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가 된 아버지
그해 음력유월 보름께는 철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봄부터 시작한 가뭄 때문에 들녘에 심어놓은 곡식들은 시들어 가고 흙바람만 일었다.
더위에도 불구하고 온 집안에 찬바람이 감돌았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대낮에도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대문 밖 인기척에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 여느 때 같으면 나는 둑 너머 시냇물에서 물장구를 치며 물고기를 잡거나 팽나무 그늘에서 낮잠이나 잘 거였다. 보름 전 인민군의 탱크가 우리 고장을 장악하고 나서 상황이 확 바뀌어 버렸다. 아버지의 신분이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들판 외따로 있었다. 농사철이 아니면 사람의 발길이 뜸했다. 그런데다 인민군이 들어오고 나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를 꺼려했다. 면소재지에는 지하에서 암약하던 빨갱이들이 밖으로 나와 붉은 완장을 차고 설쳐대는 바람에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봐 모두 몸을 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굳게 닫힌 우리 집 대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열한 살 어린 내 가슴은 콩새 가슴처럼 콩닥콩닥 뛰었다.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어주자 보안대에서 나왔다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지서(支署)에 아버지가 포로로 잡혀 왔다는 전갈이었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지서는 우리 집에서 직선거리로 3백 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철창에 갇힌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매를 많이 맞은 듯 윤곽만 남은 채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버지는 삼베옷에 낡은 밀짚모자를 쓰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등 뒤에서 보안대 안팎의 분위기를 살폈다. 흉측스런 뱀의 비늘이 스쳐가는 서늘함을 느껴졌다.
지서 안팎에 모인 보안대원들은 대부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는 인민의 세상이라고, 모두 배곯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인민 누구나 공평한 세상에서 행복할 날밖에 없다며 입이 닳도록 떠들어댔다. 그들은 대부분 내가 잘 아는, 평소에 살림살이가 팍팍한 소작농이거나 세경으로 가족을 거느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버지 친구도 몇 명 끼어 있었다.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갑자기 보안대 안팎이 수런대었다. 재판받으러 가야한다며 철창에 갇힌 포로들을 포승으로 묶었다. 그리고 빗재를 향해 일렬종대로 걷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나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래 장터로 가는 다리 앞에서 인솔책임자가 행렬을 멈추게 했다. 그의 말로는 "내일 재판받고 돌아온다."며 여기서 헤어지자고 선을 그었다. 포승에 묶인 여섯 명의 포로 곁에는 여섯 명의 감시병이 따랐고, 그들은 하나같이 총을 메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등 뒤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꼭 돌아오십시오.' 라고 인사도 못하고 어정쩡한 몸짓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다.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치기산 바위틈에서 부엉이가 애타게 울어대었고, 치기산 밑을 돌아나가는 용두천 물길도 더디게 흐르는 듯했는데, 포승에 묶인 아버지도 걷다가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곤 했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멍하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빗재 방향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애써 그 총소리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딴 생각을 했다. 또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구나? 했다. 그때는 전시상태여서 아무데서나 총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재판받는다는 군소재지 재판소로 달려가 아버지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다. 헛걸음친 할아버지는 돌아오는 길로 빗재 너머 사람들을 만났다. 혹시 어제 어디쯤에서 총소리가 났느냐 묻고, 총소리가 났다는 골짜기를 샅샅이 뒤졌다. 할아버지는 어둑해질 무렵에야 포승에 묶인 여섯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 우리가족은 할아버지를 따라 현장으로 갔다. 나는 시퍼렇게 변해버린 시체들 중에서 아버지를 확인했다. 찌는 날씨에 시체 썩는 냄새가 골짜기를 매웠다. 하늘에선 까마귀 떼가 탁한 소리를 지르며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할아버지는 그 시체 무더기에서 아버지를 분리시켰다. 할아버지 눈에는 슬픔보다 무서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어린 나의 조력을 받으며 당신의 가묘를 만드셨던 할아버지는 늦둥이 외아들을 그 곳에 묻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묻고 돌아온 그날 저녁, 나는 가족들의 슬픔이 꽉 차있는 방에서 빠져나와 내가 항상 머물던 시냇가에 앉아 아버지를 그려봤다. 붉은 달이 일찍 떠서 시냇물에 어리었다. 열한 살 소년은, 그동안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내가 부른 아버지 소리는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치기산 벼랑에 부딪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빨갱이 잡던 아버지
아버지는 일제 징집을 피해 절에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경찰직에 몸담았다. 그 당시 경찰의 치안업무 중에는 지하에서 암약하는 빨갱이들을 색출해내는 게 제일 큰 임무였다. 세상이 바뀌다보니 경찰 신분인 아버지는 그들이 제일 먼저 제거 하고픈 표적이 된 것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 탱크가 물밀듯 남하했다. 우리 군대는 총 한번 쏘지 못하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병력마저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속해 있던 경찰병력도 남쪽을 향해 퇴각하던 중 차량에 연료가 떨어지자 당황한 경찰병력은 구심점을 잃고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 수염을 꼬며 자랐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해방소식을 듣자마자 절에서 나온 아버지는 곧바로 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겨우 명절 때에만 아버지 얼굴을 뵐까말까 했으므로 아버지 얼굴을 익힐 겨를이 없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러준 기억이 없으며, 나 또한 '아버지' 하고 제대로 불러본 기억도 없었으며 내가 아버지 품에 안겨본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와 격렬하게 다투었다. 사랑싸움이었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한 번도 오붓한 가정생활을 가져보지 못한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오실 적마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사나 짓자고 설득했으나 아버지는 어머니 의견을 들은 척도 안했다. 그래서 모처럼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반가운 마음보다 이번에도 또 싸우시면 어떡하나 오히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함께한 날이 거의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와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발음조차 어색하고 입 안에서만 뱅글뱅글 돌았다.
내가 태어난 자리
구한말, 조선왕조는 매관매직이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었다. 시궁창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왕조였다.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대낮에도 백성의 재산을 탈취하고 대들면 벌로 다스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관료들이었다. 말이 관료이지 허가받은 도둑놈 또는 강도에 불과 했다. 이반된 민심은 조선왕조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못한 민심은 결국 진주민란을 불러왔다. 진주민란이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백성의 원성은 전국으로 번져 있었다. 치료할 수 없을 만큼 곪아 터진 상처처럼 민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데도 형벌은 강화되었고 착취는 멈추지 않았다.
진주민란 30년 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란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삼남지방에서 삼십만 명에 이르는 혁명군들이 전봉준을 앞세워 봉기했다. 우리 큰할아버지는 전봉준과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동학란의 지도자급 인사였다. 동학란은 역적행위였으므로 우리 할아버지는 식솔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피난지가 '사근다리'라는 깊은 산속 동네였다.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국가가 나라일 수 없고 백성을 다스릴 자격조차 없을진대, 허가 낸 도둑놈처럼 국정을 농단한 무리들이 관직을 차지하고 행패를 부렸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시시탐탐 노리던 왜에게 36년 동안이나 강점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 처참한 식민지 말미에 황폐하고 척박한 토양에서 내가 태어났다.
8.15해방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는 피지배민족의 설음을 몸으로 새기면서 해방을 맞았다. 우리 집은 들판 외딴 곳이어서 같이 놀아줄 아이가 없었다. 나는 장터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장날마다 구경삼아 나가다 보면 말을 타고 긴 칼을 찬 일본 순사들이 도로정리를 한답시고 말굽으로 장꾼들을 툭툭 차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본순사들의 치욕스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대들거나 이가 없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어른들은 잘 길들여진 가축 같았다.
굴욕적인 36년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해방의 나팔을 불던 그날, 동네마다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함성을 질렀다. 봇물이 터지듯 사람들이 신작로로 몰려 나와 서로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장날마다 말발굽으로 장꾼들을 툭툭 치고 다니던 일본순사들은 타고 다니던 말도 버리고 죽기 살기로 도망을 쳤다. 동네사람들은 그들을 뒤쫓아 가면서 '왜 놈, 저 놈들 잡아라.'며 고함을 쳤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농기구를 들고 나와 금방이라도 왜인들을 해칠 것 같은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은 선하고 선한 백성들이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이데올로기의 패권 다툼은 계속되었다. 해방 전후 시점에서 6.25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대한민국은 국가다운 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정부상태 또는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공백상태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한 번도 실험도 경험도 못 해본 이상향을 위하여 패가 갈리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이 잔인해졌는지 모른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몰수
나는 6.25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 집과 토지와 세간을 몰수당했다. 몰수해 간 자들이 마련해준 운전부락 끄트머리 움막으로 쫓겨났다. 그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여느 종갓집 장독대처럼 촘촘하게 늘어선 장독이었다. 염장되어 있는 젓갈이며, 수년씩 묵힌 장료가 가득가득 담긴 그 항아리들이 족히 서른 개는 넘었다. 그 항아리들을 내 눈을 피해 가며 동네사람들이 하나씩 지게에 짊어지고 갔다. 그들은 내가 알만한 동네 사람들이었다. 항아리 행렬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느꼈다. 그 항아리 행렬이 지금까지 내 눈에 각인된 필름처럼 환하게 돌아간다.
그때부터 우리 가문(家門)의 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소용돌이치는 이데올로기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처지에서 더 이상 내 눈에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내 운명은 어긋나 있었다.
의용군
인민군이 우리 고장을 점령하고 나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문을 닫았다. 문 닫은 학교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나 하고 놀아 줄 친구가 없었다. 배급 받은 잡곡으로 아침을 때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내가 살던 집으로 구경을 다녔다. 몰수당한 우리 집에는 의용군의 훈련장이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올 때, 중. 고등학생들을 의용군이란 명분으로 데리고 왔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였다. 그들이 제식훈련을 받을 때는 무릎을 높이 올리고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인민군 군가를 불렀다. 여러 군가 중에 지금도 토막토막 기억이 난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뭐 그런 내용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할아버지는 찾아가 쉴 사랑방도 없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동네 사람들도 할아버지를 외면했다. 할아버지는 허전함과 무료함을 달래려고 몰수당한 논밭을 둘러보는 게 일과였다. 일곱 마지기 목화밭에 들렀다가 쏟아지는 목화송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몰수 재산이라는 것을 잊은 채, 내 목화밭에서 목화송이를 따듯, 몇 송이를 땄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보안대원들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할아버지의 머리가 깨지고 입고 있던 옷가지가 갈기갈기 찢기도록 몰매를 맞았다. 평생 글만 읽으시던 할아버지는 그 지방에서 '김 생원'으로 불렸다. 평소에는 할아버지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몸을 조아리던 그들이었다. 바뀐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날 오후 해거름에 고모가 살고 있는 사근다리로 피신했다.
평사낙안
우리 종갓집은 본래 딴 곳(他道)에 있었다. 그 곳 종갓집도 보기 드물게 우람한 건물이었고 문화재로 보호받을 만한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家門)의 번성과 영광을 위해 전국의 길지(吉地)를 찾던 중 풍수지리로 선택된 곳이 내가 태어난 평사낙안 종갓집이었다. 호남 정맥(靜脈)이 흐르다가 잠시 멈춘 듯한 왕자산을 중심으로 풍수지리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지명들은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왕자산 안쪽 산내면에는 능교(陵橋), 예덕(禮德), 홍문(紅門), 사근다리(사인교(四人轎), 목욕(沐浴), 등의 지명들이 그것이다. 산 바깥 산외면은 "산밖"이라고도 불린다. 산밖은 분지형태로 묵방산, 상두산, 독고봉 등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정극인(丁克仁)이 상춘곡(賞春曲)을 읊고 또 기념하는 상춘곡문학관에서 4킬로미터 상류지점이 평사낙안이다. 중국 동정호 평사낙안보다 규모는 작지만 오히려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고 전해진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했듯이 산 안팎 골골마다 오래전부터 내로라하는 명문가들이 터를 잡고 인재를 길러낸 곳이기도 하다.
그 한가운데 펼쳐진 들판을 평사낙안이라 했다. 동진강 발원지이기도한 상두산 물줄기와 옥정호 물을 역류시켜 발전소(發電所)를 통과한 물이 용두천에서 만난다. 다시 말하자면 김제 만경 평야의 젖줄인 동진강 상류인 셈이다. 우리 집은 용두천 둑을 경계하고 있었다. 담처럼 둘러쳐진 둑을 넘으면 사계절 맑은 물이 흘렀다.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물놀이를 즐겼다.
평사낙안 종갓집이 완공될 무렵에 동학농민혁명이 봉기했다. 그때 우리 종갓집 미음자 건물 동남쪽 귀퉁이 부분이 무너지는 홍수 피해를 입었다. 동학란이 일어나 어수선한데다 뜻밖의 홍수 피해까지 당하다보니 종갓집에서 이사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고 수년 동안 비워 둔 집에 우리 할아버지가 사근다리에서 동학란을 피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천여 평의 대지위에 지어진 본체는 여섯 자 높이로 땅을 돋워 지었다. 양쪽에 방 두 칸이 달린 여덟 칸 겹집이었다. 지방의 유림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는 용도로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본체에서는 살림을 하지 않았다. 본체에 이어져 미음자로 지어진 건물에는 동, 서, 남문을 달았다. 건물 본체 옆으로 약 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부속건물 회랑(回廊)이 한 채 더 있었다. 기둥만 있고 칸막이가 없는 그 건물도 유림들의 토론장이었다.
내가 태어나 뼈가 굳은 십여 년 동안 지방 유림들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좌우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던 해방 직후, 농기구로 무장한 빨갱이들이 무력시위를 벌이며 준동할 때마다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들과 촉성회 회원들이 그들을 우리 회랑으로 잡아들였다. 얼추 삼사 십 명 쯤 되었다. 그들은 헐벗은 농부가 대부분이었고 그들을 부축이던 몇몇 사람은 지방에서 알려진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취조를 마치는 대로 매를 맞았다. 그들의 머리가 깨지고 살이 터졌다. 회랑 마루에 피가 흥건했다. 어린 소년의 생각에는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매를 맞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평사낙안이란 길지(吉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우리 집에서 영화도 틀었고 연극공연도 벌어졌다. 밖으로 통하는 대문 세 군대를 걸어 잠그고 북쪽으로 통하는 길만 지키면 아무도 우리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구조였다. 때문에 야외공연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요즘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무성영화 '똘똘이와 복남이'가 상영 되었다. 영사기는 화면을 만들고 변사(辯士)가 구성진 목소리로 줄거리를 설명하는 영화였다. 연극도 여러 작품 공연되었다. '심청전'과 '장화홍련전'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은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공공의 목적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그 집이 아무 이유 없이 불태워졌다는 것이다. 개인의 소유든 공공의 건물이든 건물이 왜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빨치산과 동거
사근다리로 몸을 피신한 할아버지가 며칠 뒤 해거름에 집에 오셨다. 다급하게 나를 사근다리로 데려 갔다.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이유가 있었다. 작은 고모 집에선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다 보니 매 끼니마다 진수성찬이요 잔치 같았다. 사근다리 마을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곧 바닥이 났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빨치산 무리들은 매일 밤마다 이웃마을에서 곡식과 가축을 끌어왔다. 그러니까 그들이 순창 회문산 빨치산 사령부로 가기 전까지 대여섯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략질이 계속된 셈이다.
할아버지가 머리가 깨지고 살이 터지도록 몰매를 맞고 사근다리로 피신 한 후, 빨치산 밥을 해주는 고모 집에 거처하면서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먹다 남은 고깃국물이며 버려지는 머리, 꼬리 부분을 고아 드시고 몸이 회복되자 먹성이 시원찮은 손자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시점은 우연히도 보안대원들이 나를 데리러 온 몇 시간 전이었다. 아버지를 총살한 그들이 후환이 두려웠던지 나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천우신조였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따라가고 간발의 차로 보안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세상이 바뀌더라도 보복당할 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의 핏줄을 끊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바뀌면 내가 아버지 원수를 갚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들은 나를 데려가지 못한 대신 어머니를 끌고 갔다. 그때 어머니는 유복자를 가지셨다. 어머니는 내가 어디 있는지 대라며 보안대원들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했다. 다른 사람들이 처형당한 공동묘지로 어머니를 데려갔다. 인민재판이란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고 사형장에 도착한 어머니는 바로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창으로 처형당하는 것을 보았다. 구덩이를 파놓고 어머니를 처형 직전까지 갔다. 여덟 살, 다섯 살배기 여동생은 어머니 살려달고 매달리다 발로 채여 나동그라졌다. 사느냐, 죽느냐하는 경계선에서 어머니의 고초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끝끝내 내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고 모른다며 잡아뗐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어머니가 아이를 가진 것 같다면서 시간을 주자고 제안했다. 곧 몸을 풀 것 같으니 그때 가서 집행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의 여유를 얻었다.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은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보안대원인지도 모른다. 그 길로 어머니는 친척집에 들러 며칠 머물기를 바랐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날 밤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어린 동생들을 걸리고 업고 재를 두개나 넘어 내가 있는 사근다리로 합류했다.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난다는 재를 넘은 어머니. 만약 그때 어머니가 고문에 못 이겨 이실직고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리가 없다.
사근다리
사근다리는 사인교(四人轎)에서 연유된 지명으로 풍수지리로 따지면 지금의 청와대 주차장쯤 비유된다. 왕자산 뒷자락, 산비탈을 일군 밭뙈기와 다락 논에서 얻은 곡식으로 가난을 벗 삼아 살면서도 인심 좋고 피난처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런 사근다리에 변고가 생겼다.
도강김씨 집성촌인 사근다리 한 복판에 변동주가 집을 짓고 울타리를 쳤다. 마을을 가로질러 다니던 유일한 통로가 울타리에 막혀버린 것이다. 막힌 통로가 등기상으론 변동주의 소유였다. 그렇더라도 오래된 길은 함부로 막지 않는 게 불문율로 되어 있다. 그게 우리네 인심이었고 상식이었다.
길이 막히자 사근다리 사람들은 동네를 한 바퀴 빙 둘러 다녔다. 터줏대감 도강김씨네에겐 일본 놈 앞잡이가 같은 동네에서 사는 것조차 눈엣가시처럼 싫었다. 두 집안사람들은 길을 내놓으라, 못 내놓겠다며 시비를 벌이다가 송사를 통해 도로를 확보했다. 그로 인해 두 집안 사이에는 매일같이 으르렁대며 앙금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확천금을 노리던 변동주가 일본에서 위폐기를 들여와 돈을 찍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할 김 씨네가 아니었다. 당연한 절차처럼 신고로 이어지고, 변동주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동네 인심도 그를 외면했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는 변동주를 도왔다. 우선 증거물인 위조지폐기를 옥정호에 버리라 하고, 이 사건은 두 집안의 감정 다툼에서 빚어진 일이라며 재판정에서 변호를 했다. 허술한 변호인데도 하늘이 동주를 도왔다. 변동주는 무혐의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할아버지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참 뜻을 실천한 것이다.
역전, 재역전
할아버지가 사근다리에 인연을 맺은 것은 동학란 때였다. 동학의 접주로 관여한 큰할아버지 때문에 피난처로 선택한 곳이 사근다리였다. 당시 동학봉기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아니라 동학란(東學亂)이었다. 따라서 동학란은 역적행위였다. 그때 사근다리 인근에서 서당을 열고 훈장을 지낸 할아버지와 동주는 동네지기였을 뿐 특별한 인간관계는 아니었다.
광복을 맞자 동주는 더욱 기가 꺾였다. 바뀐 세상에서 말대꾸는커녕 눈 한번 치켜뜨지 못하고 자존심은 있으나마나 했다. 반면 도강김씨 일족은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광복으로부터 6.25가 발발할 때까지 우리나라는 무주(無主)공간(空間)이나 다름없었다. 학습되지 않은 사상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좌우로 편을 갈라 피를 흘리며 싸웠다.
변동주는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좌우세력이 충돌하던 건국 초기에 그의 아들 삼형제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공산당조직에 가담하고, 고향에선 그가 면당위원장직을 맡았다. 6.25가 발발하자 사근다리의 권력은 당연히 변동주가 손에 쥐었다. 앙숙처럼 다투던 도강김씨 김호진은 도시로 달아나 버렸다. 서슬 퍼런 동주의 칼날 앞에 동네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공산정권이 지배할 것 같았던 사근다리에 또 폭풍이 몰아쳤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 전선은 두 동강 났다. 주력부대는 북으로 퇴각을 했지만 패잔병과 빨치산(대부분 전라북도 도당) 무리들은 사근다리로 숨어들었다. 사근다리가 그들의 최후 보루가 되었던 것이다.
빨치산 소년단
빨치산하면 머리에 뿔이 났거나 피부가 붉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목구비가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우리말을 아주 잘 하는, 우리들의 이웃이었다. 일제 때부터 활동하던 "무장 게릴라 또는 유격대"라고 불리는 그들과 6.25 이후 공산주의자를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6.26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지하에서 암약하며 대한민국을 전복할 목적으로 봉기를 일삼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수시로 지서를 포함한 관공서를 습격했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지방에서 좀 괜찮게 산다는 사람들을 매질하고 농락했다. 그럴 때마다 수십 명씩 잡혀와 죽을 만큼 매를 맞고 각서를 쓰고 풀려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근다리에서 만난 빨치산은 광복 이후에 활동하던 자들과 짧은 인공치하에서 활동하던 면당(面黨), 군당(郡黨) 도당(道黨)의 직책을 누리던 자들이다. 산속으로 숨어든 그들은 오랫동안 머리 손질이며 수염을 깎지 못해 산적 같은 행색이었지만, 한 이불 속에서 같이 동거하다보니 이웃집 아저씨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사근다리에서 합류한 우리 식구들은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는 고모 집에서 거처했다. 빨치산에게 밥해 주는 고모를 도와주며 끼니 걱정을 놓았다. 우리 가족은 식량이 떨어질까 봐, 찬거리가 떨어질까 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빨치산들이 먹다 남은 음식만 먹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어디서 누구의 소를 끌고 왔는지, 어느 집 쌀독을 털어왔는지 모른다. 피눈물 나는 남의 재물을 훔쳐다 뱃속을 채우는 일이지만, 일단은 우리 가족의 먹는 문제만은 해결되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를 빨치산 소년단에 가입시켰다. 그때 내 나이는 열한 살이었기 때문에 소년단에 가입할 수 없는 나이었다. 열두 살이나 열한 살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굳이 할아버지가 나를 소년단에 가입시킨 이유를 들라면 우리 가족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고모네 식구와 면당위원장인 변동주의 가족만이 우리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이나 빨치산이 우리의 신분을 눈치 챌 리 없었지만 만사불여튼튼이었던 것 같다.
사근다리 사람들은 나이별로 조직되었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는 소년단에, 열여덟 살부터는 청년동맹, 여성동맹이라고 불렀다. 소년단에서 하는 일은 보초를 서는 것과 연락병 수준의 심부름이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쉬운 일도, 하찮은 일도 아니었다. 사근다리로 들어오는 길목은 홍문(紅門) 동네에서 넘어오는 고갯길과 방성동 재를 넘어오는 북쪽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남동 방향은 옥정호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사근다리에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다.
매일 아침밥을 먹고 나면 소년대원들이 소집되었다. 나는 다른 대원 한 명과 조를 짜서 방성동 재를 넘어오는 사람을 관찰하고 검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리는 옥수수 단을 엮어 만든 움집 형태의 초소에서 대나무를 대각선으로 잘라 날카롭게 다듬은 죽창 하나씩을 들고 보초를 섰다. 어둑해질 때 방성동 고개를 넘어오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방성동 동네를 빠져나오는 인원이 대충 이십여 명쯤 보였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어린 소년들이 어른들을 검문하는 것도 그렇고 검문하는 방식이며 혹시 신분증에 한자(漢字)라도 적혀있으면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막막한 가슴이었다.
한 무리들이 초소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소년단원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정지 신호를 했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은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렸다. 나와 한 조를 이룬 소년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 까막눈이었다. 나는 그들 앞으로 다가서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신분증은 한글로 되어 있어 확인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나를 알아볼만한 사람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설마 내가 그곳에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실로 짠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빨치산 소년단에 가입하고부터 하루도 집에 있지를 못했다. 방성동 동네 입구나, 홍문(紅門) 삼거리에서 보초를 서는 때가 많았다. 길모퉁이마다 2인 1조로 대원들을 놀게 하고 수상한 사람의 움직임을 빨치산본부에 알리는 임무였다. 전투경찰이나 군인을 발견하면 즉시 수신호를 통해 신속하게 알려주는 일이었다. 내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군인이나 전투경찰을 만나지는 않았다. 만약 국군이 빨치산 소탕작전에 돌입해서 내가 놀고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면 당연히 내 수신호가 국군의 생명을 위협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녁 시간에는 대나무를 한 짐씩 짊어지고 빨치산무리들과 함께 왕재봉에 올라 봉홧불을 올리는 일이었다. 그 지방에선 제일 높은 봉우리가 왕자산 왕재봉이었다. 어느 산봉우리에서 봉홧불이 올라오고 안 올라오고를 확인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봉홧불은 같은 시간대에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봉홧불이 올라오지 않는 지역은 국군에게 점령된 지역으로 간주하게 된다. 추운 겨울 늦은 밤에 쌓인 눈을 헤치며 오르내리는 일 또한 쉽지 않았지만, 봉홧불을 올리는 일은 우리 소년들에겐 재미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빨치산 소년단의 임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 한 가지 감출 수 없는 사건들이 있다. 사형집행 현장에 참석해야 열성 당원이 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라도 동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년단원 중에서 열 두세 살은 제외 시켰지만, 그 현장에 동참한다는 것은 끔직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전투나 첩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동정을 살피는 민간인 첩자를 '흰 개'라 불렀고, 전투경찰은 '검은 개', 군인은 '누런 개'라 불렀다. 민간인 첩자나 포로로 잡혀온 군경(軍警)을 취조하고 처형할 때, 그 현장에는 소년단원, 여성동맹, 청년동맹원들이 동참 했다. 참석자들은 마치 적개심에 불탄 열성분자처럼 행동해야 했다. 모두 어깨를 짜고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인민군군가를 불렀다. 군가를 부르다가 사형수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며 독기를 뿜었다. 맨 먼저 최면에 걸린 사람이 앞장을 서고 다른 대원들도 스스럼없이 따라나서 사형집행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소년단
대한민국에서도 소년단 조직이 있었다. 한국소년단 조직은 1922년 10월, 조철호(趙喆鎬)가 구국 청소년운동을 목적으로 중앙고보와 배재학교 학생 8명으로 창설한 조선소년군과, 비슷한 시기에 정성채에 의해 발족된 '조선소년척후대'를 전신으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들은 1924년에 이상재(李商在)를 초대 총재로 추대하고 하나로 통합되었다가 1937년 9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6년 3월 사단법인 대한 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하였다. 그 후 1966년 4월 한국 보이스카우트로 개칭되었다. 빨치산 소년단이었던 내가 성장해서 보이스카우트 지도자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보이스카우트(Boy Scouts)'는 1908년 당시 영국 기병대 장군이던 육군중장 로버트 S. S 배든 포웰 경이 창설했다. 보이스카우트 활동은 야외생활을 기본으로 한다. 전시에는 척후, 정찰을 담당하고 평시에는 야영·수영·항해·등산·동굴탐험 및 카누타기 등의 야외활동을 추구한다. 우리나라에선 초. 중고등학교 특활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와 같은 조직이 순수 군사 목적으로 공산사회에서 호응을 얻었다. 우리가 가끔 북한 뉴스를 볼 때 소년들이 빨간 항건(목에 거는 수건)을 멘 모습을 보아왔다. 그들이 북한 소년단원들이다.
공비토벌작전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으로 대한민국 정규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을 향하고 있었다. 이때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의 낙오병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이들 대부분은 국군과 유엔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일부는 산악지대로 잠적하여 현지의 부역자들과 합세, 비정규 조직을 갖추고 후방에서 국군을 교란시켰다.
1950년 10월경에는 그들의 숫자가 2만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조직에 따라 남부군단, 제526군부대, 인민유격대 남부군단 전북도사단, 전남도당 유격대 및 제주도 인민유격대로 조직되었다. 이중에서 지리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부대가 남부군단(南部軍團)이었고, 순창 회문산 빨치산사령부 산하 조직이 사근다리를 중심으로 거점을 확보한 조직이 '전북도사단'이었다.
국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 합동으로 1950년 10월 4일부터 1953년 5월 1일까지 만 31개월에 걸친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지리산지구에서는 제11사단, 제8사단· 제1사단 등이 세 차례에 걸쳐 작전을 수행했다. 같은 공비토벌작전이라 해도 지역에 따라 수복의 시차가 있었다.
사근다리에 몰려 있는 빨치산 소탕작전은 1951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전방의 8사단 병력을 빨치산 소탕작전에 투입된 후였다. 오뚝이 모양의 사단마크를 기억하기 때문에 8사단 병력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사근다리를 점령하는 사이에 골짜기마다 죽은 시체가 쌓여 갔다. 국군과 빨치산이 치열하게 싸우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멀리 피난 가지 못하고 외딴 집에 머물고 있었다. 국군과 빨치산은 산을 마주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골짜기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돌격을 감행했지만 은폐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우리가족이 피신하고 있는 오두막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양 진영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당했다. 오두막집 벽이 벌집처럼 구멍이 났다. 모두가 엎드려 있는 머리위로 흙덩이가 떨어질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다. 벽에 많은 총구멍이 벽을 통과했는데도 방안에 있던 열 한 사람 아무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어느 날, 빨치산 무리들이 한발 물러나고 사근다리 주변이 조용해졌다. 국군장교 한 사람이 사병 몇 명과 함께 고갯마루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조심조심 그들에게 다가가 우리 가족의 입장을 설명했다.
"우리는 경찰가족이다. 부대가 이동할 때 우리 가족을 데려갈 수 없는가?"
라고 물었다. 할아버지의 간곡한 사연을 들은 그 장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전투 중이고 부상병이 생겨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산악지역을 벗어나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빨치산이 물러났다 해도 언제 역습을 당할지 모를 일이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날 우리 가족이 국군의 보호아래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그 장교로부터 곧 수복이 될 거라는 정보를 받은 것이 큰 수확이었다.
유복자는 태어나고
이틀이 멀다하고 밀고 밀리던 빨치산 소탕작전도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변동주 일당은 김호진의 가족 스물여섯 명을 밤새도록 산으로 끌고 다니며 죽이고 묻었다. 한 동네에서 앙숙처럼 으르렁 대긴 했어도 몇 십 년 함께한 이웃이었다. 그들이 비정하고 잔인한 성품으로 바뀐 것은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그 같은 참사는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빨치산과 변동주 일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근다리를 떠나야 했다. 그들이 떠나던 그날 밤은 몹시 추운데다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빨치산은 동네 사람들을 볼모로 잡고 그 눈길을 헤치며 빨치산 사령부가 있는 순창 회문산으로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어린 동생들과 만삭의 어머니 때문에 우리 가족은 피난행렬 말미에 따라가고 있었다. 사근다리를 벗어나기 전에 우리 가족은 피난행렬에서 멀어졌다. 빨치산 무리들 누구도 우리가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피난행렬에 합류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밤나무 밭 외딴 집으로 우리 가족을 인솔 했다.
할아버지는 호롱에 불을 켜고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구들이 덥혀지고 방안에는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온기가 돌았다. 피난 간 사람들의 땀 냄새가 밴 이불속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 긴장이 풀린 식구들이 곤한 잠에 들려는 순간, 어머니의 괴성이 밤공기를 흔들었다. 어머니의 산고가 시작된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도 어머니의 산고는 진행되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또 한쪽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중이었다. 바깥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유복자는 세상에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시아버지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던 어머니가 소리소리 질렀다. 얼어붙은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울어댔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었고, 할아버지는 구멍 뚫린 대나무살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순간 탯줄에 매달린 유복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생명이 태어나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그때는 내가 잘 몰랐지만, 할아버지의 산후수습은 여느 의사보다 훌륭하셨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의 극한상황에서 벌어진 헷갈리는 인간사를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유복자가 태어나자 눈 덮인 산하는 조용해졌다. 바깥에는 움직이는 생명체가 하나도 없는, 텅 빈 공간을 액자에 담아놓은 것 같았다. 눈 덮인 산하에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짐승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엔 제트기도 뜨지 않았고, 펑펑 터지던 대포소리며 숨 가쁘게 뿜어내던 따발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애타게 바라던 대한민국이 수복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공산당원이며 빨치산인 변동주의 묵인(보호) 하에 가족의 목숨을 구했다. 이런 아이러니를 나는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 가족과 어린 소년은 목숨을 건졌지만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 같은 모진 체험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멈춰버린 생장점
지금 내가 팔십 나이를 앞에 두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본다. 반세기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숱한 사건사고를 겪었다. 4.19학생혁명 때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러놓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군중에게 전선에 배치되어야할 탱크를 광화문 네거리에 몰고 와서 기관총을 쏘아대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동아일보사 담벼락에 붙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5.16군사 쿠데타 때도 구국의 뜻을 품었다며 전선에 있어야할 탱크를 시가지와 대학구내로 진입시켰다. 학생들을 감시하고 대드는 학생들에게 사정없이 총질을 해댔다. 그때는 내가 대학생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해댄 정권도 있었는데, 그땐 내가 직장을 그만 두고 터전을 대구로 옮긴 후였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데는 이데올로기뿐만 아니었다. 자기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해 버리는가 하면, 자기네와 생각이 다르다고 각가지 죄목을 씌워 옥살이를 시킨 경우를 보아왔다. 그러나 그 많은 사건사고 중에서도 내가 겪은 6.25사변의 참화는 어느 사건보다 불행한 사건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우리 집을 불태워 버렸다. 반대세력을 제거한다 해도 건물이 무슨 죄가 있어 불태워 버린단 말인가. 말 못하는 건물에 불을 지르는 화풀이를 왜 했는지 궁금하다. 그때부터 나는 남의 빈집을 전전하며 어린 뼈를 굳혔다. 내가 성장해서 대문에 내 이름 석 자를 걸어놓고도 늘 남의 집 같은 생각에 안주하지 못했다. 내 집인데도 내 집 같지가 않아 항상 마음이 들떠 있었다. 떠돌이가 따로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자리에 안정하지 못하고 역마살에 길들여진 것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6.25전쟁 중에 겪은 그 지긋지긋한 순간들을 나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7~8개월에 불과한 날들이었지만 -긴 세월에서 보면 한 순간에 불과한데도- 그때 그 시간들은 나에게는 백년보다 길고 긴 날들이었다.
설익은 이데올로기도 결국 먹고 사는 문제였다. 그때는 생산 수단인 토지를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거였다. 그들은 토지를 몰수해 놓고도 그들의 이상향을 위해 사람을 제거해야만 했다. 자기네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여 없애버렸다. 사람을 죽여 없애야만 이상향에 도달하는 것인지 묻고 또 묻고 싶다. 하찮은 미물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논하기 전에 사람의 목숨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가 열한 살 적에 겪었던 6.25전쟁의 참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나는 그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까마득히 흘러간 역사의 뒷골목,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던 이야기를 나 혼자 읽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승자는 어느 쪽인지 판가름 나 있다. 이데올로기의 위력이 폭탄보다 무섭다는 것을 그때 이미 실감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야만적인 생각과 잔인한 살생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같은 인간으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문득문득 무섭고 진저리쳐지는 6.25전쟁 참화 속으로 거슬러 오른다. 거슬러 올라가 흘러간 사건들을 지워내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각인되어 있는 사건들은 지워지기는커녕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나뭇가지도 새 움을 틔우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 경우를 본다. 거기에는 분명 그 나름의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나의 생장점(生長點)도 열한 살 그 시점에 멈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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