 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는 것이다. 겉보기에도 인심이 후덕해 보이는 분이라 저녁까지 얻어먹고 이런저런 예기를 물어보는 게 아닌가. 전번 때와 똑 같은 답을 했고, 30여리 길을 걸어온 터라 몹시 피곤해 일찍 잠이 들었다. 언니는 자신도 모르게 피곤했던지 앓는 소리를 내었든지 밤중에 흔들어 깨웠다.

"새댁 일어나서 꿀물 좀 마셔봐"하면서 따뜻한 꿀물그릇을 손에 쥐어 주었다. 생면부지 낯선 사람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니 눈물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렇게 죽도록 일하면서 밤새도록 앓는 소리를 내어도 모른 척 외면하던 시집이 아니었던가.

고추보다 맵다든 시집살이에 처음에는 아프고 서럽기도 했었으나 이제까진 잘 견뎌주었는데 ,이젠 긴장이 풀렸는지 온 전신이 아프기 시작해 앓는 소리를 냈으나, 옆에 자던 아주머니께서 그렇게 잘해주니까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새댁 울지 말아요! 몸이 아프니까 더욱 서럽지요. 객지에 나와서는 몸이 아프면 큰일이지요."하면서 며칠 쉬었다가 천천히 가라고 했다.

뜬금없이 고향집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는 평생을 새벽이면 정화수 떠놓고 신령님께 가족의 안녕을 빌고 계셨었지. 지금도 할머니의 기도로 이런 좋으신 분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언니는 꼬박 3일을 몸져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계속 아주머니께서는 병간호를 해 주셨다. 언니가 시집간 딸 같아 마음이 아프다며 위로해 주었다.

그 집에서 4일째부터는 아주머니를 따라 채소밭에도 가고 부엌일도 도울 수 있었다.

한편, 시댁에서는 아침에 언니가 보이지 않아 농문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온통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시아버지는 제일 먼저 강 쪽으로 사람을 보내고 십리 안 밖으로 각 지소마다 연락망을 취해 놓았다. 뱃사공에게 물으니까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간 사람이 없다고 하자 밤낮으로 사람을 시켜서 지키게 하고 혹시나 물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둑을 헤졌기도 했다고 훗날 예기를 들었다고 했다. 형부도 이틀 후에 훈련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언니가 없어진걸 알고 미치도록 찾아 다녔으며 마음 둘 곳을 잡지 못해 허공을 헤매는 색시가 안타까워서 애를 태웠는데 결국 이런 사달이 일고 나서야 시아버지도 일직 집안일을 소홀히 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보름동안 밤낮으로 강둑을 지켜보았으나 언니가 나타나지 않아서 포기하고 철수했던 모양이다.

7. 사선을 넘다.

두 번째 집에서도 기거한지 열흘이 넘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쁜 관계로 그 집에 따라다니면서 일을 도와주었더니 주인아주머니는 좋아하시고 어차피 친정살이 할 거면 여기서 좀 더 머물러 있길 원하면서 딸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에 낯선 남자가 매일같이 드나들곤 했다. 때로는 언니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해 이상해서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시동생으로 군청에서 최고 높은 간부인데 작년에 상처하고부터 집안일거리를 나한테 부탁하러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럭저럭 이집에 머문 지 보름이 넘었다. 그러면서도 이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사가 까다로워 통행증 없인 38선을 넘어갈 수 없게 됐다. 잘 안되면 안내원을 사서 다른 통로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내원을 사야하는 데는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고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돈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께서 할 예기가 있다면서 새댁이 그 동안 보니까 마음도 어질고 손끝도 아무지고 하니까 시동생과 재혼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신랑도 없고 시집도 나왔으니 이제 친정에 간다한들 출가외인 인지라 크게 환대해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시동생도 새댁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까 여기서 눌러 있으면 안 되느냐고 다그쳤다. 시동생이 어질고 착해서 내가 권하는 것이라며 아주머니는 적극적이었다. 사는 것도 잘 살고 고생은 안 시킬 것이라고 했다.

원래 당시는 낯선 사람이 오면 보위부에 신고부터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새댁이 마음에 들어서 친정 질녀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고, 시동생도 처음엔 그런 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언니는 이제부터는 더 망설일 것 없이 이곳을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안내원을 만나 이야기 해보니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첫마디에 거절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젊은 새댁인데 험한 산길을 걷는 게 쉽지 않고 끝까지 못 버티어 낼 것이라고 했다.

순호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사정을 했다. 때마침 젊은 부부가 합류하기로 하고 남자 한사람과 네 명이 한 팀이 되었다. 언니는 아주머니께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친정엄마를 꼭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많이 편찮으셔서 돈을 장만해야 하니까 언니 옷을 좀 팔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주머니는 그길로 언니의 옷감을 들고 이웃에 가서 팔아가지고 왔다. 모두 비싼 비단이라서 모두가 좋아들 하며 금새 다 팔았다고 했다. 언니는 아주머니께 그 댓가로 비단 한 벌을 주었다. 아주머니는 굳이 사양하였으나 서로간의 정 표시로 드린다고 하고 억지로 드렸다. 그리고 시동생에게는 친정에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말해두었다.

보따리와 짐을 간편하게 정리하고 치마를 뜯어서 몸빼이를 두 벌 만들고 버선과 며칠 동안 먹을 미숫가루를 준비하는 등 현금만 가지고 그믐밤을 기다려 행동하기로 했다.

안내원은 몇 번이나 참을 수가 있겠느냐고 다짐을 받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하겠다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드디어 안내자를 선두로 해서 다섯 명이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튀어 나올 것 같은 깊은 산중을 안내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기도 했다. 같이 간 새댁은 남편이 손을 잡아주어 덜 넘어졌다. 언니는 혼자니까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구르기도 했다. 같이 탈출한 일행은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이 들어 누구를 잡아줄 여력도 없었다. 날이 새면 동굴에 들어가서 숨어 있었고, 가지고간 주먹밥을 꺼내어 먹기도 했다. 어린 색시가 험한 산길을 걷는 게 힘든 다고 처음부터 끼워주지 않으려는 것을 간신히 허락을 받았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당차게 몸을 놀렸다.

산 넘어 산이란 말이 이를 때를 두고 한 말인가. 넘어도 넘어도 또 산이 있어 몹시 힘들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젊은 부부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포기를 하고 돌아갔다. 이제 세 사람 뿐이었다. 입고 간 몸빼이는 찢어지고, 열 발가락은 돌멩이에 치이고,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오직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를 만난다는 기대에 부풀어 산을 넘고 또 넘었다. 안내원은 언니가 너무 애처러웠던지 좀 쉬었다 가자고 하면서 나무에 기대고 앉았다. 그 와중에도 잠이 오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잔 관계로 머리로는 자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갑자기 엄마가 나타나 소리를 질렀다.

"순호야 일어나, 자면 안 돼, 위험해!"하면서 소리치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파란 눈을 가진 산짐승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옆에 안내원을 흔들어 깨웠다. 안내원도 소리를 치며 산짐승을 피해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한없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신이 옆구리에 나뭇가지가 걸려 목숨만은 건졌다. 칠흑 같은 어둠에 앞 뒤 분간이 되지를 않았다. 너무도 무섭고 암담했다. 혹시 같이 간 사람들도 다치지는 않았을까? 불길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도 이 깊은 산속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주머니 말대로 그 집에서 눌러 살걸......!

갑자기 고향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가만히 입속으로 '엄마? 어쩌면 엄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부디 엄마, 아버지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엄마 가슴에 대못만 박고 가는 이 딸을 하루 빨리 잊으시고 동생들과 잘 사세요.'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한참 울고 있는데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순호씨, 어디 계세요? 살아있으면 대답 좀 하세요?"하는 것이었다. 안내원의 목소리였다.

"나 여기 있어요! 살아 있다구요!" 계속 더듬어 갔다. 보아하니 두 남자가 산꼭대기에서 주르륵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반가움에 세 사람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행이 두 사람은 도망가다 보니까 언니가 보이지 않아 뒤돌아 다시 왔던 길로 오다가 혹시나 하고 불러보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안내원이 "순호씨! 참 대단하십니다. 잘 따라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드시 고향 찾아 가시길 바랍니다."하면서 이제 저기 임진강만 건너면 되는데 초소가 있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합니다. 좀 있으면 날이 세니까,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 행동하자고 했고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히 넓지는 않아도 세 사람이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한 밤중이 되었다. 안내원은 다시 한 번 주의를 시켰다. 다리를 건너갈 때 소리 내지 말아야 되고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나도 곧장 앞으로 가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맨 앞에서 걸어갔다. 언니는 두 번째로, 다른 남자는 맨 뒤쪽에서 세 사람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지금쯤은 인민군이 잘 수도 있으니까 인기척도 내지 말고 다리가 흔들려도 안 되니까 천천히 가볍게 발을 떼놓으라고 낮은 소리로 계속 주의를 주었다. 만약 들키는 날에는 저 사람들은 총을 쏜다고 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갔다. 계속 숨 막히는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치솟아 오르는 느낌을 느끼며 숨죽여 걸어갔다. 삶과 죽음의 사투를 벌리면서 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걷는데, 철다리는 발을 땔 때마다 출렁 거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불과 2년 전에 이 다리를 건널 때는 온 가족이 커다란 희망을 품고 살길을 찾아서 건너 왔는데, 지금은 또 살길을 찾아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다리 아래는 검푸른 강물이 우리가 떨어지면 집어삼킬 것만 같았고, 우리일행은 공포에 떨며 한발 한발 내 딛고 있었다.

다리 중간 쯤 건너갔을 때였다. 갑자기 초소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인민군이 쫓아 나와 호루라기를 홱홱 불면서 "거기 서지 않으면 쏜다."라고 소리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서 빠르게 걸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디면 다리 밑으로 떨어질 가 봐 뛰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하면서 사색이 되어 앞만 보고 걷는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탕탕탕" 세 번이나 쏘아댔다. 안내원은 앞만 보고 걸으라고 소리쳤다. 그 때였다. 내 뒤를 따라오던 남자가 갑자기 "윽"하면서 앞으로 엎어졌다. 언니는 총을 맞고 엎어져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일어나세요." 빨리 제 손을 잡고 일으키려 하는데 앞에 가던 안내원이 소리를 지르며,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안내원은 그냥 오지 않으면 우리들까지 다 죽는다면서 손짓하는데, 쓰러진 남자는 꼭 살아서 고향에 가라고 소리 질렀다. 5일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를 차마두고 갈수가 없어 언니는 울면서 계속 일으키려고 했다. "탕탕탕" 두 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언니는 오금이 저려 그만 앞으로 꼬꾸라졌다. 앞에 가던 안내원이 돌아서 언니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데, 두 번째 총알이 안내원의 가슴에 맞았다. 안내원은 "순호씨 빨리 뛰어요"하고는 넘어졌다. 언니는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기적 같은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죽을힘을 다하여 펄쩍 뛰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젠 총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심연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목덜미가 서늘해와 눈을 번쩍 떴다. 유월이지만 아직도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여명의 새벽이 뿌옇게 밝아 오는 게 망막에 비쳤다. 이제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온갖 시련과 고통을 감내해 왔던 게 아닌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에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신랑에 대한 애잔한 마음도 모두 잊을 수가 있었으리라!

이제 목숨을 담보로 사선을 넘어 뛰쳐나왔던 시집과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8, 업보 : (이야기를 접으며)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순호언니는 친정인 부산으로 귀향하였고, 2년 후 6.25사변이 일어나, 1.4 후퇴 때 이북에 살던 시댁도 대구로 피란을 내려오게 되었다. 언니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차례나 데리러 와서 결국 다시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집살이는 변함이 없었으며, 시어머니의 성정 또한 다를 바가 없었으나, 언니는 내 운명이라 여기면서 한평생 시부모를 모시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못살게 굴던 시어머니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엔 "어미야, 미안하다. 참 못할 노릇 많이 했지? 날 용서 해다오!"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훗날 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밉던 것을 용서하고 닫혔던 마음속 빗장을 풀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고......!

자식들도 고생한 덕택으로 잘 살고, 남편도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잘해주어 참고 살아온 것이 큰 보람으로 여겨졌으며, 이 모든 것들이 내 전생의 업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순호언니의 일생이 지금은 저 세상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은 감회에 젖어, 일흔 중반인 나에게도 살아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다. 그 당시는 삶이 힘들고 팍팍한 세상이 누구에게나 다 있었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순호언니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뒷받침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결국 그 시대에 살아온 여인들의 고된 삶이 언니만이 겪은 아픔만이 아니라는 것을 회상하면서 이 이야기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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