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골 우체국장…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김성한

| 머리글 |

"내일부터는 자연인입니다.

직위도 벗어놓고, 긴장도 내려놓고, 그간의 설움도 잊고, 정(情) 하나 간직한 채 홀연히 떠납니다.

-중략-

도시의 회색빛 골목길에서, 비좁은 전철에서, 철쭉꽃 피는 산등성이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진정 반가운 눈인사라도 나누었으면… 소망해 봅니다."

온 세상이 꽃불을 켜던 2009년 4월 중순 어느 날, 나는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정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거리에는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가끔 외로울 때마다 바라보던 마을 뒤 멧부리도 어둠에 묻혀버렸다. 배불뚝이 가방 하나를 들고 터덜터덜 역으로 향했다. 철거덕 철거덕! 경부선 열차가 떠나버린 철로 변에는 희미한 가로등이 외로움에 울고 있을 뿐 사위는 적요했다.

그날은 사십 년 가까이 몸담았던 공직(정보통신부, 우체국)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날이었다.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직삼각형체 피라미드를 닮은 조직 틈바구니에서 위아래 사람 눈치 보느라 한 번도 넋 놓고 편하게 웃어보지 못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삐리릭! 휴대전화가 운다. 아내한테서 온 전화이다. 근심 기 가득한 아내 얼굴이 액정화면에 내려앉는다.

새내기 공무원 시절 버스 안에서 무심결에 엿들은 대화가 생각났다.

"우체국은 맑아서…."

군대 시절 고참병(古參兵)은 입술을 실긋거리며 비아냥댔다.

"우체국은 맑아서 싫어…."

맑은 게 왜 싫은지? 그럼 구정물이 좋다는 말인가?

6.25 전쟁둥이인 나는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차를 본 토종 시골뜨기다. 나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이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70년대 초반, 5급 을류(9급) 국가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바닷가 월포우체국에서 시작한 공직 생활. 참 많이도 옮겨 다녔다. 대구에서 서울로, 동두천으로, 천안으로, 다시 대구· 경북으로…. 내 몸에 무슨 역마살 끼가 있는지? 한 열댓 번이나 짐을 싸고 풀었다.

그러다 2000년 여름부터 '우체국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경북 시골 지역을 돌아다녔다. 햇수를 따져보니 일여덟 해나 된다. 그곳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민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말벗까지 되어주는 집배원이 있다. 귀가 먹먹한 할머니들의 고함에도 항상 해맑은 웃음으로 대하는 창구 여직원도 있다. 우체국 건물도 시골스럽다. 회색빛 도로를 굽어보고 있는 높다란 대도시 우체국과는 다르다. 3‧ 4층짜리 아담한 건물로서 정감이 간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시퍼런 들녘이 보이는 곳이다. 이름도 '단샘 골', '복사 골', '선비 골'로서 골짜기 '골' 자가 들어 있는 소도시이다. 직원들도 순박하다. 이런 시골 우체국 생활의 애환을 여기에 그려 본다.

단샘 골에는 단물이 나오려나

그해 여름

2000년 7월,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수은주가 연일 35도를 웃돌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원래 대구는 사방이 산으로 삥 둘러싸인 분지인 탓에 유독 더운 지역으로 이름 나 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말로만 듣던 대구 찜통더위가 실감이 났다.

그날도 더위 때문에 밤새 뒤척뒤척하다가 다른 날보다 좀 늦게 부수수한 얼굴로 출근하니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곧 인사이동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이곳 대구수성 우체국 영업과장으로 발령 받은 지 반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런데 그게 헛소문이 아니었다. 퇴근 시각 무렵 인사 발령 문서가 도착했다.

'행정사무관 김ㅇㅇ, 예천 우체국장에 보함'

왜 하필 예천인가? 그곳은 '외지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은 장사가 안 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텃세 심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지역인데.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직원 수가 백여 명이나 되는 일선 우체국장직을 잘해 낼 수 있는 있을지. 나 자신 이십 대 초‧ 중반 새내기 공무원 시절을 빼고는 우체국 근무를 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우체국 문외한이 아니던가. 정보통신부다, 지방체신청이다. 라는 이른바 기획 부서에서 공문서 더미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온 기형적인(?) 경력이 대부분인데. 직원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일선 우체국장직을 잘 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부터 앞섰다.

발령 당일, 아침 일찍 S 체신청장께 신고하고 점심 때 즈음 예천 우체국에 도착하니 취임 인사를 하라고 했다. 엊저녁 송별식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건네준 술잔에 속은 쓰리고, 오늘 아침에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눈물을 흘리는 여직원도 있었다. 이래저래 산뜻한 기분이 아닌 상태에서 이른바 취임 인사를 했다.

"우체국장 경험도 없고 모든 것이 부족하니 잘 도와 달라고…."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지역에서 신망 받는 반듯한 우체국으로 만들어 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조회 시간이나 회의 때 늘 듣던 얘기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직원들 낯빛을 보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저러다 한 1‧ 2년 지나면 가겠지 뭐…. 앞의 우체국장도, 그 앞의 우체국장도 처음에는 늘 저런 말을 했으니까. 그런가 하면 젊은 우체국장이 왔다고 기대를 하는 직원도 있었다. 나이 쉰을 넘긴 젊은 사람도 아닌데.

여기는 시골이라서

우체국은 국가기관이다. 우체국 직원은 공무원이라는 옷은 입고 있지만,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일반 공무원과는 다르다. 하는 일도 민간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 택배나 예금· 보험 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우체국 업무를 '우정행정'이라 하지 않고 '우정사업'이라고 '사업' 자가 붙어 있다. 물론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익성만 따지지는 않는다. 한 통의 편지를 배달하기 위해 산을 넘고 내(川)를 건너야 하는 보편적 서비스 제공은 물론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공헌 활동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21세기인 지금은 행정 패러다임이 과거의 규제나 지도 감독에서 벗어나 국민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고객 중심의 서비스 경영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우체국이 이 분야에서는 앞장 서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부임한지 그 이튿날인가? 사업 실적을 따져 보았다. 이건 말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대구· 경북 31개 시· 군· 구 단위 우체국 중 맨 마지막 줄에 서 있었다. 수십 가지 항목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앞서 있는 게 없었다. 그 시절 한참 바람이 붙고 있는 택배의 7월 말 실적이 고작 380만 원이었다. 아무리 시골 우체국이라도 그렇지. 전임 지 우체국의 보름치 분도 안 되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물어보니 "여기는 시골이라서…." 쑥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조차 어물거렸다. 앞의 우체국장은 정년퇴직하고, 그동안 우체국장 자리가 한 달간이나 비어 있었다고 했다. 퇴임이 다 되어 가면 누구나 느슨해지는 법이라 이해는 가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어떻게 가닥을 잡아야 할지. 더구나 우체국장의 경험도 없는데.

마중물을 부어야

그나저나 당장 발등에 불인 사업 실적을 올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실적은 환경도 중요하지만 해보겠다는 직원들 마인드가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야 했다. 내가 몸담은 예천 우체국은 팀별로, 읍· 면에 있는 관할 우체국은 국별로 돌아다니면서 속마음을 터놓기로 작정했다. 마을 구석구석을 훤히 꿰뚫고 있는 집배원, 늘 고객들과 마주 대하는 일선 창구 여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 보면 뭔가 나올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한 스무 남은 날을 매일 돌아다녔다. 들르는 곳마다 얘기도 나누고 술잔도 기울였다. 때로는 호소도 했다.

"여러분의 고향인 이 지역 우체국, 꼴찌만은 면해봅시다. 적어도 충절의 고향인 이곳의 자존심이 있는데…." 그러자 몇몇 직원들 반응은 좋았다.

그러나 "저러다 얼마 안 있어 발령받아 가겠지. 실적은 뭐 개뿔. 이 시골 바닥에서 나올 게 뭐 있나." 일부이긴 하지만 직원들의 비아냥거림도 에돌아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럭저럭 두어 달이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졌다. 추석이 임박하면 해마다 상급기관인 체신청으로부터 각 지역 특산물인 우체국 쇼핑물 판매 독려 문서가 내려온다. 매일매일 실적을 체크하며 닦달도 한다. 이때가 일 년 중 세입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정 사업은 국민이 낸 세금은 쓰지 않는다. 특별회계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우리가 벌어들인 수익으로 비용을 충당한다. 그래서인지 일반 행정관서와 달리 경영평가를 받는다. 평가 점수를 잘 받으려면 세입을 올려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 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이 뭐가 있나 알아보니 어느 귀농인이 소백산 중턱에서 재배하는 표고버섯이 있었다. 우선 가격이 2만 원 안팎이어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식품이라 추석 선물로는 제격이었다.

아는 사람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처음 해보는 우체국장인데 직원들한테 체면이라도 서도록 도와줬으면…."

"그것 부탁하려고 명색이 우체국장이라는 사람이 전화하시나…."

가끔은 부탁을 넘어 애걸복걸할 때도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동정심에서일까. 아니면 좋게 말해서 그간 쌓아놓은 인간관계일까. 뜻밖에 많이 사 주었다. 한 5.000여 건이 넘었다.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국장님이 저렇게 많이 하는데 우리는…."

"저번 국장님과는 다르네."

가을이 되면 농촌 지역에는 택배 수요가 많다. 대도시에 사는 자녀들이나 지인들에게 보내는 곡식이나 과일들이 지천으로 쌓여 있다. 이제껏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민간 택배 업체를 이용하고 있었다. 택배 전문 민간 회사들의 마케팅 기법을 공무원 신분인 우체국 직원들이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그냥 있어도 매달 25일이면 봉급이 나오는 데다 경영수지 개선, 고객 만족, 뭐 이런 것 그냥 해보는 소리일 거라는 무사안일의 나쁜 습관이 몸에 밴 탓도 있었으리라. 그냥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도 꼴찌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걱정이었다.

10월 중순 무렵인가? 전 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글씨는 악필이지만 PC로 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쓴 4장의 편지를 전 직원들에게 보냈다.

"우리는 선비의 고장이며 충절의 고장에 살고 있다. 선비는 모름지기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뭐니 뭐니 해도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자존심이 땅에 떨어져 있다. 그 예로 예천 우체국장이 실적 때문에 타 시· 군 우체국장에게 기가 죽어 있다."에 이어 "우리도 실적 올려 받아보지 못한 성과급 한번 타서 호주머니를 채워보자."라는 게 편지의 요지였다.

그러자 직원들 마음이 차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래밭에 밀물이 번져나가듯 행동으로 나타났다. 농산물을 가득 실은 택배 차량이 부르릉거리며 우체국 정문을 드나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땅거미가 담장을 넘어와 우체국 뒷마당을 서성거릴 무렵이면 우체국 뒤란 창고에는 택배 물량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택배 차량이 없는 면 소재지 우체국은 자가용으로 택배 상자를 실어 나르다 고장이 났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어떤 직원은 이제야 일할 맛이 난다고 했다. 당연히 실적 그래프도 상승 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우체국장 사택 옆 늙은 감나무 밑에는 펌프가 있다. 펌프는 사람이 손잡이를 삐걱삐걱 아래위로 움직이면 압력에 의해 땅 속에 묻힌 관을 통해 지하수가 올라온다. 바짝 마른 펌프 위로 물을 끌어 올리려면 먼저 펌프 입에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마중물이 땅 밑으로 마중을 나가야 비로소 물이 올라온다. 지하수는 길눈이 어두운 길치인 모양이다.

순박한 시골 우체국 직원들 마음에 마중물 두어 바가지를 부으니 저렇게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물이 콸콸 나오다니.

우체국장 앞에는 술잔이 없다는데

'이른바 끗발이 센 경찰서장, 세무서장 앞에는 술잔이 많은데 힘없는 우체국장 앞에는 술잔이 없다나.'

우스갯소리이지만 가끔은 들어온 말이고 내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이다.

이곳에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관· 단체장 모임이라는 게 있다. 매월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역의 현안이나 기관· 단체 간에 협조사항 등을 얘기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딱딱함보다는 그냥 한담(閑談)이나 하다가 헤어지는 날이 많았다. 모임 날짜나 장소도 주로 힘 있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이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앉은 자리만 해도 그렇다. 목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고 나는 늘 모서리에 앉았다. 그런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임 약속 시각보다 한 10여 분이나 늦게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때까지는 그냥 기다렸다. 누구 한 사람 왜 늦느냐며 투덜대는 사람이 없었다. 도보로 한 10여 분이면 도착할 가까운 거리인데도 기사 딸린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은 무슨 바쁜 일이 있어 내가 한 10분 늦게 도착했다. 그날따라 일찍 온, 힘깨나 쓴다는 모 기관장이 한마디 했다.

"우체국장이 새로 왔으면 정시에 와야지."

"……"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앞의 우체국장처럼 지각하던지 결석을 하면 이 모임에 빼는 수가 있어."

말도 반말 투였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모임에서 빼고 자시고 한단 말인가? 특정인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모임도 아닌데. 울컥했다. 시골이라 이게 텃세인가. 술잔이 없다는 우체국장이라서 무시하는 건가. 대들려다 참았다.

정년이 다 된 앞의 우체국장은 이 모임에 거의 참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군 단위 큰 행사에도 초청받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나 개인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닌 '우체국장'이라는 이름표 때문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골몰해봤지만 뚜렷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곳에서 교직 생활을 한 30년 정도 하다가 퇴직한 지역 토박이 K 교장 선생님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고충을 털어놓았다. 자기가 돕겠다고 했다. 이 지역에서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른바 유지를 내 편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군수, 도의원, 사회단체장은 물론 퇴직 후 향리에 내려와 쉬고 있는 전직 지방경찰청장, 전직 주일본 공사, 모 대학 학장 등 고위 관료 출신들이 참석하는 모임에 가입했다.

가기 싫은 기관‧ 단체장 모임에도 매월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식사도 타 기관장보다 더 정갈한 음식에다 선물도 마련했다. 말도 품위 있게, 실수가 없도록 매사에 신경을 썼다. 모임이나 행사도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서도 솔직히 회의감이 든 적도 많았다. '꼭 이렇게 아등바등해야 하나, 우체국 일도 많은데. 그러나 이건 내 개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우체국장이란 이름표를 단 죗값(?)이다.'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인가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소위 말발도 전 같지 않았다. 술잔도 자주 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라는 말을 이때 써먹어도 될는지?

우정이와 포돌이의 찰떡궁합

시골 우체국에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이 많다. 전 직원의 절반은 집배원이다. 집배원 대부분은 그 지역 출신으로서 처음 발 들여 놓은 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배달하는 동네도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나이 많은 집배원 중에는 한 마을을 무려 이삼십 년 동안 돌아다닌 사람도 있다. 공휴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 하니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지역 사정에 밝다.

요즈음 시골에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연세가 칠팔십 대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자식들은 도회지에 나가 살고 노인들이 빈집을 지킨다. 그마저도 홀로 어르신이 많다. 눈이 어둡고 귀가 먹먹해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이상한 짓거리를 해도 얼른 감지하지 못한다. 가을이면 농산물을 도둑맞았다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깊이 팬 주름 사이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할머니 얼굴 모습이 TV 화면에 비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난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집배원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지역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집배원들이 있는 줄 몰랐다. 집배원, 그냥 우편물이나 배달하는 뭐 그렇고 그런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그간 주로 중앙부서에만 근무하다가 느지막이 '우체국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런 시골 우체국에 근무한 탓도 있었으리라.

이런 집배원들을 '홀로 어르신 도우미'는 물론 '범죄 예방 도우미'로 활용하면 어떨까? 그러면 이곳 어르신들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2001년 봄이 살며시 고개를 드는 3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담장을 이웃하고 있는 K 경찰서장이 우체국으로 놀러 왔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나른하다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내가 먼저 집배원 얘기를 꺼냈다.

"우리 우체국은 집배원이 많아요. 그들은 이곳에서만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누구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요."라며 우체국과 경찰서가 손을 잡고 홀로 어르신 돌보미나 범죄 예방 도우미 단체를 결성하면 어떨까? 슬쩍 떠보았다. 얼떨결에 꺼낸 얘기라 그런지 K 서장은 창문 너머 산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까지 지그시 감고 상념에 잠겼다. 괜히 얘기했나? 한참을 생각하더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디어 참 좋은데, 우리 경찰과 손잡고 사고(?) 한번 쳐봅시다."

이렇게 경찰서와 손을 맞잡은 '범죄 예방 도우미 봉사 단체' 결성을 위해 대여섯 차례나 실무회의도 가졌다. 이름도 정했다. 우체국 로고인 '우정이'와, 경찰서 '기동순찰대'의 합성어인 '우정이 기동순찰대'라고 지었다.

드디어 그해 5월 지역 주민들을 모셔놓고 발대식을 했다. 대구· 경북 지역, 아니 전국 최초로 우체국—경찰서 간 합동으로 범죄 예방 도우미 봉사 단체가 깃발을 올린 셈이다.

발대식 장면이 지역 TV 전파를 탔다. 많이 알려야 혹시나 이상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겠느냐 생각에 적극적으로 보도 의뢰했기 때문이다. 그 후 우체국 집배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직원들도 독거노인들을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거리에서 만난 지역 주민들로부터 "그 아이디어 참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배원과 경찰관은 궁합도 잘 맞겠어요. 주로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직업이니까요."라는 다소 과분한 소리도 들었다. 그날 이후 그 지역에서 범죄 소리는 듣지 못했다.

'우정이 기동 순찰대', 조금만 넓게 생각하면 큰 힘 안 들이고 지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마음이 훈훈할 때가 있다.

잡지 강매자도 고객인가?

고객만족(CS), 우체국에서는 귀가 닳을 정도로 많이 듣는 말이다.

교육이나 회의가 있어 가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고객만족이다. 하긴 우체국 업무가 택배나 예금· 보험 등 민간기업과 경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서비스기관이기 때문에 고객을 받드는 것은 당연하다. 고객을 왕처럼 모셔야 한다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어느 땐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말이나 월말이 되면 우체국 창구에는 세금이나 공과금을 내러 오는 고객이 줄을 선다. 이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객만족 실태 암행감찰요원. 그의 눈은 창구 직원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어 있다. 웃으며 고객을 맞이하는지? 인사는 제대로 하는지? 영업장 정돈은 잘 되어 있는지? 그들의 복장을 보면 시골 농부나 재래시장에 들르는 아줌마 차림새라 암행점검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한 달 뒤면 공문서가 내려온다. 고객만족 결과 성적. 문서 제목만 봐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번에는 꼴찌를 면해야지. 아니 중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꼴찌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2001년 봄날, 졸음이 엄습하는 오후에 누군가 씩씩거리며 찾아왔다.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우체국장님, 직원들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겁니까?"

목소리가 쩡쩡 울린다. 청사가 떠나갈 정도였다.

우리 직원이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질렀는가?

"예,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사연은 이랬다. 집배원이 우편물 수취함에 넣어둔 우편물이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 있기에 받을 사람이 없는가 싶어 되돌려 보낸 걸 가지고 길길이 날뛰지 않는가.

"그런 직원은 모가지를 날려야 합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자칭 지역유지다. 거들먹거리며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잡지나 생활용품을 강매하는 일명 건달유지(?)다. 며칠 전 잡지를 사달라는 전화를 단번에 거절한 것에 대한 화풀이인 셈이다.

우정 업무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하는 일선 우체국장 처지에서 보면 이런 막무가내 고객이 골칫덩어리다. 솔직히 전화 받기가 겁날 때가 있다. 이러한 사람도 우리가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섬겨야 하는 고객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단물이 나오는 그곳을 떠나다

'첫' 자라는 글자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첫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첫 직장, 첫 월급, 첫 아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경북 북부 지역 단샘 골에 있는 예천 우체국, 나에게는 '첫 우체국장'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직장이다. 처음 올 때와는 달리 세월이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새록새록 정이 붙었다. 좀 더 오래 있었으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2002년 10월, 그날도 한 통의 전화에 이어 인사 발령 문서가 도착했다. 내일 날짜로 경북 체신청으로 발령이 났다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첫 자가 붙어서 그런가? 순간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뜨거운 여름날 느닷없는 발령에 짐 싸들고 헐레벌떡 이곳으로 오던 일. 밤늦게까지 택배 상자 나르느라 땀 흘리던 집배원들의 시커먼 얼굴. 홀로 어르신을 위한 우정이와 포돌이의 합동작전 등등.

마음이 허전하여 우체국 문을 나섰다. 혼자 논밭 사랫길을 걸었다. 시월의 끝자락, 금물결 일렁이는 들녘이 만삭(滿朔)의 여인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논둑에 서서 벼와 눈맞춤을 하고 있었다. 지난봄 겨우내 얼었던 투박한 땅을 갈아엎어 모내기하고, 비료 주고, 김 매주면서 정성을 다해 가꾼 곡식이니 눈맞춤을 넘어 입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일 게다. 곡식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주인의 발소리가 잦을수록 알갱이가 토실하다. 아웅다웅했던 이곳에서의 지난 1년 2개월, 나도 저 농부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다.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잘 가시라고.

'외지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은 장사가 안 된다.'라는 이곳이, 이제는 '단물같이 참 좋구나.'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지어본다.

농심(農心)을 파고드는 복사 골 이야기

2004년도의 잔인한 봄

2004년도 청도의 봄! 운문산 골짜기에도 비슬산 헐티재 자락에도 복사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옛 부족국가 중 하나인 이서국(伊西國)의 남산골에도 맑은 샘물이 졸졸졸…. 그야말로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청도 우체국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지난해 금융 사고에 이어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태풍 '매미'가 심하게 울고 간 때문인가? 복숭아, 감 등 지역의 위용을 자랑하는 과실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 덕분(?)으로 각종 실적은 꼴찌 수준이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어떤가?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생채기로 겨우내 한숨 소리만 진동하다가 이제 겨우 마음 추슬러 논 갈고, 밭 갈고, 복숭아 꽃 따고….

천안에 있는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에서 명색이 교수(교수요원이지만 그냥 교수라고 불렀음)라고 목소리에 힘만 잔뜩 들었던 내가 이런 와중에 청도 우체국장으로 발령받아 왔다.

당시 청도 우체국 업무 실적은 연간 목표대비 달성률이 33%였다. 이는 대구· 경북 31개 시‧ 군‧ 구 단위 우체국 중 28위, 3개월 연속 부진우체국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터라 한가히 복사꽃이나 즐길 형편이 아니었다.

"실적을 많이 올려봐야 이듬해 목표만 많이 내려옵니다."

"이런 시골에서 해봐야 뭘 하겠습니까. 공무원 신분인데 장사치처럼 할 수도 없고…."

직원들도 환경 타령, 신분 타령 등 타령 가(?)만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야 한다. 왜?

조그마한 시골 우체국에서 거창하게 '우정사업 경영수지 개선' 어쩌고저쩌고 가 아니다. 좀스럽게 우체국장이 저 위쪽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산 좋고 물 맑은 청도.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는 도불습유(道不拾遺)의 선비정신이 깃든 청도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한다.

우체국은 커다란 강점이 있다.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에서부터 울릉도를 찍고, 설악산 천불동까지도 갈 수 있는, 그래서 전국을 거미줄처럼 옭아맨 네트워크가 우체국의 자랑 아닌가? 또한, 현장을 누비는 사랑의 전령사 집배원! 그 집배원이 우리에게 있다. 한 지역에서 10년, 20년 근무하여 누구네 집 가보(家譜))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최신(最新), 최고(最高)의 정보맨인 집배원. 집 찾고 주소 묻고 할 필요조차 없는 최적의 Door­To­Door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농산물 직거래인 택배로 끌어들이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정 세입도 늘리고 지역 농가 소득도 올리고. 그야말로 win‒win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

전 직원의 마음을 모아, 모아서…

누이(우체국) 좋고 매부(농민) 좋은 우체국 택배 사업.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직원들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시장을 꼼꼼하게 살펴본 뒤에 공략할 부분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마케팅 이론. 말은 쉽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부딪혀 보는 수밖에.

나는 먼저 전 직원의 마음을 모으기 위한 슬로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궁리 끝에 '지역‧ 주민 밀착 마케팅으로 작지만 강한 우체국 만들기' 일명, '강소 우체국'으로 정했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첫 번째 단계로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전략 등을 담은 사업 설명회를 열었다. 규모나 환경은 비슷하지만, 우리보다 실적이 좋은 인근 C, Y 우체국의 실적을 비교 평가한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호소 작전을 폈다. 은근히 경쟁심도 유발하면서…. 뭔가 모르지만, 직원들 마음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매주 경영전략 회의를 열었다. 이제껏 해오던 간부들만 참석하는 회의 방식을 바꿨다. 간부진은 물론 관내 면 단위 우체국장, 현장 마케팅 직원들을 참석시켜 그들의 진솔하면서도 생생한 목소리도 들었다. 회의 내용도 지난주에 모자랐던 점, 이번 주에 꼭 해야 할 과제 등을 꼼꼼히 따지는 등 진지하고 알차게 진행하였다.

두 번째 단계로 고객인 농민들이 가려워(Need)하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시장 환경 측면에서 청도를 세밀히 살펴봤다. 청도 지역은 복숭아와 감이 유명하다. 전국 생산량의 20% 가까이 생산되고 있다. 이는 참살이(웰빙) 열풍으로 대도시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는 인기 과일로서 해마다 찾는 사람이 쑥쑥 늘어나고 있다. 이를 제때에 판매하기 위해서는 안방에서 주문하고 안방에서 받을 수 있는 택배가 최고라고 판단했다.

1904년에 문을 연 100년 전통의 청도 우체국은 지역 주민과의 친근한 이미지와 더불어 '오늘 발송 내일 도착'의 배송 시스템을 강점으로 내세워 도전해 볼만했다.

그러면 소비자 성향은 어떤가? 청도의 감, 복숭아는 생산량은 물론 품질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과일이다. 이 품질 좋은 과일을 소비자들에게 빠르게 전달하고, 그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선도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답은 간단했다. 생산지인 밭에서 바로 따낸 과일을 택배로 보내면 된다. 택배는 이튿날이면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로 늘 주민들과 얼굴을 맞대는 집배원을 '지역 마케팅 정보담당관'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어느 곳에,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정보를 손에 쥐는 즉시 우체국으로 연락하면, 우체국에서는 바로 출동하는 이른바 Pick-up 체제를 갖추었다. 때마침 상급기관인 체신청에서도 〈집배원 Pick­up 활성화 방안〉이라는 공문이 수차례 내려오던 터라 한번 시동 걸린 엔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뜨거워지는 마케팅 열기, 이심전심인 농민과 우체국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하는 앙증맞은 복사꽃이 7월 중순에는 탐스러운 열매로 변신한다. 추석이 지날 때쯤인 9월 말부터는 어감(語感)부터 특이한 '씨 없는 청도 반시(盤柿)'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는 실적이 오를 리 없다. 이 엄연한 진리를 깨닫고 홍보 팜플렛 6,000매를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의 소비자와 출향(出鄕) 인사에게 뿌렸다. 그 이듬해인 2005년도에는 청도 군수와 청도 우체국장의 공동 인사말까지 동봉하여 보냈다. 군수와 우체국장 공동 추천이니 고향의 맛을 즐기면서 품질을 믿어 달라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놈이 번다.'라는 식의 중간 마진 때문에 농촌 지역에서도 생산자—도매상—소매상—소비자의 다단계 판매로는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대도시 아는 사람을 통하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만드는 등 자체적인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농가는 우리의 믿음직한 택배를 이용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효자상품인 셈이다.

우리 우체국에서는 농산물이 쏟아질 때마다 자체증간 기간을 마련해 열을 올리고 있다. 7~8월에는 복숭아, 9~11월에는 청도 반시, 12~2월에는 감 말랭이다. 그것도 모자라 2005년부터는 화학산 지하 250m 암반수를 먹고 자란 한재 미나리를 추가하여 2~4월에 판매했다. 1년 중 5~6월 두 달을 빼고는 연중 차례차례로 증강 기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자체증강 기간을 두는 이유는 뻔하다. 계절별로 홍보 전략, 목표 배정, 마케팅 소요 물품이 모두 다른 점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해냈다. 대구· 경북 찍고 전국 최고로

이렇게 계절에 따른 특산품을 마련하고 열심히 뛴 결과, 2004년도에는 우체국 택배 수수료 연간 목표 2억 9,000만 원 대비 4억 5,000만 원을 달성했다. 이는 달성률 138%에 전년도보다 58%나 늘었다. 대구· 경북 우체국 중 1위를 달성했다. 2005년도에는 더했다. 연간 목표 달성률 179%를 이루어냈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63.8%가 늘어 2위인 S 우체국과는 달성률이 무려 48%나 앞선 지존의 1위 자리를 굳혔다.

또한, 농산물 직거래 판매 실적은 어떤가? 2004년에는 13억 원, 2005년에는 20억 원을 기록했다.

2005년 7월 1일, 우정사업본부 출범 기념식 자리에서 청도우체국이 '마케팅 우수사례 전국 금상'을 받았다. 2006년 2월에는 '우체국 택배 최우수 관서'로 뽑혀 우승기를 휘날리기도 했다. 그보다 더 짭짤한 것은 그해 경영평가를 1등급 받아 150%나 되는 특별 상여금이 직원들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기적(?)이었다. 그 당시 모 방송국 TV에 '신화창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끼리는 신화창조가 아니겠는가. 인구 5만 미만의 고령자가 많은 농촌 지역에다 우체국 규모 또한 시‧ 군 단위 우체국 중, 뒤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빠른 작은 우체국에서 드디어 해냈다. 대구· 경북을 찍고 전국 최고로.

'강소 우체국' 만세다. 아니 '펄떡이는 우체국' 만만세다.

우체국 택배 '일석삼조(一石三鳥)'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은 청도 반시가 뭉텅이로 쏟아진다. 이때쯤이면 우체국도 택배로 정신이 없다. 일선 창구 직원을 제외하고는 전 직원이 동원된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면 더하다. 온종일 거두어들인 반시 사오천여 상자를 4.5톤 트럭에 실어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그 시각이면 배가 고프다. 미꾸라지는 한 마리도 들어가지 않은 그 유명한 '청도 추어탕'을 시켜먹으며 짐 싣기 작업을 한다. 차도 배가 고픈지 덩달아 부릉부릉 소리를 낸다. 우체국 뒷마당이 마치 추석 대목 장터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대구· 경북에서 이름깨나 있는 매일신문 J 기자가 왔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취재 차 왔다고 했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허허~ 허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돌아갔다. 물론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했다.

그 이틀 후인가 경제면에 기사가 났다. 한마디로 대문짝만하였다. 여기에 옮겨본다.

우체국 택배 '一石三鳥'

▣ 농민들 특산품 판매 걱정 털고…

▣ 소비자는 신선한 상품 싸게 사고…

▣ 수수료 수입 4억5천만 원 기록…

옛날 통신이 발달하기 전에 편지와 부고 등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우체국이 이젠 농산물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변해 농가소득 증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근래 들어 농민들이 우체국 택배를 이용, 농산물을 파는 게 일상화하면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청도반시' 출하가 한창인 청도에서는 요즘 우체국을 통해 하루 10kg들이 4천~5천여 상자, 4.5t 트럭 13대 분량이 전국 소비자에게로 팔려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우체국의 일상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면서 우체국장을 비롯해 집배원까지 총동원돼 밤늦도록 야근을 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우체국 가족들은 지역의 특산물을 소비자에게 싼값으로 공급하면서, 농가소득과 우편 수입을 동시에 올릴 수 있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생각에 흥이 절로 난다.

청도지역 우체국은 지난해 6월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등기·소포 취급 실적 연간 목표치의 33% 수준에도 못 미쳐 경북의 31개 총괄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었으나 올 들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국 생산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감과 18%인 복숭아를 비롯해 웰빙 열풍으로 인기가 높은 '한재 미나리' '운문산 토마토' 등을 계절별 전략상품으로 선정, 출하시기에 맞춰 출향인사 6천여 명을 대상으로 배달홍보 활동을 벌인 결과 연말 판매실적이 전년도보다 2억3천400만 원이나 늘었고, 올 10월 말 기준 20억 원의 판매고에 수수료수입 실적만 4억5천536만 원을 달성했다

—중략—

청도우체국 김ㅇㅇ 국장은 "직거래 판매로 중간마진의 거품을 제거하고 '당일 접수, 당일 발송'으로 농산물의 신선도 유지에 신경 쓴 것이 우체국 택배를 정착시키는 원동력이 됐다"라며 "신뢰를 바탕으로 우체국이 지역 농산물 물류센터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땀 흘린 직원에게는 팀별, 개인별 업무실적 마일리지제를 도입해 평가결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매일신문, 2005.11.16.〉

우체국장이 얼마나 빡세게(?) 일을 시키길래

복숭아 수확은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이 최절정기이다. 복숭아밭이 많은 관내 화양 우체국은 이때가 연중 가장 바쁜 시기이다. 복숭아 택배 상자가 우체국 뒷마당에 한가득 쌓여 있다. 이 우체국은 사설(私設)인 별정 우체국으로서 직원이 네 명밖에 안 된다. 여직원은 창구에 앉아 고객들을 맞이해야 하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복숭아 택배 상자를 거둬들이는 일은 뒷자리 L 사무장 몫이다. 사무장 혼자 하루에 10kg이 넘는 복숭아 상자 600여 개를 실어 나른다. 그것도 널따란 도로가 아닌 조붓한 논밭 사랫길을 차를 몰고 다닌다.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복숭아 상자를 들어 올리다 보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하루에도 두어 차례 옷을 갈아입는 것은 보통이다. 저녁 늦게 복숭아 상자를 운송 차에 실어 보내고 뒷정리를 하다 보면 밤 10시가 넘어야 하루 일이 끝난다. 그 시각이면 몸이 파김치가 된다. 더구나 L 사무장은 5학년 6반의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할머니 목소리였다. 대뜸 한다는 말이 "우체국장이 얼마나 일을 빡세게 시키길래…. 할아버지 제사에도 참석 못 할 정도입니까?"였다.

사연을 알아보니 L 사무장이 퇴근 후 하도 고단하여 한숨 자고 제사에 참석한다는 게 그만 곯아떨어져서 조부 제사에 못 갔던 모양이었다. 사무장의 큰 어머니 되는 분이 화가 나서 나에게 걸려온 항의 전화였다. 나로서는 무척 미안하고 한편 고맙기도 해서, 며칠 후 L 사무장을 '바다 횟집'으로 불러 소주와 함께 한 점의 회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높은 사람한테 차 한 잔도 대접 못 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청도에는 감이 지천이다. 열차를 타고 가다 창밖을 내다보면 산비탈 감 밭에는 빨간 알전구 같은 홍시가 조롱조롱 달려 있다. 이른바 씨 없는 감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씨가 있는 감나무도 이곳에 옮겨 심으면 씨가 없어진다는 이상(?)한 감이다. 당도가 높고 알도 그다지 굵지 않아 한입에 쏙 들어간다.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이 지역 명물이다.

감이 빨갛게 익어갈수록 우체국도 덩달아 바빠진다. 평소에는 서너 대에 불과한 택배 차량이 다섯 배가 넘은 스무 남은 대로 불어날 때도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2005년 가을 어느 날, 감 택배 상자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 저녁 무렵이었다. 검정 세단이 우체국 뒷마당으로 들어왔다. K 체신청장이 오셨다. 높은 사람이 일선 우체국을 방문하려면 사전에 전화통에 불이 나는데,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오시다니….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청장님, 3층 제방으로…."

말도 채 끝내기 전에 손사래부터 치셨다.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현장을 보기 위해서 혼자 나오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직접 택배 상자를 차에 싣지 않는가.

택배는 배송 시각이 정해져 있다. 정해놓은 시각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이튿날 고객이 받아보지 못한다. 택배 상자를 차량에 싣는 저녁 무렵이면 전화조차 받을 겨를이 없다. 촌각을 다툰다. 그렇다고 높은 분이 오셨는데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우왕좌왕하다가 차 한 잔도 대접하지 못했다. 오지게 밉상이 들었으리라.

그 이튿날 오전, K 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허허! 웃으시더니 "김 국장, 고생이 많소. 내가 언제 밥 한 끼 살게요." 높은 분에게 차 한 잔 대접 못 한 죄(?)가 사면되는 순간이었다.

무서운(?) 우체국장 복사 골을 떠나다

나는 90년대 끝자락부터 10년 가까이 ㅇㅇ우체국장, ㅇㅇ과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옮겨 다녔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다소 억울한 소리를 들었다. 새로 오는 우체국장(과장)은 무섭다는데…. 피도 눈물도 없다는데….

2004년도 이곳 청도 우체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였다. 새로운 우체국장이 오면 사전에 뒷조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부임을 해보니 모두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번에 새로 오는 우체국장은 원칙과 기준만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다." "우리는 이제 피 흘릴 일만 남았다."

마음이 유난히 여리고 겁이 많은 L 과장은 이제는 죽었다며 큰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두세 달이 지나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자 "아직 더 기다려 보자. 아마 쇼(show)를 하고 있을 거야. 얼마 안 있으면 본성이 드러나겠지."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서로 간에 오해가 풀려서 들은 얘기였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아마도 사전 뒷조사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는 무섭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우선 인상부터 그렇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 짱구 형 대머리에다 짝짝이 눈, 축 처진 볼까지 충분히 그러하리라. 거기에다 말투까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다. 무릇 사람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좋아야 한다는데. 나는 신언(身言)부터 별로였으니 할 말은 없다. 성격도 외골수다. 좋게 말해 교과서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가끔은 윗사람 비위도 맞출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영 젬병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귀어 봐야, 나아가서 같이 한솥밥을 먹어봐야 그 속내를 알 수 있다지 않은가?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슬픈 노래나 시(詩)라도 한 소절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남자는 일생에 두 번만 운다는데….

가끔이지만 나보다 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지위가 높다고, 끗발 있는 자리에 있다고 부당한 방법으로 누르거나 압력을 가하면 강하게 반발한다. 한마디로 강한 사람에는 강하고 약한 이에게는 약한, 이른바 '강 강 약 약'이다. 층층 계단 같은 공무원 조직에서 윗사람에게 적당히 알랑방귀도 뀌고, 알고도 그냥 모른 체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승진이나 자리 배치에서 손해 볼 때가 많았다.

2006년 11월, 청도 반시가 빨갛게 익어갈 때 나는 복사 골을 떠났다. 떠나는 날 손을 흔들며 우는 직원도 있었다. 처음 올 때와는 달랐다. 가는 곳은 선비 골 영주이다. 그곳에서도 무서운 우체국장이 온다고 긴장할까? 비록 울퉁불퉁 무섭게 생긴 얼굴이지만 웃으며 들어서야지.

시(詩)와 묵향, 선율이 흐르는 선비 골

고객의 마음을 훔치려면

'우체국'이라는 단어는 시심(詩心)이 샘솟는 장소인 모양이다.

국민 시인 격인 유치환님의 '행복', 향토 출신 안도현님의 '바닷가 우체국'과 '우체국 사람들', 이수익님의 '우울한 샹송'에도 우체국을 소재로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2006년 늦가을, 나는 영주 우체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부임 첫날, 우체국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곳이 1층 영업장에 마련된 상설 무대였다.

영주 우체국은 경북 북부 맨 위쪽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오래된 우체국이다. 1905년에 문을 열었으니 100년이 넘었다. 그러나 청사는 날렵한 현대식 4층 건물이다. 2004년도에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 고객들이 드나드는 1층 영업장은 다른 우체국이나 은행 등에 비해 널찍하다. 영업장 한쪽은 1, 2층이 뚫린 특이한 형태의 복층 구조로서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무대 중앙에는 HD 텔레비전과 홈시어터 시스템으로 구성된 오디오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지방 소도시에는 문화 예술 공간이 부족하다. 제대로 된 전시장 하나 갖춘 기관이나 단체가 많지 않다. 대도시에는 은행의 PB Zone, 이동통신업체의 IT Zone 등 자체 시설 공간을 활용한 문화 마케팅으로 고객들 마음 끌기에 여념이 없지만, 이곳 영주에는 그런 시설을 마련한 곳이 거의 없다. 그 당시 서울 광화문 네거리 KT 회사는 자체 문화 공간에서 상설 음악회를 열어 고객들 눈길, 발길을 붙잡아 맨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금싸라기 같은 땅에 문화 공간을 마련하다니.

찜통 같은 여름이 되면 더위를 식히려고 딱히 볼일도 없으면서 우체국에 오는 노인들이 많다. 그분들은 고객 쉼터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땀이 식으면 돌아간다. 이곳에 고객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마련하면 어떨까?

어느 날 아침 간부회의 자리에서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 봤다. 모두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바빠 죽을 지경인데 무슨 문화 이벤트냐는 표정이었다.

"문화 행사! 그것은 고객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품격 높은 고급 마케팅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이나 하는 지인(知人) 마케팅, 호소 마케팅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솔직히 나도 다른 우체국장처럼 조용히 있다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

"이런 행사로 고객들이 좋아하면, 꼴찌 언저리에서 맴돌던 우리 우체국 고객 만족(CS) 성적도 덩달아 좋아질 것 아닙니까. 우체국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요."

"예 그 말씀은 맞습니다만…."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시작한 문화 행사, 두 달에 한 번꼴로 치렀다. 「압화(押花) 전시회」,「도자기가 있는 풍경」, 미술을 사랑하는 「미·사·모 회원 전시회」,「한지 공예 작품 전시회」 등 이름도 색달랐다.

2007년 5월에는 제법 큼지막한 행사를 치렀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소백문화 이벤트」라는 이름으로 우표· 서예 전시회와 가훈 써주기 행사를 벌였다. 이 지역 우표 수집가들이 오랫동안 정성스레 모으고 정리한 한 장 한 장의 우표가 영업장에 전시되던 날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는 가훈 써주기였다. 시골이라 누구나 가훈 하나쯤은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인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 서예 협회 초대 작가 세 분이 온종일 허리 펼 틈이 없었다.

"우체국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묵향이 배어 있는 가훈을 받아 쥐고 우체국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는 낯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닷새 동안 치른 문화 잔치, 생각보다는 성과가 좋았다. 지역 신문은 물론 TV 방송에도 나왔다.

고객의 마음을 훔치(?)려면 가끔은 엉뚱한 일도 벌여야 하는가 보다.

시(詩) 맛 당기던 4월의 밤

온 세상이 꽃불을 켜던 2007년 4월 어느 날 밤이다.

그날은 영주 우체국 1층 로비에서 시(詩) 낭송회를 열었다. 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무대 위에는 개나리, 복사꽃, 진달래가 열(列) 지어 서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한 채 서 있는 꽃들을 보니 어릴 적 고향 마을 뒷집에 살던 '꽃님이' 누이가 떠올랐다. 봄이면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들녘을 쏘다니다가 꽃만 보면 볼우물을 파며 배시시 웃어대던 누이였다.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불빛 한 줄기가 봄꽃 얼굴을 어루만지자 꽃님이 볼처럼 금세 불그스름해진다.

우체국 창문 너머로 어둠살이 푸슬푸슬 내리기 시작하자 한 번쯤은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우체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시심(詩心) 가득한 얼굴에는 시(詩) 꽃이 활짝 피었다.

드디어 사회자의 오프닝 멘트곡인 '대니 보이(Danny Boy)'가 감미로운 트럼펫 선율을 타고 4월의 밤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객석 어디에선가 와와! 하는 함성도 들린다. 꽁지머리에 한복을 입은 늙은 시인이 무대 위로 올라서자 장내는 정적에 휩싸인 듯 고요하다. 옆자리 대머리 시인은 침까지 꼴깍 삼킨다. 시 구절 끄트머리를 살짝살짝 올리면서 읊는 서울 신사의 낭랑한 목소리 또한 시 맛을 새롭게 한다.

이윽고 내 차례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일곱 색깔 무지개 풍선으로 치장한 마이크 앞에 선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린다. 이런 자리는 난생처음이다.

우체국 사람들

안도현

햇볕 좋은 날 /우체국 사람들은 햇볕을 모아서

세상이 어두울 때 나누어 줍니다.

비가 오는 날 /우체국 사람들은 빗물을 모아서

세상이 목마를 때 나누어 줍니다.

우체국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따뜻해지고 촉촉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으로 모였다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이유는

우체국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중간 울렁증이 있었지만 박수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무대를 내려오자 꽃다발 하나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시에 빠지고 선율에 취하던 그 날 밤, 시(詩)맛 당기던 4월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그 몇 년 후에 나는 퇴직을 했다. 참으로 묘하다. 그때 그 사건(?)이 은퇴 후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내 마음을 누그러뜨릴 줄은 미처 몰랐다. 나이를 먹으면 잘 삐친다는 삐침 병 치료에는 한 줄의 시 낭송이, 한 소절의 가곡이, 한 장의 원고지가 참으로 효과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아가 노년이 되어도 가시지 않는 욕심 병에도, 미움 병도, 심지어 가슴앓이 병에도 특효가 있을 것 같다.

시의 행간을 목소리로, 눈으로 밟을수록 마음의 행간도 따라 흐르는 시 낭송, 어쩜 인생 낭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나는 우체국

지역 주민들에게 우체국이라는 이미지는?

고객들에게 머리 숙이며 봉사하는 기관이다. 힘이 없는 기관이다. 큰 소리 치지 않는 조용한 곳이 우체국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민간기업과 경쟁하는 우체국이 그냥 조용해서야 되겠나. 물론 쓸데없이 소리만 요란한 것은 안 하느니보다 못하기는 하다. 내공이 쌓여 있는 가운데 '소리 나는 우체국'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새해가 밝고부터는 나는 8천 명이 넘는 사람이 검색하고 있는 지역 인터넷 신문과 한 달에 네댓 번 나오는 지역 신문에 수시로 칼럼, 독자투고의 형식으로 글을 보냈다.

여기 2007년 늦가을, 지역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 하나를 옮겨본다.

우편물류 시스템(Post net)을 통한 지역 브랜드 농산물 판매에 대한 단상(斷想)

김ㅇㅇ 영주우체국장

21세기는 디지털 경제시대의 본격화로 접어들었다고 보아도 넘친 말은 아닐 것이다. IT(정보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확산은 전 세계를 시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로 연결하는 동시성을 지니게 한다.

더불어 등장한 인터넷은 가장 효율적인 네트워킹 수단으로서 실물경제와는 다른 e-commerce(전자상거래) 라는 사이버 경제 공간을 창출하고 있고, 질 또는 양적인 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또한, 디지털 경제시대에서의 소비자의 특징은 고객의 needs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개인별 맞춤 형태의 여러 가지 품목인 동시에 적은 주문(다품종 소량주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소비자들은 원하는 물품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운송할 수 있는 물류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수단이 Door to Door(택배)이다.

지금 농촌 지역에는 인구가 급속하게 줄고 있어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구를 늘리는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대도시로 떠나고 연세가 많은 분이 남아서 거주하고 있는 고령 인구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미 FTA 체결로 지금까지 정성스레 가꾸고, 일궈놓은 우리들의 입에 맞는 신토불이 농산물이 하루아침에 설 자리를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다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모 지역에서는 자치단체 등과 손잡고 대도시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고 눈길을 끄는 자체 브랜드의 농·특산물을 개발해서 "FTA야 멀리 가라"라는 희망적인 기사도 가끔 본다.

어느 지역마다 우수한 농 특산물은 있다. 이 지역에도 풍기인삼, 당도 높은 사과와 포도 등이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 브랜드 농산물이다. 그러나 생산자–소비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소비자 입맛에 맞는 농산물을 생산해 놓고서도 원하는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판로망이 없거나 부실하다는 데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시장개척단, 투자유치팀 등 TF 팀을 구성, 직접 판로망 구축에 나서는가 하면 대도시 상설 장터 마련 등으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판매방식도 아직까지는 생산자-도매상-소매상-소비자 등 다단계 구조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어 중간 마진을 제외하면 생산자의 소득은 얼마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최근의 디지털 경제로의 급속한 전환은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고, 인터넷을 통한 e-business는 단순하게 인터넷으로 물건을 판매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기존의 유통망에 더해진, 단순한 유통경로라고 볼 수 없는 가히 새로운 형태의 물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 브랜드 농산물의 판매방식이 인터넷을 이용한 생산자-소비자 직거래 방식으로 보편화 된다면 생산자, 소비자 서로가 상생(Win-Win)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일 것이다.

실례로 필자의 전임 근무지인 C 지역의 경우 복숭아, 감 등이 주산물로서 전자상거래를 이용하여 상자 당 적게는 2,000원, 많게는 10,000원까지 부가이익이 발생한 경우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우정사업본부의 우체국은 대도시는 물론 도서 낙도, 산간벽지 등 전국적으로 3,600여 개 점포가 거미줄처럼 산재해 있고, 또한 지역 실정에 밝은 집배원(16,000여 명)들이 매일 고객들과 접하고 있어 하드웨어적인 물류 인프라는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실시간 추적이 가능한 우편물류시스템(Post net)과 다음날 배송률 95% 이상 달성 등으로 고객들의 만족지수도 높아 한국산업고객만족도(KCSI) 평가결과 택배산업부문 4년 연속 1위 달성 발표를 보면 소프트웨어적인 분야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브랜드 농산물 판매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유 브랜드 인지도를 높임과 동시에 자체 홈페이지를 직접 개설 또는 지역마다 통합하여 개설하거나 우체국쇼핑(www.epost.go.kr), 우체국 장터에 가입하여 알리는 등 다채널 적인 유통망을 확보하여 안방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생산자–소비자 직거래 판매 방식만이 열악해지는 농촌경제를 살리는 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사·모

직장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에게는 퇴근 후 뒷골목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는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치받고 올라오는 아랫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한때 내가 상사로 모셨던 L 청장의 술자리 단골 메뉴는 "술꾼이 일꾼이지."였다. 사무실에는 차마 하기 어려운 얘기도, 가슴 답답한 속앓이도 술잔이 몇 순배 돌고 얼굴이 불콰해지면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끄집어내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쉬운가 보다. 그 옛날 '요정 정치'라는 말의 이치도 이와 비슷하였으리라.

2008년 어느 봄날, 졸음이 눈꺼풀 위로 내려앉는 오후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입 언저리에 묻은 침을 닦고 자세를 바로 한다. 창구에 근무하는 여직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김 대리였다.

"국장님 오늘 저녁 '알·사·모' 모임이 있는 데 참석 해주이소."

"알·사·모라…. 그러지요. 뭐."

다행히 그날은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 아내도 서울 아들네 집에 가버려 사택에서 혼자 밥 해먹어야 하는 신세이다 보니 내심 반가웠다. '알·사·모' 모임이니 '알짜를 사랑하는 모임'으로서 건전한 모임이려니 기대를 하고 참석했다. 장소도 이름에 어울리는 제법 그럴듯한 곳인 줄 알았다.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허름한 뒷골목에 있는 돼지국밥집이었다. 그나마 남자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여직원만 열댓 명 정도 있었다.

이윽고 회장인 김 대리의 건배사가 있었다.

"알코올을 사랑하는 우리 알·사·모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깔깔!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알·사·모가 알코올을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더구나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얌전하던 여직원들이 술을 먹기 위한 모임이라니. 그러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로서로 치켜세워 주었다.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을 보듬어 주기까지 했다.

이곳에 모인 여직원들은 일선 창구에 앉아서 예금이나 보험, 우편물을 접수하는 직원들이다. 온종일 고객에게 시달리는 이른바, '감정 노동자'이다. 요즈음은 세태가 '돈이 최고다'라는 황금만능의 시대라 그런지, 돈 몇 천만 원만 맡기러 와도 유세가 대단하다. 반말은 기본이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등 이율이 낮다는 등 사람들을 들들 볶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날은 회장이 주선하여 이른바 '번개 팅'을 한다고 했다.

다른 우체국 여직원들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직행하는데…. 여기는 왜 그럴까? 이곳은 소백산 자락이라 때가 덜 묻은 순수해서 그런가? 아니면 농촌 지역이라 서로서로 껴안아 주는 이웃사촌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는 걸까?

그러나 해답은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모임이야말로 진정 '알짜를 사랑하는 모임'인지도 모른다.

'이 대팔' 그 남자와 이 대리

'이 대팔' 그 남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산 그림자가 우체국 창문을 어루만지는 오후 5시 즈음이면 어김없이 우체국에 나타나던 그 남자가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 '이 대팔'로 통하는 그 남자는 이틀이 멀다고 우체국에 들렀다. 전에는 이렇게 자주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들렀다. 그런 그가 '이쁜이' 이 대리가 우체국 창구에 근무하고 나서부터는 매일같이 얼굴을 내밀었다. 옷이나 머리 매무새도 전과는 달랐다. 늘 허름한 잠바 차림에다 수세미처럼 너저분한 머리가 아니었다. 까만 양복 차림에 머리는 이른바 2대8 가르마로 얌전하게 빗어 넘겼다. 옆자리 여직원 앞 창구에는 손님이 텅 비어 있어도 바쁜 이 대리 앞으로만 가서 볼일을 봤다. '화이트데이'인가? 무슨 기념일에는 이 대리에게 꽃도 건넸던 모양이었다.

이 대리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 우체국으로 발령받았다. 그녀는 키가 훤칠하고 얼굴도 갸름하다.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몸매도 샤방샤방하다. 나이도 스물일곱인가? 이십 대 후반이다. 거기에다 잘 웃는다. 웃으면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게 바라보는 총각들 마음을 녹일 정도였다.

"국장님, 우리 애가 나와 떨어져 지내는 게 이번이 처음이니…. 딸내미같이 잘 보살펴 주이소."

발령 첫날, 이 대리 어머니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키운 딸내미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날아갈 듯 좋았는데,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 갈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냥 사는 집 근처 우체국으로 발령받는 줄 안 모양이었다. 하긴 부모 마음 이해는 간다. 요즈음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불면 날아갈까 고이고이 키운 자식 아니던가. 그것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기는 처음이라, 험한 세상에 혹시 사고라도 나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은 생각보다는 좋은 곳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고개 숙이며 인사는 하지만 어쩐지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어머니 염려와는 달리 이 대리는 직장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요즈음 젊은 사람답지 않게 험한 일도 곧잘 했다. 아침이면 남 먼저 출근해 사무실 청소를 했다. 자기 책상은 물론 객장이며 고객 응접실까지 말끔하게 걸레질을 했다. 붙임성도 있었다. 고객한테는 늘 웃으며 대했다. 시골이라 귀가 어두운 할머니들이 와서 엉뚱한 말을 해도 얼굴 한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아침마다 하는 고객 만족(CS) 교육도 이 대리가 앞장섰다.

그런 이 대리에게 이 대팔, 그 남자의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이렇게 총각 선생님 마음을 도둑질한 이 대리가 어느 날 발령이 나서 대구로 가버렸다. 떠나는 날 이 대리는 울면서 우체국 문을 나섰다. 첫정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라고 버스 정류소까지 배웅을 해주는 직원도 있었다.

그날 저녁 내내 직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오후면 나타날 이 대팔, 그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간 큰 남자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

2008년 1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고 어수선할 무렵 어느 고위공무원이 한 얘기였다.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니….' 공무원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릴 적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 누군가 "군인하고 사람하고 가네."라고.

물론 그 양반도 공무원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하진 않았을 거다. 될 수 있으면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되 조직 목표에 맞게 행동하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공직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가끔은 계급이 인격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우체국장은 회식 자리에서 그냥 앉아서 술을 따라주는 계장급 여직원에게 "계장 주제에 무릎 꿇고 따라야지 앉아서 따라…."라는 소리에, 그 직원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서러워 많이 울었다는 슬픈 얘기도 생각난다.

내가 아는 모 우체국장은 직원들 회식 자리에 번번이 부인을 대동하고 온다고 했다. 자리도 가운데인 우체국장 옆에 떡 버티고 앉았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 부인은 자신을 부국장 정도로 착각하지 않았을까? 직원들은 육법전서에도 없는 괘씸죄(?)에 걸리지 않으려고, 국장 부인에게 무릎까지 꿇고 술을 따라 바치는 꼴이란….

나는 가끔은 직원들로부터 원망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들었다. 직원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사택에 혼자 우두커니 있을 아내를 불러내어 같이 식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절해버려 "참 매몰차다."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근무했던 우체국은 사택이 우체국 담장 안이거나, 우체국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물론 아내도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들은 아내의 얼굴을 몰랐다. 하다못해 예금통장이라도 갖고 우체국 창구에 나타나면 알 터인데, 통장은 몽땅 내가 관리 하였고, 우체국에는 얼씬도 못하게 금족(禁足)령을 내렸으니. 아내 입장에서는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으리라.

그 후 직원들 사이에서 붙여진 내 별명은 '간 큰 남자'였다고 한다. 그것도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들은 얘기다.

맥가이버 이 대리

2007년 가을, 그날은 집배원을 채용한다고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달랑 한 명을 뽑는데도 여 남은 사람이 응시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부터 가정주부,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 등 말로만 듣던 취업난을 눈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수험생들 얼굴이 바짝 굳었다. 한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얌전하게 면접관 앞 의자에 앉는다. 얼굴은 시커멓고, 남들처럼 때깔 나는 양복도 입지 않았다. 그 역시 떨리는지 건장한 몸매에 걸맞지 않게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면접관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했다. 그냥 책에서 보았거나 누군가로부터 주워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대답이 아니었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최종 테스트 결과 그 사람이 합격했다. 그날부터 호칭도 그냥 '이ㅇㅇ 씨'에서 '이ㅇㅇ 대리'로 바뀌었다.

이 대리는 소백산 자락 산골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논밭이라고 해봐야 계단식으로 된 다랑논과 비탈밭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그러하니 아예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공구(工具) 제조 회사에 취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직업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남에게 봉사하는 집배원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것도 대도시 집배원이 아니라, 산을 넘고 내(川)를 건너야 하는 시골 우체국 집배원이 되고 싶었단다.

그는 젊은 나이 때부터 쇠 다루는 일을 해서인지 헌 기계 고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우체국 창고에 처박혀 있는 고장 난 전자제품이나 허름한 물건 등도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말짱하게 새것으로 변했다. 털털거리는 오토바이도 공구 몇 개로 쌩쌩 달리게 만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직원들 사이에 '맥가이버 이 대리'로 통했다.

그가 배달해야 할 구역은 강원도 오지도 울고 간다는 소백산 고치령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말이 떨어져 죽을 정도로 계곡이 깊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마락(馬落) 마을'이 있다. 이 대리는 일부러 그런 오지 마을을 자원했다. 산골 마을에는 대부분 연세 많은 노인이 살고 있다. 그분들의 집은 오래된 슬레이트집에다 문짝도 낡았고 벽도 허술하다. 이러한 곳이 맥가이버 이 대리에게는 적격이다. 우편물 배달 틈틈이 고장 난 수도며, 전기설비 등 온갖 잡다한 것을 고쳐주었다. 이 대리는 이런 일을 하면서도 얼굴 한번 찡그리는 걸 보지 못했다. 늘 웃고 다녔다. 어르신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이 즐겁다고 했다.

맥가이버 이 대리, 그는 양파 같은 사람이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고 또 벗겨도 하얀 껍질뿐이다. 속이 보이지 않는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의뭉한 사람을 '양파 속껍질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부정적인 표현이다. 이 대리는 손재주면 손재주, 운동이면 운동 못 하는 게 없다. 거기에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보까지 가졌다. 양파 속껍질같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양파 속껍질 같은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말도, '맥가이버 이 대리' 앞에서는 긍정으로 들린다.

참존(Charm-zone) 우체국으로

삼복 중 초복, 중복이라는 2개 복(伏)이 들어있는 2008년 7월, 우리 영주우체국으로서는 행운의 달이었다..

7월 5일 직장대항 영주 시장기 타기 축구대회에서 시청, 소방서 등 막강한 팀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그리고 7월 20일에는 대구· 경북 지역의 31개 시· 군· 구 단위 우체국끼리 맞붙은 족구대회에서도 우리 우체국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복(伏)이 복(福)이 불러들였나?

기관 규모나 지역 인구로 보나 연거푸 우승하기란 쉽지 않다. 족구경기는 대구달서 우체국과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달서구 인구는 60여만 명으로서 영주시 인구의 5배이며, 우체국 직원 또한 우리 우체국보다 서너 배나 많다. 외형적으로 보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작은 고추가 맵다."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들을 상대해서 이긴다는 것이 말만큼 쉽지 않다. 그런데 덩치가 황소만한 달서 우체국 팀이 우리 팀에게 무릎을 꿇었다니. 이는 뭐니 뭐니 해도 지난봄부터 준비를 착실히 해 온 결과였다. 우리 우체국의 집배실장이면서 자칭 타칭 축구(족구) 감독인 우병덕 축구회장의 치밀한 작전계획과, 먹을 것 마실 것 등을 적시(適時)에 공급하는 김윤수 축구회 총무의 헌신적인 봉사 정신이 어우러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Ever Rich 마크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우리 선수들의 '필승의 각오'가 없었더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축구와 족구에 내리 우승함으로써 영주우체국은 스포츠에 강한 우체국(郵遞局)으로서 명실상부한 스포츠 강국(强局)(?)이 된 셈이다. 1급 지 우체국이라고 목에 잔뜩 힘만 들어 있는 대구 시내 우체국들도 스포츠 강국(强局)인 우리 우체국의 우승컵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그 당시 경영전략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킹핀 전략(Kingpin Strategy)이란 것이 있었다. 볼링경기에서 유래된 이론이라 한다. 킹핀은 10개의 볼링핀 가운데 정 중앙에 있는 5번 핀을 말한다. 스트라이크를 치기 위해서는 5번 핀을 겨냥해서 던져야 한다. 1· 3번 혹은 1· 2번을 지나 5번 킹핀을 맞히면 다른 핀들도 저절로 쓰러지면서 스트라이크가 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꼭 필요한 부분에 집중해서 전체에 연쇄효과를 거두자는 것이다.

피터 허쉬가 지은 「열정적인 삶」이라는 책을 보면 킹핀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캐나다의 벌목꾼들은 강을 이용해 통나무를 제재소로 보내는데 어느 지점에서 통나무들이 막혀버린다. 수백, 수천 개의 통나무가 물 위에 막혀 있지만, 벌목꾼이 통나무 하나만 제대로 치우게 되면 자연스레 하류로 흘러가게 된다. 이들은 이 나무를 '킹핀'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영주라는 작은 시 단위 우체국에서도 승리한다는 확신을 심어준 13명 영주 우체국 축구 선수들은 'Kingpin 집단'이라 불렀다. 이들이 해낸 축구, 족구 우승의 열정이 파도가 바닷가 모래를 삼키듯이, 우정사업 애(愛)가 전 직원의 가슴 깊이 알알이 박힐 때, 전국 최고의 우체국이란 깃발이 영주로 오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음과 마음이 통(通)하는, 소통(疏通)이 잘 되는 '참존(Charm-zone) 우체국'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 마치면서 |

집배원 같은 마음으로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에게 '글을 왜 쓰는가?'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글을 쓴다.'라는 대답이 나오더군요.

나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이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성년이 되어 취직을 하려고 해도 학력이라는 덫에 걸려 마땅히 들어갈 데가 없었습니다. 흔히 '공돌이'로 불리는 공장 노동자밖에 없었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혼자 공부하여 총무처 시행 5급 을류(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체신부로 추천 받아 바닷가 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직생활, 대구에서 서울로, 동두천으로, 천안으로 다시 대구· 경북으로…. 한 열대여섯 번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 어느 봄날, 4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습니다. 기나긴 여정의 공직생활 중 학력 콤플렉스가 가슴 한편에 시린 멍에로 남아 있었습니다. 늘 가방끈 짧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병 치유에는 글쓰기가 좋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얼른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퇴직 2, 3년을 앞두고 글을 한번 써 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우선 쓰기가 쉽다고 느낀 수필 대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 문턱을 넘어선 것이 어느덧 햇수로 10년이 넘었습니다.

나는 퇴직하기 일여덟 해 전부터 영주, 예천, 청도 등 시골 우체국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곳에는 집배원이 많습니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넘고 내(川)를 건너서 우편물을 배달합니다. 그들과 오래 부대끼며 지내다보니 집배원들은 단지 우편물만 배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요즈음 시골에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자식들은 도회지에 나가 살고 노인들이 빈집을 지킵니다. 그마저도 홀로 어르신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몸이 편치 않으십니다. 약 한두 가지는 달고 삽니다. 사는 집도 허술합니다. 가끔은 형광등이 나가고 수도가 고장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어르신들에게 고장 난 수도며 전기설비도 고쳐주고 보건소에 가서 약도 타다줍니다. 심지어 시장을 봐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독거노인 돌보미들이죠.

저 멀리 논밭 사랫길로 집배원이 지나갑니다. 빨간 오토바이 뒤 트렁크 배가 불룩합니다. 무논을 절벙절벙 걸어 다니던 백로 한 마리가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푸드덕 날아갑니다.

빨간 오토바이로 시골길을 달리는 집배원, 참 순수합니다. 마음이 따뜻합니다. 나는 글도 이러한 꾸밈없는 마음으로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리 꼬부랑 할머니께 한 봉지 약을 타다 주는 집배원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감동을 주는 글이 나오지 않을까요. 감동을 주는 글은 분칠한 얼굴이 아니라 바로 민얼굴 그대로 숨김이 없는 글입니다.

나는 잘 쓴 글보다는 좋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조금은 유치하더라도 정감이 가는 '집배원 마음 같은 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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