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끝>…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제11부 수출 재개

1. 남미 수출 길

2010년 1월 초 필리핀 사위 헥터가 들어왔다. 그는 세부의 자동차 수입이 다시 허용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수입이 중단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4시간 간병인을 구하여 아내 곁에 있게 하고 사위와 함께 이제부터 무슨 차가 유망할지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옛날 율도 한진중고차 수출 단지는 없어져 버렸고 인천 골프장 뒷편에 조그마한 수출단지가 새롭게 생겨나있었다. 거기 가서 수출 사업장 야드를 임대하고 컨테이너 사무실과 전화와 인터넷 시설을 하였다. 안면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차량들을 점검하고 시운전 해 보면서 유망한 차종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옛날처럼 완성차를 가져 갈 수가 없고 차체를 절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찹찹(Chop-chop)이라고 하였다. 즉 차량에서 문짝들, 본넷트, 앞유리, 좌우펜다, 트렁크 등과 의장부품들, 타이어, 서스펜션부품들을 단품 상태로 해체하고 남는 차체는 천정, 골주 등을 절단해 내고, 마지막 차체 밑판 위에 엔진만 그대로 장착되어 있는 상태로 컨테이너에 싣는 방법이다. 현지에서 이 부품들을 재조립하는 것인데 아직 이 작업을 해 본 적이 없다. 해체과정에서 발생하는 부품의 손상도 많고, 해체와 재조립에 사용되는 비용이 크고, 무엇보담도 차체의 안전도 문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필리핀 당국의 허술한 정책이 의문이다. 단지 한 가지 이유라고 하는데 필리핀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이란다. 이것은 수긍이 가기는 한다. 하여간 필리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다.

사위 헥터는 현대차 겔로터(Galloper)를 가장 유망한 차종으로 판단하였다.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쯔비시 파제로와 엔진이 같다는 점이다. 엔진 부품들은 필리핀에서 쉽게 구입할 수가 있다는 이점이 있다. 다음은 그래도 스포티지와 스타렉스이었다.

사위와 함께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다. 원가 계산이 만만치 않았다. 당장 투자할 자본도 문제이었다, 집을 짓느라 저축한 돈을 다 써버렸고 아내의 병원비도 이미 지출된 금액이 5천만원이나 되었으며 매달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탈리사이(Talisay)에 사 둔 땅이나 크라운 레전시 콘도를 서둘러 판매하도록 하는 한편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자본금 규묘를 최소한 2억 정도는 있어야 하므로 좀 난감하였다.

그래서 양영길씨와 함께 우리케피탈 정복조 부회장을 찾아가서 내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최대한 노력해 보자고 하였다. 정 부희장은 부산 공장에서 오랫동안 같이 근무하였고 인천에서도 대우아파트에서 같이 살아온 바가 있다, 시골토지를 담보로 설정하고 대출금 1억 6천만원을 받았다. 받고 보니 이자가 연 10%이어서 깜짝 놀랐다. 난 8%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여간 고맙다. 그러나 빚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낮이나 밤이나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자고 나면 꼬박꼬박 내어야 할 이자가 쌓이는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사업을 운영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수출단지에 입주하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김상인과 서재범 두 사장을 만났다. 김상인 사장은 내가 아직 수출해보지 못한 칠레와 페루에 수출 길을 터 주었고, 서재범 사장은 카 캐리어와 동시에 마당장사를 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이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친구 사이이었고 이제 나와는 사업파트너로 협력을 하게 되었다.

칠레와 페루는 완성차 그대로 수출할 수가 있는 곳이었다. 김 사장이 오랜 동안 거래해왔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대로 한 번 믿고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수출 차량을 김 사장이 구하면 여기에 대한 약간의 수수료를 주는 조건이었다. 차를 사려고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그는 페차장이고, 중고차매장이고, 직접 차를 팔 차주를 찾는데 아주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차를 사게 되면 서재범 사장이 나의 수출야드로 안전하게 옮겨주었다. 차량을 구입해 주는 김사장의 수수료와 서사장의 운송비는 월말 계산해서 정산을 하였다. 곧 김 사장은 중고차 사업에서 확실한 베태랑이고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 사람만 부지런히 따라다니면서 이 바닥을 헤집으면 나도 얼마 가지 안 해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가 있을 것이란 믿음이 갔다. 참으로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필리핀으로 보낼 차량도 동시에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그것은 페루 바이어가 L/C를 개설하는 것이 아니고 싣기 전에 50% 현금을 받고 차가 현지에 도착하면 나머지 50%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위험이 따르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협의한 결과 만일 문제가 생기면 김 사장이 대신 변재를 해 주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이 각서를 공증을 받아 두었다.

곧 페루의 박영식사장과 수출계약서를 김상인 사장이 보증한다는 내용을 넣어 작성하고 각자 서명하였다. 이것을 메일로 보냈다. 모든 통신 수단은 메일로 통하면 되었다. 대금 정산 방법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이다.

김 사장과 함께 차량 매입에 나섰다. 우선 단지 내 차량들을 살펴보니 매입할 차량들을 많이 발견하였다. 대금 일부를 지불하고 차량을 내 사무실로 가져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가 목표한 수량 25대를 구하자 바로 서사장이 부두로 실어 날랐다. 김사장은 일을 아주 쉽게 처리하였다.

또 한편 칠레의 김남길 사장과 상담을 진행하였다. 이 사람은 소나타 EF 2006년식 LPG 만 수입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택시로 사용하다가 폐차처리된 차량들이다. 김사장과 함께 택시회사를 다니면서 폐차할 차량들을 조사하여 보니까 주행거리가 5~60만 km이나 아직 엔진과 밋션 상태가 쓸만 하였다. 차체는 겨우 4년쯤 지난 시점이니까 아주 깨끗하였다. 단지 타이어와 알루미눔 휠을 새것으로 교체하여 달라는 조건이었다. 사업성을 따져보니 전망이 좋았다.

또 한 사람 박대규 사장이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칠레 수출 차량 견적을 요구하였다. 남미 쪽에 사업을 시작한 순간 연속적으로 수입자들을 만나보게 되었다. 물론 모두 다 김상인 사장의 인맥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들 지역을 출장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스페인 말을 배우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쏘련 하바로프스크로 출장을 앞두고 러시아를 배우기 위하여 어학원을 다녔던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나라 모국어로 상담을 하면 반응이 무척 좋고 많은 성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심을 하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내 성격이다. 서울 교보문고에 들러 어학 교제 로제스타스톤을 거금 70만원에 구입하여 밤낮 없이 앵무새처럼 따라 발음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럴 즈음 양영길씨를 연락해서 나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잘 되면 칠레와 페루에 회사를 설립할 기회도 있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함께 일을 해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필수적인 스페인어를 공부하도록 요청하였다. 내 교재를 빌려주어 녹음을 하도록 한 것이다.

참으로 의욕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저녁엔 늦게라도 병원에 들러서 아픈 아내의 얼굴이라도 보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 출근길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래야 간병인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바로 해결하여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늦은 시간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일정시간까지는 스페인 말을 익히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고닲은 삶이었지만 언젠가는 아내가 병석에서 일어나리라는 희망과 사업을 성취하고자하는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선적 후 두 달 만에 화물이 페루에 도착하고 하역을 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머지 50%의 송금이 들어오면 B/L을 넘겨줄 것인데 시일이 자꾸 늦어졌다. 결국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고 약속대로 김 사장에게서 나머지 차 값을 받았다. 페루로 보내려고 추가 구입한 차량 가운데서 필리핀으로 보낼 수 없는 차량의 대금까지 김사장은 변제하여 주었다. 김남길 사장의 소나타택시는 선금을 먼저 받았으나 이번에는 김상인사장이 차량 구입을 하지 못해서 결국 돈을 돌려주고 말았다. 택시 대페차의 시기를 못 맞춘 탓이다. 박 대규사장은 3월 초 칠레의 대 지진 여파로 창업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저래 이 남미 수출 사업은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일장 춘몽으로 끝나버렸다. 손해 본 것은 없었지만 아쉬운 마음이 오래 남았다.

2. 필리핀 사업의 어려움

필리핀 사업은 2년 전과 같지가 않았다. 찹 찹(Chop_Chop)이라는 작업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무엇보담도 고품질 전략을 펼 수가 없었다. 모든 매장의 작업이 거의 비슷하였고 판매가격도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필리핀의 정책이 의도한 대로 우리 회사도 더 많은 작업자들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고 수지도 악화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조기폐차라는 제도를 만들어 차량 소유주가 낡은 차량을 처분하고 새차를 사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전에는 소유자에게 차량을 직접 구매하여 수출 말소를 하고 수출 한 후에 정부로부터 10/110의 페자재활용지원금을 받았는데 이 제도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려워져 버렸다. 소유자는 웬만하면 폐차장으로 차량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수출자에게 혜택을 주던 것을 자동차 소유자에게 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이런 큰 혜택도 없으니 자동차 수출자는 누구에게나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처음부터 남의 자본으로 시작하다 보니 매달 원리금 상환이 만만한 게 아니었다. 매달 6백여만원 원리금을 3년 내내 지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필리핀에서는 사위가 땅과 집을 팔려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복덕방을 뛰어다니기도 하였으나 팔리지 아니하였다. 이 때 느낀 것은 필리핀이라는 곳은 우리나라처럼 중산층이 없다는 점이었다. 부자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부자들은 자기들 집을 자기 마음에 들도록 지을 뿐이지 남의 집을 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주택도 태양열을 이용한 더운물 목욕 시설을 갖추었고, 지붕을 기와로 잇는 등 고급으로 지었으나 사려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필리핀에서 부동산에 투자한 것은 전혀 잘 못 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황시절에 목돈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고 매월 조금씩 지불한 것이니까 그렇게 후회할 일은 아니다.

이런 한편 한국 사업자끼리 경쟁은 더욱 치열하여졌다. 경쟁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한국의 전주와 수원에 사업장을 가진 굴지의 폐차장 두 곳에서 세부에다가 매장을 신설하여 독점 경쟁에 돌입한 일이다. 원가 경쟁에서 모든 영세 사업장들은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여 전전긍긍하였다.

시작한 지 한 달만인 2010. 2월 초에 첫 선적을 하였다. 겔로퍼 3대, 스타렉스 3대, 스포티지 2대 그리고 마티즈 2대 총 10대를 컨테이너에 실었다. 이전에 완성차를 실었을 때보다 4대를 더 싣게 되었다. 차체를 절단해서 싣게 되니 우선은 싣는 수량이 늘어난 것이다. 쇼링업체는 대현 산업이라는 곳이었다. 절단해체 시에 파손된 부품을 일일히 기록하였다가 신품 구매가 가능한 부품은 매입을 하였고 폐차장에서 해체되기 전에 탈거작업을 해서 같은 컨테이너에 실었다. 컨테이너가 항구로 떠나야 할 시일이 빡빡하였음으로 부품 구입은 항상 바빴다. 달리 직원을 채용할 처지가 되지 못하여 혼자 손수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선적을 해 놓고 그 결과를 기다려서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조사를 해 봐야 하였다.

역시 부품 손상이 문제이었다. 이들 부품을 신품으로 사는 것은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은 것이었다. 사위가 보낸 결품 명세서를 들고 폐차장에 돌아다니면서 직접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폐차장 직원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폐차장에서 해체해 버리는 차량을 지정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품을 옮겨오는 것도 큰 문제이었다. 큰 부품들은 폐차장에서 매입해 둔 차량 속에다 집어넣어 일정기간 보관한 후 카케리어로 옮겨와야 하였다. 이 때 폐차장에서는 부품에 대한 대금 지급이 되었는지 판매전표와 일일이 확인하려다 보니 옥신각신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서재범 사장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말 부지런히 옮겨다 주었다.

새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시화공단 내에 있었던 광진폐차장과 동화폐차장 두 곳을 중요 거점으로 정하고 매일 출 퇴근하다시피 하였다. 이 두 군데에서 수출할 차량은 물론 부품 작업을 주로 하였다. 수출할 차량은 주로 현대차 겔로퍼와 스타렉스, 기아차 스포티지, 아맥스, 쌍용의 코란도 등이었다. 뒤에는 현대의 투싼과 트라제도 추가 되었다.

페차장에 들러 이들 차량을 만나면 우선 주행거리를 확인해 보고 시동을 걸어두고 엔진 상태를 먼저 점검하였다. 제일 중요한 사항이었다. 엔진 이음이나 매연, 브로바이 가스 등을 점검해서 합격수준에 들면 다음은 밋션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짧은 거리이지만 움직여 봐서 구동 상태가 어떠한지 점검하였다. 이런 사항들은 내가 만던 체크쉬이트에 기록해서 구입가부를 결정하고 사무실 판매 담당자에게 가서 사겠다는 말을 하였다. 광진에는 김현철 차장이, 동화에는 김이사가 판매 담당자이었는데 아직 팔리지 아니했으면 살 수 있었다. 대금을 지급하고 스티커를 받아서 차량 앞 유리에 부착해 놓으면 비로소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필리핀 수출을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나자 또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필리핀의 새 대통령 아로요가 취임하고 자동차 수입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서 수입을 일시 중단한다고 하였는데 중단 기간이 무려 4개월이 지나버렸다. 수출이 중단되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났다. 새로 채용한 필리핀 종업원들을 금방 해고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제일 난처한 일이었다. 1월에 재개되고 7월에 또 중단되어서 11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이 기간 달라진 것은 세부 세관장이 다바오에 근무하던 세관장이 전근 오게 된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세관장은 당사의 통관 브로커인 주드의 친한 친구라고 하였다. 주드는 자기의 친구 덕에 통관일을 확장시켜나갔으며 당사의 통관비용을 이전보다 싸게 해 주는 잇점을 베풀어 주었다. 사위가 필리핀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필리핀 사업자에게는 그 만큼 편리를 봐 주는 것이었다. 주드는 통관비를 다른 한국사람 사업자보다도 컨테이너 당 무려 4만페소(한화 백만원)이나 싸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통관도 빨리 해 주었다. 사위 핵터는 이 주드에게 고마운 말을 많이 하였다. 그래서 컨테이너를 실을 때마다 주드가 좋아하는 한국의 맥주나 인삼액기스 등을 선물로 보냈다. 그의 사무실 종업원들에게는 진로소주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럭저럭 사업은 정상 궤도에 들어가고 있었다.

2010 11월에는 오래 투병하여 오던 집 사람이 타계하고 말았다. 인명은 재천이라 어찌하는 수 없었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내가 고이 간직해온 편지들과 대우자동차 30년의 월급봉투를 발견하고 억척스럽게 근검절약하면서 살아온 아내가 생각나서 아내와 살아온 이야기들을 글로 써서 출판하기도 하였다. 책 제목은 '여보, 어디가'

이제 두 번째의 나의 자서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자동차 일 중심으로 일평생 살아 온 이야기들이다.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

필리핀 사업은 2013년에는 SUV 수입을 전면 금지하였다. 스타렉스, 트라제, 투산, 코란도, 스포티지 등의 차량은 수입 금지 품목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이제 수출이 가능한 차량은 소형 1톤 트럭이나 소형버스 뿐이었다. 이들 작업은 또 생소해서 또 적응하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더욱이 어려운 것은 통관 브로커 주드가 그의 친구 세관장이 마닐라로 전속 가는 바람에 새로 부임한 세관장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어서 주드는 통관 업무를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사위 헥터는 주드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다른 통관사를 접촉하지 않고 무려 1년이나 주드가 복귀하기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주드는 끝내 그의 사업을 종료하고 말았다.

3.사업을 종료하면서

이로 인해 나의 사업은 많이 기울어지고 말았다. 버스는 몇 대 해보지도 못하고 그마저 중단되다 보니 오로지 트럭1톤만 남게 되었다. 트럭은 수지가 맞지 아니하였다. 한국에서 직접 보내기 보다는 현지 수원폐차장에서 사와서 판매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필리핀의 중고차 수출 사업은 이제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통관사 주드에게서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의리를 생각해서 사위는 끝내 다른 통관사와 손잡지 않았다.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위의 고집은 그런대로 칭찬할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업종료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사위는 현지에서 생산된 일제차를 사와서 렌탈사업으로 전환하는 한편 트럭 판매는 수탁판매를 하는 것으로 현상유지에 매달렸다.

필리핀에 체재하는 동안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판매를 서둘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월세는 120만원이 된다. 국민연금이 80만원이니 월 200만원의 고정수입으로 나의 여생을 보내는 데 그리 부족함은 없다고 본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016년 6월 사위에게 모든 사업을 물려주고 조용히 귀국하였다. 집안의 8대 종손이기도 하니 가문에 대한 소임도 해야 한다. 그리고 고향 선산에 묻히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평생 꿈꾸어 왔던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영남대 문창반, 교육대 문창반 그리고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아내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없는 쓸쓸한 노년을 그냥 보내기보다 이제 늦깎기 문학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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