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얘기가 있으니 만납시다."
1998년 3월 이종찬 안기부장은 취임 직후 전임 권영해 부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당시 권 전 부장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의 북한 연루설을 퍼트린 이른바, 북풍(北風)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권 전 부장은 이 부장에게 북풍 공작 서류를 내놓고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면 이 서류가 공개된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회고록에서 권 전 부장이 협상하자는 것인지, 협박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지만, 바보 같은 짓과 결연하려면 아픔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전직 정보기관 수장이 재직 중에 취득한 기밀(?) 서류를 들고 후임 수장에게 구명 요청인지, 협박 공갈인지 모를 행동을 했다는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권 전 부장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풍'총풍(銃風)'세풍(稅風) 등 '3풍 사건'에 관여해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최악의 안기부장이다. 권영해 이후 11년 만에 또다시 최악의 수장이 등장해 국정원의 위상을 처참할 정도로 망가뜨린다. 이명박 대통령 때의 원세훈 국정원장이다.
원장의 지시에 따라 '특수 공작'이라는 이름하에 민망하고 황당한 짓거리가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댓글 부대를 동원한 여론 조작은 기본이고, 관제 데모 지원, 연예인 블랙리스트 작성과 함께 문성근'김여진의 정사 사진까지 합성해 유포하니 어이가 없다. 민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중대 범죄다. 거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취소 모의까지 했다니 저질 중의 저질이다.
권영해 안기부장(1994년 12월~1998년 3월 재직'3년 3개월), 원세훈 국정원장(2009년 2월~2013년 3월'4년 1개월)은 정권 안보와 국가 안보를 동일시해 정보기관을 사유화했고, 개인 비리까지 저지른 공통점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제4대 김형욱 안기부장(6년 3개월)에 이은 최장수 원장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서 그만큼 신임을 받았으며,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악역'을 자처했을 확률이 높다. 국가정보원의 구조와 조직을 볼 때, 충성파 수장이 취임하면 '정권의 전위부대'로 전락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정부가 국정원 개혁을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해야 할 이유다. 대공, 수사, 정보, 대북 등 여러 파트를 나열해서는 전문성이 확보될 수 없다. 국내 파트는 눈 딱 감고 모두 없애거나 이관하는 것이 국가 미래를 위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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