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일의 태양을<4>…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김영곤

21, 청 독사

마대 포 공격도 끝났고 당분간 좀 조용하다.

놈들의 기세도 한풀 꺾였나 보다. 이때를 틈타 째째산과 한성산 일대에 중대 탐색작전을 나가기로 했다. 째째산은 그리 높거나 깊은 산은 아니지만 실로 무서운 곳이다. 누에고지에서 보면 중대OP와 나란히 서있는 이 산은 놈들의 병력이 이동하는 주 통로다.

송콘강 건너 장백산에는 월맹정규군 18연대본부가 있고, 후장산 넘어 화니 계곡에는 놈들의 신병훈련소가, 수력발전소가 있는 녹도산에는 18연대 8대대가 주둔한다. 그리고 소도산, 똥태산 일대에는 18연대 9대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놈들은 똥포 마을을 거점 삼아 이곳 째째산과 유방고지의 정글을 통해 똥포 삼거리와 19번 도로를 지나 20고지의 광활한 평원과 연결된 소도산과 똥태산으로 드나드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시로 미 공군기가 폭격을 하고, 61포대에서도 위협포격을 집어넣는다. 그래도 놈들은 계속 이곳을 통하여 보급품을 수송하고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다. 우리들도 자주 명령을 받고 매복을 나간다. 그러나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모두 째째산 작전은 께름칙하게 생각한다. 째째산 정글에 들어가면 무엇보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또 어두컴컴한 정글 속에서 언제 적이 튀어나올지, 부비트랩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런 째째산을 소대별로 분산하여 하단부에서 위로 올라가며 수색을 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햇살은 뜨겁게 내리꽂힌다. 열대의 숲이 내뿜는 눅눅한 열기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한다. 정글에 들어서자 습기를 머금은 뜨뜻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풍겨오는지 시체 썩는 냄새에 속이 다 메스꺼울 정도다. 첨병이 정글도로 넝쿨과 가지들을 쳐서 길을 만든다. 그 뒤로 소대원들이 따라가며 수색을 한다. 황소 같은 최 봉석 병장도 땀에 절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주경계도 포기하고 앞 전우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따라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 속으로 흘러드는 땀을 닦았다.

그런데 앞에 가는 차 경철 병장의 배낭에 뭔가 매달려 꾸물꾸물 한다.

눈을 닦고 다시 보니 뱀이다. 약 1.5m 됨직한 놈이 배낭을 물고 늘어져 꿈틀거리고 있다. 얼른 가까이 가서 총구로 내리쳤다. 등판은 진한 녹색이고 배때기는 연두색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놈이 나를 향해 입을 벌리며 공격 자세를 취한다. 입안이 하얗다. 바로 청 독사다.

우리는 흔히 살모사나 독사를 이야기 하지만, 열대 정글의 청 독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맹독의 청 독사에게 물리면 2,30분 내에 사망한다. 몸값을 쳐도 백사, 흑사에 비해 한 몫 더 쳐준다. 차 병장의 배낭을 물고 늘어진 놈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가 움직이는 물체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물었던 게 틀림없다.

땅에 떨어진 청 독사는 상체를 반쯤 세우고 혀를 날름거리고 소리도 내지르며, 독을 내뿜으며 공격을 한다. 앞서가던 차 병장이 돌아서서

"김 병장, 피해!" 라고 소리 지른다.

피할 곳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결국 이놈과 한판 붙어 이겨야 한다. 뒤따라오던 소대원들도 사색이 되어있다.

베트콩 앞에서는 무적의 사나이들이지만 청 독사 앞에서는 모두 쩔쩔 맨다. 소대장도 피하라고 소리친다. 그렇다고 천하의 땡삐가 이딴 뱀 한 마리에 겁먹을 리가 있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을 때, 누가 뱀 알과 뱀을 고아 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해서 뱀을 찾아 산야를 누비고 다녔던 땡삐다.

뒤로 물러섰다가 다가서기를 몇 차례. 기회를 엿보다 빳빳이 치켜든 대가리를 총구로 내리쳤다. 픽 꺾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정글화로 대가리를 밟아 기선을 제압했다. 그와 동시에 멱통을 움켜쥐었다.

뒤에 벌벌 떨고 있는 박 동식 상병에게 내 탄대 뒤쪽에 매단 물 백을 떼어내 물을 쏟아버리고 달라고 했다. 빈 물 백에 대가리부터 쑤셔 넣었다. 뚜껑을 닫아 다시 탄대에 찼다. 제법 무겁다. 청 독사와의 싸움은 끝났다. 술을 담아 아버지께 귀국선물로 가져갈 테다.

째째산 정상까지 수색했으나 별다른 상황도 없고 썩은 총 한 자루 발견한 것이 전부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다.

다시 째째산을 내려가 한성산을 구석구석 뒤졌으나 이미 놈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후였다. 결국 이 작전도 실패다. 마침내 거대한 치누크가 굉음을 내며 도착했다.

작전을 마치고 철수할 때 다가오는 헬기 소리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반가울 수 없다. 언제 총알이 목구멍을 지나갈지 모르는 이 정글 속에서,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도 되는 아늑한 보금자리인 기지로 데려다 주니 그 공간이동이 얼마나 고마운가. 거대한 치누크에 오르자 곧장 이륙했다. 마침 기총사수는 자주 마주치는 마이클 병장이다. 마지막에 치누크에 오른 나는 좌석이 없어 천정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다. 갑자기 마이클 병장이 헤드폰을 벗어던지며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친다.

"헤이! 노! 노! 게르 웨이! 게르 웨이!"

뒤돌아보니 나를 가리키며 소리 지른다. 가까이 다가가니 눈이 동그래져 문을 열고는 밖으로 뛰어 내리란다. 뭔 소린가 했더니 허리에 차고 있는 물 백 속의 청 독사를 보고 완전히 겁에 질려버린 것이다.

'요 녀석, 늘 으스대더니 잘 됐다. 너, 오늘 임자 만났어! 맛 좀 봐라!'

미군들은 우리와 같은 영내에 있어도 실제 그다지 교류가 활발한 편이 아니다. 미군들은 주로 헬기나 포를 지원해주고 우리는 보병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다만 작전 출동이나 철수할 때 주로 헬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기총사수들과는 접촉이 빈번한 편이다. 헬기 조종석의 기장, 부기장은 누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공간에 탑승하고 있는 기총사수 마이클과는 자주 얼굴을 마주친다. 서로 자주 보다보니 짧은 영어로나마 인사를 주고받고 농담도 건넨다.

까만 얼굴에, 검은 선글라스, 머리에 빨간 두건을 쓰고 항상 껌을 씹으며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본다. 돼지 멱따는 록 뮤직 볼륨을 한껏 높여놓고 몸을 흔들어 댄다. 그것까지는 그런대로 봐줄 수 있다 치더라도 언제나 뻐기는 투에 우리를 무시하는 듯 하는 이 녀석의 태도에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기내에서 자기 쪽으로 가까이 앉으면 어린애 다루듯이 물러나라고 소리친다. 또 작전을 마친 후 며칠 씻지 못하고 땀범벅이 되어 헬기에 오르면 코를 싸쥐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인상을 쓴다. 은근히 불쾌하지만 서로의 처지가 처지인지라 애써 무시하고 지내던 터였다.

그런데 이 녀석 오늘 임자 만난 것이다. 혼 좀 나봐라.

청 독사가 든 물 백을 풀어 들고 마이클 얼굴 쪽으로 들이밀었다. 녀석은 놀라 '오! 노! 노!' 하면서 헬기 안쪽으로 도망을 간다. 다시 따라가 들이밀고 피하고 ... , 급기야 이 녀석이 헬기에 장착된 캐리버 50 거치대를 잡고 뛰어내린다는 시늉을 한다. 모두들 '오케이!' '굿!' 하면서 뛰어내리라고 한다. 헬기 안은 웃고 떠들고 한바탕 유쾌한 소동이 벌어졌다. 이번 작전 중에 나 혼자 노획물을 챙겨 의기양양하게 기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 어찌 소문이 돌았는지 중대장이 무전 호출을 했다.

"은하수 하나! 여기는 300."

"송신!"

"귀소 미신고 노획물, 사실인가?"

"... ?"

"즉시 신고 바람. 이상!"

"맨입 곤란. 이상!"

청 독사를 넘기라는 거다. 나 역시 중대장한테 그냥은 안 된다는 가벼운 농을 쳐본다. 술을 담아 귀국선물로 챙길 건데 ... ,

육사 출신의 이 형기 대위. 자신의 임무에 이만큼 철저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디서 총소리만 나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관망대로 뛰쳐나온다. 수색작전은 물론이고 매복 때 상황이 생기면 제일 먼저 무전망에 등장하여 지휘에 나선다. 그런 만큼 부하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각별하다. 병사들 개개인의 애로사항을 세심하게 챙기고 배려해 준다. 때문에 무리한 명령을 해도 중대원들은 별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다. 조금 있으니 중대 전령이 인삼주 한 병과 맥주 세 박스를 들고 왔다.

"야! 이건 완전히 밑지는 장사야! 알지?"

한 마디 던지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청 독사 물 백을 넘겼다.

사실 인삼주는 큰 선물이다. 미군들이 인삼주라면 사족을 못 쓴다. 경매를 붙이면 죠니워카 다섯 병까지 맞바꿀 정도로 인기 있는 인삼주다. 오늘 우리 누에고지 분대원들에게 좋은 술을 대접해야겠다.

22, 내 인생 최고의 날

내일은 대대 야외극장에서 고국 연예인들의 위문 공연이 있단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오지 정글까지 고국 공연단이 찾아 준단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이런 고마울 데가 ... ,

대대장은 '무적 맹호' 이름 값한다고 또 일을 벌인다. 오늘 저녁 매복을 나가 꼭 전과를 올리라는 희망사항이 하달되었다. 내일 오는 위문공연단에게 전과를 올려 선물로 보답할 겸, '무적 맹호'의 저력을 과시하자는 거다.

"정말 웃기고 있네."

"씨부랄! 애들 장난도 아니고 ... ,"

"베트콩이 잡으란다고 잡히고, 잡고 싶다고 잡히나?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우연이건 실력이건, 때맞춰 사고(?)치는 건 우리 1분대가 전문이다. 결국 매복임무는 우리 1분대에 떨어졌다. 누에고지 경계는 2분대에 맡기고 분대원 7명이 매복에 나섰다.

장기매복도 아니고 오늘 저녁 단판 승부를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적 출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분대원들이 머리를 맞댔다. 똥포 마을에서 과부촌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사원(절)으로 빠지는 길목에 덫을 놓기로 했다. 누에고지에서 직선으로 150여m에 불과한 지점이다. 고지에서 고함을 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깝다. 야음을 틈타 신속하게 진입했다. 이곳을 매복지로 선택한 것은 근래 레이더망에 이동사항이 자주 나타나고, 주민이나 외부의 눈을 피해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경계병을 내보내고 분대장을 도와 신속하게 크레모어 설치를 했다. 선을 풀어 격발기에 결속을 마치고 모두 허리를 펴면서 땀을 닦는 순간, 느닷없이 바로 눈앞에 10여명의 적이 나타났다. 놈들은 이미 크레모어 사선을 넘어 들어와 버렸다. 놈들도 갑자기 마주친 우리를 보고 당황하며 주춤했다. 그 중에 한 놈이 수류탄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망설일 틈도 없다. 그대로 크레모어 격발기를 누르면서 엎드렸다. 동시에 놈의 수류탄도 날았다. 몸을 굴렸다. 그리고 빠른 동작으로 뒤로 후퇴하고 놈들도 옆으로 흩어져 총탄을 퍼부었다.

아뿔싸! 그런데 우리에겐 총이 없다. 분대장이 갖고 있는 총 한 자루가 전부다. 총과 무전기를 옆에 두고 땀을 닦다가 갑자기 적과 조우한 것이다. 총도 무전기도 챙길 여유도 없이 엉겁결에 뒤로 빠져 나왔던 것이다. 영락없이 놈들에게 당할 판이다.

누에고지에서는 크레모어 폭음을 듣고 곧바로 조명을 띄웠다. 고지에서는 환한 조명아래 우리가 처한 상황을 손바닥 보듯 내려 보고 있었다. 눈 아래 보이는 상황에 고지에서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단 한 자루의 총으로 분대장 혼자서 사격하고 놈들은 집중사격을 하고 있다.

"은하수 하나! 여기는 번데기!"

누에고지에서 무전기에 대고 악을 쓰는 소리가 육성 그대로 들린다. 계속 호출하지만 속수무책이다. 2분대원들은 내려다보며 발만 동동 구른다. 놈들과 우리의 거리가 너무 근접해 있어 지원사격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전멸이다.

결국 이대로 있어도 죽을 판이면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무조건 총과 무전기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모두 수류탄과 연막탄을 떼어내 한꺼번에 던졌다. 폭음과 연막이 솟구치는 순간 구르고 뛰었다. 놈들의 총탄이 사방으로 꽂힌다. 코앞에 먼지가 폴싹폴싹 난다. 이판사판이다. 총을 못 잡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 아닌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마구 구르고 낮은 포복으로 기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가까스로 한둘이 총을 손에 잡았다. 총을 잡은 분대원들이 난사하기 시작하자 놈들의 사격이 주춤해진다. 이윽고 모두 총을 쥐고 지형지물에 은폐하여 응사하기 시작했다.

누에고지 관망대에서 소리쳐 적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상황파악이 한결 쉬웠다. 누에고지에서 알려준 곳으로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비로소 놈들이 계곡 하천을 따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때를 놓치지 않고 누에고지에서도 박격포 공격을 했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모두 땀에 흠뻑 젖어 눈빛만 빛나고 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전방에 한 놈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상황처리는 일단 내일 날이 밝으면 하기로 하고 철수를 했다.

"탕!"

박 동식 상병을 앞세우고 철수하는데 딱 한 발의 총소리가 났다. 앞서가던 박 상병이 쓰러졌다. 모두들 반사적으로 총을 쏜 놈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박 상병에게로 달려갔다. 살펴보니 총알이 옆구리를 스친 경상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최 봉석 병장이 이빨 두 대가 부러져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날이 밝았다.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하면서 상황처리를 위해 매복지로 내려갔다. 쓰러진 놈이 주위를 피로 물들이고 있다.

저게 무언가? 참으로 초라하고 누추한 모습. 그야말로 몸뚱아리. 사람이라는 것. 이해하기 힘들다. 과연 저 몇 마디의 뼈, 몇 방울의 피, 몇 조각의 살점으로 된 저 하찮은 몸뚱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잘 것 없는 저것도 어제까지는 나와 똑같은 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가 피가 쏟고, 그 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버렸고, 세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저 허접스런 것, 저 속에 가족이니 이념 따위가 들어있었다니, 허무한 생각이 든다. 또한 저것이 세상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다. 내가 저 자리에 널브러져 있다면 나 또한 저러하겠지 ... ,

'인간은 살아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구나. 어쨌건 살아 있어야 한다.'

어젯밤은 참으로 아찔했다. 저것과 내 위치가 바뀔 뻔 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무사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우리가 순간판단을 잘 한 것인지, 아니면 신의 가호가 있어서인지 ... ,

아무래도 무식하고 용감했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다시 닥친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여하튼 나는 오늘 아침 태양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주위를 수색하여 적 시체 1구를 더 찾아냈다. 시체와 총과 노획품을 19번 도로에 끌어냈다. 대대장이 APC와 함께 도착하였다. 대대장은 일일이 손을 잡으며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씨부랄! 위문공연단에게 생색내려다가 멀쩡한 놈 모조리 깨질 뻔 했다고!"

시체와 노획품을 APC에 실려 보내고 우리는 대대 공연을 보기 위해 트럭에 몸을 실었다. 대대에 도착하자마자 박 동식 상병과 최 봉석 병장을 의무지대에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대대장은 적시타를 때려 희망사항을 이루어준 우리 분대원들에게 보상차원으로 가수 조 미미, 리타 김, 옥 금옥, 펄 시스터즈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초대해 주었다. 그리고 공연장 맨 앞자리를 내주었다.

'이래 뵈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가수 조 미미, 펄 시스터즈와 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하는 사람이라고!'

공연이 시작되어 가수들의 열창이 이어졌다. 국내 정상급 가수들로 구성된 위문공연단답다. 열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인기 정상을 달리는 가수 펄 시스터즈가 요즘 최고 인기곡인 '커피 한 잔'을 불렀다.

극장은 완전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모두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흔들어댔다. 노래하는 막간에 깜짝 이벤트가 있었다.

아마 대대장이 마련한 것 같다. 사회자는 간밤에 전공을 세운 우리 분대 5명을 무대로 불러 올렸다. 지난밤의 전공을 소개하고는 여가수들의 품에 안겨 여가수들이 손에 쥐고 있는 젖병에 든 우유를 빨아 먹도록 했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조 미미의 품에 안겨 우유를 빨았다. 내가 누구인가!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천하의 땡삐 아닌가!

용감하게 열심히 젖병의 우유를 빨았다. 말할 것도 없이 1등이다.

조 미미가 포옹해 주면서 주머니에서 빨간 여성 삼각팬티를 꺼내 앞뒤로 돌려가며 관중석을 향해 내보였다. 극장은 완전히 박수소리와 괴성과 휘파람소리로 뒤집어졌다. 조 미미가 공손하게 그 팬티를 부상으로 나에게 준 것이다.

'와! 드디어 나에게도 부적이 생겼다. 그것도, 대한민국 뭇 사내들이 악수 한 번 하는 게 꿈인, 조 미미로부터 빨간 팬티를 상으로 받았다.

전 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 ,'

전우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정말 세상이 내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대대장은 푸짐한 선물도 안겨 주었다. 아! 이런 걸 두고 보람이라고 하는구나. 이래서 사나이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는구나. 우리는 트럭을 타고 오면서 세상이 떠나갈 듯 노래 불렀다. 누에고지로 돌아온 우리들은 또 한 번 노래하고 춤을 추며 마셨다. 맘껏 이 순간을 즐기자. 부어라! 마셔라! 죽고 사는 것은 어차피 하늘이 정하는 것.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다. 이 순간을 위하고, 이 순간을 즐기자!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하늘이 빙빙 돌고 땅이 울렁울렁 한다.

밤을 잊은 분대 벙커는 광란의 불구덩이다.

23, 편지 오다.

"분대장님, 오늘 풀 좀 뜯어 먹읍시다."

"좋지! 움직이면 연락 바람. 이상!"

우리끼리 통하는 무전교신이다.

항상 전투식량인 C-레이션 깡통 음식만 먹다보니 야채 생각이 간절하다. 개도 풀 뜯어 먹는데, 물론 빈캐시장에 가면 야채를 판다. 배추와 풋고추도 파는데 너무 비싸 병사들이 현지에서 받는 수당으로는 야채 사먹을 생각은 꿈도 못 꾼다. 특히 여기는 열대지방이라 배추가 귀해서 한 포기 2불씩이나 한다. 그것도 속이 꽉 차지 않은 것이다. 가지와 접붙인 풋고추도 5개 1불이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배추서리를 한다. 이곳 월남에도 기온이 낮은 산간지역에서는 배추농사를 짓는다. 한국의 김장용 배추처럼 속이 꽉 차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겐 보약이나 다름없다.

가끔 농부들이 배추를 수확해서 트럭에 가득 싣고 빈캐시장에 팔러간다. 안캐페스 근무자들이 배추트럭이 나타나면 16교량 기지에다 무전을 날린다. 기지에서는 4, 5명이 도로에 나가있다가 배추트럭이 보이면 교량 입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일단 차량을 세운다. 운전석과 조수석 쪽 발판에 한 명씩 붙어 선다. 그리고는 이 트럭에 무기를 싣고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검문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리고는 안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묻는다. 이는 물론 트럭의 양쪽 사이드미러를 가리려는 작전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두세 명이 트럭 뒤에 달라붙어 배추를 빼내 도로 아래로 던지는 것이다. 트럭 안의 화주와 운전기사는 화물칸의 짐을 모두 내리고 조사하겠다고 하면 사색이 된다. 빨리 시장에 가서 배추를 팔고 해지기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오래 지체되면 돌아갈 때 도로가 차단되면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엄포를 놓다가 뒤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쯤 봐주는 척하며 증명서 확인만 하고 슬며시 출발하라고 한다. 그러면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며 배추 몇 포기를 준다.

이렇게 해서 수입 잡은 배추를 분배한다. 소대장실에, 각 분대별, 임무수행 분대, 물론 최초 기획(?)하고 연락한 안캐페스 분대에도 올려 보낸다. 이런 날은 오랜만에 안남미 대신 기름진 대만미로 솥 밥 가득 짓는다. 그리고 K-레이션 된장에 분말 고추장을 섞어 쌈장을 만든다.

배추서리한 날은 배추쌈을 싸서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한다.

어제는 풀 뜯어 먹으며 포식을 했고, 오늘도 평온한 하루가 시작 되었다. 분대원들은 레이더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경계근무를 서는 것으로 하루를 뭉갠다. 헬기로 식수와 보급품이 왔다. 편지도 같이 왔다.

'일선에 계신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초등학교 코흘리개 학생들의 잘못 배달된 위문편지에서부터 가족, 애인, 친구들의 편지까지 뭉치로 배달되었다. 군바리 생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휴가요, 다음은 외박, 다음은 편지 아닌가.

막내 박 상병이 편지를 분류해서 내게도 한 뭉치 갖다 준다. 어머님 편지, 위문편지, 완주 군청의 순홍이, 경산의 옥희, 성당 후배, 친구 경찬이 ... , 그런데 이게, 아니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획을 다소곳이 굽혀 또박또박 쓴 글씨. '김. 영. 곤' 분명 영아의 글씨, 영아의 편지다.

야호! 꿈에 그리던 영아의 편지가 왔다. 심장이 덜컥 하는가 했더니 쿵 쿵 쿵 뜀박질 한다.

'야! 왔다. 왔어! 그럼 그렇지. 드디어 왔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영아 편지를 아무데서나 뜯어 볼 수는 없지. 벙커 한쪽에 쌓아놓은 캔 맥주 하나를 꺼내들고 조용한 중화기 벙커로 갔다. 우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꺼내는 손이 가늘게 떨리며 자꾸 더듬는다. 담뱃불을 붙여 물고 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정성스레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오빠, 이국전선 월남 땅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요? 그 동안 건강하게 잘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서른 하고도 여섯 번, 썼다가는 찢어 버리고 다시 쓰는 소녀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고,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진답니다.

오빠, 이 못난 영아를 용서해 주세요.

무슨 말로든 위로하고 또 위로받고 싶다는 영아의 심정은 조용히 오빠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오빠와의 추억들을 가슴미로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저를 잊어주세요. 굳이 이유를 물으신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 할게요.

정말 사랑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 했습니다.

오빠,

부디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행복하기만을 바라겠어요.

오빠를 사랑했던 영아가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잊어 달라니, 뭔가 잘못 되었어. 영아를 잊어달라니! 아니야. 아니야. 잘못 되었어. 뭔가 잘못 된 거야. 하늘이 무너진 듯 눈앞이 캄캄하다.

편지를 다시 읽었다. 글자 한자 한자를 뜯어 먹듯 읽고 또 읽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거야. 지금 옆에만 있다면, 내게 무슨 오해가 있는지 깨끗하게 풀어주고 해결할 텐데 ... ,

혹시 어머니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도록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머릿속이 하얗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벙커로 돌아와 맥주 두 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계속 갈증이 난다. 또 캔을 땄다.

"어이! 김 병장,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장 필호 분대장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낮부터 계속 캔을 따고 있는 낌새가 이상했던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맥주 들고 따라와 봐!"

분대장도 맥주 한 캔을 들고 포진지로 향했다. 마시던 맥주를 들고 분대장을 따라갔다.

"무슨 일이야? 말해 봐! 집에 무슨 일 있어?"

분대장은 손바닥을 펴서 내놔라는 시늉을 한다. 이미 내가 편지를 받고부터 그런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9명 정원에 1명이 보충되지 않아 8명뿐인 분대. 사선을 넘나드는 생활에서 분대장은 분대원들의 모든 것을 내 몸과 같이 살핀다. 각 분대원들의 가정사정과 고민거리는 물론, 그날의 컨디션까지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 며칠 주기, 어디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지도

훤히 꿰뚫고 있다. 하기야 굳이 살피려고 하지 않아도 한 구덩이에서 한 달만 뒹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뭐 말입니까?"

"뭐라고? 내놔 봐. 빨리 ... , 어서!"

할 수없이 호주머니에서 영아의 편지를 꺼내 줬다.

"아하, 영아! 영아가 있긴 있구나. 난 지금까지 뻥치는 줄 알았네."

분대장은 읽어보고 돌려줬다. 그리고는 어깨를 툭 쳤다.

"임마! 한 잔 마시고 힘내! 지금까지 기다려 준 것만 해도 열녀야. 군바리 고무신 길어야 6개월이랬잖아. 그것도 월남 전선에 죽으러 간 놈을 어떤 년이 기다리겠어? 끙끙대지 말고 깨끗이 털어버려. 사내답게. 알았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임마! 안 봐도 삼천리지. 살아서 집에 가고 싶으면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버려. 명심해! 알았지?"

"... "

다 마신 캔을 구기며 분대장을 따라 벙커로 들어왔다. 영아는 분대장 말처럼 그렇게 고무신 거꾸로 신을 그런 여자는 아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거야. 그래 편지를 쓰자. 당장.

'내 목숨을 다 바쳐 사랑하는 영아'로 시작해서, 내 모든 것을 다하여 영아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쓰는 동안 어둠이 내리고 옆에는 빈 맥주 캔이 수북하다.

마음 한 구석 찜찜한 것을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이젠 사랑하는 영아의 편지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편지를 쓰면서 마신 맥주로 약간 취기가 오른 데다 머릿속이 어수선하여 일찌감치 자리에 드러누웠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린다.

24, 월맹정규군 특공대의 기습

8월. 건기의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초저녁 초승달이 지고 하늘에는 남십자성이 유난히 더 반짝인다.

어둠 속에서 관망대 근무를 서고 있었다. 갑자기 무전망이 시끄럽다. 대대 CP가 놈들의 박격포 공격을 받아 발칵 뒤집혔다. 발포지점을 찾으려고 각 관망대와 매복지에 연신 호출을 날린다.

이 촌놈의 새끼들! 이젠 완전히 간이 배밖에 나왔구나. 대대 CP까지 와서 박격포 공격을 하다니, 그것도 천하의 맹호 기갑연대 1대대 CP를 ... , APC 한 대가 파손되고 관망대와 유류고에 불이 붙어 검붉은 화염이 밤하늘에 치솟는다. 대대본부가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에어컨 아래서 책상에 다리 걸치고 있다가 처음으로 이런 험한 꼴을 당했으니 500장 혼줄 났겠다. 박격포 공격이라면 틀림없이 18연대 9대대가 공격했을 것이다.

놈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중대가 급히 출동했다. 우리는 무전망을 열어놓고 전황에 귀를 기울인다. 대대 쪽에서는 계속 시뻘건 화염이 오르고 있다. 1시간 쯤 지났을까? 3중대 김 정일 하사 조에서 교신이 떴다. 놈들을 일망타진 했다는 보고다.

20여발의 박격포탄을 대대 CP에 쏟아 붓고 의기양양하게 소도산으로 돌아가던 놈들을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적 사살 11명, 82mm 박격포까지 접수했다.

'이 촌놈들 뒈지려면 무슨 짓을 못 해!'

김 정일 하사 조 정말 잘 했다. 최소한 충무무공훈장 감이다.

누에고지에 있던 우리 1분대는 놈들의 대대 박격포 공격 다음 날, 16교량으로 내려 왔다. 화기분대와 교체를 한 것이다.

엊그제 놈들은 대대 CP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역습을 당해 전원 사살되고, 82mm박격포까지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으니 틀림없이 보복행위를 할 것이다. 그래서 기지 주변에 매복을 나갔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 쪽이 아닌 빈캐 쪽 약 2km지점 송유관을 터뜨려 밤새도록 불기둥이 솟았다. 철수 후 아침식사를 마치고 침상에 누웠다. 누에고지 쪽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총성이 요란하다. 후다닥 일어나 무전기를 열었다.

누에고지가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으니 급히 지원을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미군 군수차량과 미군의 물자수송을 용역 받은 한진 회사 차량들이 습격을 받아 불이 붙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출동!"

서둘러 무장을 하고 출동했다. 이미 누에고지는 적의 집중공격으로 포연이 자욱하다. 도로에는 차량들이 줄지어 멈춰서있다. 일부 차량은 파손되어 불타고 있고, 운전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18연대 9대대 정규군의 공격이다. 놈들은 계속 포와 중화기를 쏘아대고 있다. 경호하던 미군 APC 2대와 1대의 헬기가 반격을 펴고 있지만 놈들의 공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다. 정규군답게 생각보다 훨씬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우리는 2개 분대를 소대장조와 선임하사조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했다.

적을 마주한 전방 100m까지는 논이다. 뒤로 20고지의 소 정글이 이어져 있다. 질척거리는 논을 가로질러 뛰었다. 뛸 때마다 위험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다음 논둑을 향해 막 뛰었을 때 '슉' 하면서 적의 로캣포가 날아왔다. 그대로 무논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포탄은 몇 발짝 뒤에 떨어져 터졌다. 진흙탕 물이 튀어 올라 온몸에 쏟아진다. 흙탕물 속을 뛰고 구르면서 계속 전진하여 겨우 20고지 정글까지 진입했다.

이제 쌍방 사격권 안에 들어온 셈이다. 띄엄띄엄 무리지어 있는 소 정글에 몸을 숨기며 일제히 사격을 했다. 61포대의 105mm 포가 끊임없이 놈들의 후방에 날아와 터진다. 뒤이어 합류한 1, 2소대의 일부 병력과 포위망을 좁혀가며 협공을 했다.

월남에 온 이후 처음으로 대병력과 마주보며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다.

무장헬기 편대가 로켓포와 건 쉽을 집어넣고, APC도 캐리버 50으로 집중공격을 하지만 놈들의 공격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놈들은 이미 개인호를 구축해놓고 그 속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

더 이상 전진이 어려워 잠시 진격을 멈췄다. 무장헬기와 APC, 61포대의 집중공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놈들이 주춤하는 것 같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총공세를 폈다.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놈들의 개인호에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저항하던 놈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진격하면서 닥치는 대로 쏘고, 부상으로 미처 달아나지 못한 놈들도 그대로 갈겨버렸다. 우리는 20고지의 광활한 정글을 구석구석 헤치고 뒤지며 전진해 나갔다. 이윽고 소도산 하단부까지 진격했다. 모두 잠시 휴식을 취했다. 눈에 불을 켜고 반격을 시작한지 4시간 만이다.

헬기에서 공수해준 물과 식량으로 중식을 때우고, 다시 19번 도로 쪽으로 돌아 나오며 수색했다. 놈들의 시체와 무기, 장비들을 모두 수거하여 폐쇄된 15교량에 끌어냈다. 주민들이 몰려와 시체가 도착할 때마다 서로 먼저 보려고 아우성이다. 가족이나 친지를 확인 하려는 것이다. 사살된 적군은 50여명. 그 중에는 어린 소년과 여자도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생각이 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어린 아이까지 목숨을 바쳐 싸워야 하는지 ... ,

저 어린 생명들이 나의 총탄에 피를 흘리고 생을 마감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듯 하고 가슴이 짠해진다.

'도대체 전쟁이 무엇이며 왜 싸워야 하는가?'

나에게 신념 따위는 묻지 마라. 나는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총을 쏘고, 살기 위해서 싸울 뿐이다. 그런 것을 나에게 말하는 것은 실례다.

그런 인간세상의 말들은 너무 멀리 있어 생경하다. 내가 서있는 이 15교량에서 전쟁을 설명하려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일이다. 전쟁터는 논리나 이성 따위로 이해될 수 없는 곳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이 도착하여 중대장이 브리핑 했다. 이놈들의 작전도 기발했고, 우리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리는 그저 그저께 대대CP를 포격하다가 희생당한 놈들에 대한 소규모 보복행위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적은 18연대 9대대 병력을 총동원하여 누에고지와 19번 도로상의 군수차량에 대해 동시에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우리는 꿈에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전 또한 입이 벌어지게 했다. 본대는 후방에서 포와 중화기로 공격을 하고, 특공대가 개인호를 구축하여 잠복하고, 행동대가 제1선에서 공격하다가 특공대가 잠복해 있는 개인호 사이로 퇴각을 한다. 아군들이 추격하면 개인호의 특공대가 집중사격을 한다.

'치고 빠지기식'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다행히 우리 61포대와 무장헬기, APC가 집중 화력을 퍼부어 이들의 제압 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놈들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면 우리 중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아군 희생이 별로 없었던 것은 절대적인 화력의 우세 덕분이다. 그리고 운도 좋았던 것 같다.

오늘 월맹정규군 특공대의 공격은 파월 사상 두 번째의 공격이라고 했다. 월맹정규군 1개 대대와의 치열한 전투, 월남에 와서 처음 겪은 전면전 이었다. 사단장은 보고를 받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중대원들을 격려해 주었다.

저들 죽음의 대가로 우리들은 훈장을 타고, 선물을 받고, 승리를 자축하고 그리고 샤워를 하고 쉬면된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일상적으로 있는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막 철수 하려는데 교신이 떴다. 누에고지의 이 정부 화기분대장이 적의 직격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산화했다고 한다.

가슴이 철렁했다. 누에고지는 어제 아침까지 우리 분대가 경계임무를 맡고 있었던 곳이다. 이것도 인간의 운명인가? 우리가 계속 주둔해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쯤 어떻게 되었을까? 이 역시 신의 가호일까?

'아! 참, 화기분대 서 재윤 병장은?'

"번데기! 번데기! 여기는 은하수 하나!"

"송신"

"서 재윤 병장 바꿔라. 이상!"

서 병장이 나왔다. 반가웠다.

"괜찮아?"

"이상 없음."

서 병장이 울먹이는 소리로 응답을 한다.

"그래, 다행이다. 몸조심 해! 파이팅!"

같은 소대에 있으면서도 얼굴 한 번 마주 보고 얘기 못하고 이렇게 교신으로 서로 무사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 ,

누에 고지를 뒤로 하고 기지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손목에 걸린 묵주를 매만지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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