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빅터의 참치 상사(Victor's Tuna Trading)
김 사장이 송금하여 주었다. 2주 후 그는 60Kg 전후 빅아이 A등급 한 마리를 또 주문하였다.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양전무가 연육 사업계획에 필요한 상세자료들을 메일로 보내왔다.
연육 공장의 레이아웃, 공정 별 기계, 공장건물, 부수냉동시설 등의 가격과 필리핀에서 조사한 생선의 수율, 첨가제 종류와 가격, 각종 생선들로 만든 연육의 현 국내 시세 등의 자료이다. 이들 자료들을 적용하여 나는 사업계획서를 입안하였다.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수익률이 70%나 되었다.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신선도를 유지해야 하는 식품이기 때문에 냉동 컨테이너선의 고장이나 한국에서 하역 보관 중 부패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L/C 개설로 통상 정상 거래를 뜻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보험이나 제도적인 장치로 위험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유통시스템이 어떠한지, 앞서 열거한 위험에 따른 안전장치 등을 조사해 줄 것을 양전무에게 요청하였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무섭게 밀고 나가는 나는 다시 젠산으로 갔다.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이미 해 보았기 때문에 너무 힘이 든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돈 이름으로 개인회사를 설립하였다. 회사명은 사돈의 이름을 따서 빅터 참치 상사(Victor's Tuna Trading)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돈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나는 메니저가 되었다. 필립스에 들렀으나 멜린다는 부재중이었다. 그녀의 허락도 없이 필립스의 주소와 전화를 나의 새로운 회사에 사용하였다. 뒷날 멜린다는 나의 명함을 보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리고 거처할 방도 2층짜리 콘도에서 3개나 임대하여 그 중 한 개에 에어컨을 설치하였다. 방 3개의 용도는 나와 마누라, 간병인, 그리고 한국의 연육기술자 가족이 사용할 것이었다. 나의 빠른 업무처리에 바깥사돈은 깜짝 놀랐다.
수익률이 가장 높게 나타난 날치와 틸라피아(민물고기 도미)의 구입 선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어항를 부지런히 들락거린 결과 날치어선을 가진 선주를 찾아서 상담을 하였다. 나는 대량 구매자이기 때문에 부두에서 도매하는 가격 이하로 결정하였다. 곧 바로 매매계약서를 작성하였는데 거래개시일에 대해서는 회사가 연육 공장을 완료하여 생산하는 날을 D-Day로 표시하였다. 틸라피아에 대해서는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물고기는 대부분 무슬림 거주지역이라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양전무의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안전장치에 대해서는 보험이 있었고 유통구조에는 문제가 많았다. 국내 어묵업체들이 너무 영세하고 소규모라서 L/C거래를 해서 직접 수입하는 곳이 없고, 연육 수입상을 통해서 제품을 필요량 만큼 구매한다는 것이다. 앞서 출장 왔던 노이사 같은 회사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나의 회사 이성무역상사가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 놓으라고 지침을 내렸다.
7. 연육기술자 현씨
양 전무가 연육가공 기술자 현씨를 보냈다. 이미 세운 나의 사업계획서의 중요사항을 검증해 보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 사람을 데리고 젠산으로 갔다. 우선 어항으로 가서 입하되는 생선들을 보게 하였다. 그는 담담하다. 나는 어떤 생선이 연육 만드는데 적합할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 밖에 "어떤 생선이라도 연육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아니 수율이 가장 높으면서도 한국에서 값이 좋은 생선이 어떤 것입니까?"
"수율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연육 가격은 돔이나 갈치 등 몇 가지를 제외하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좀 색다른 말을 한다. 거저 담담하게 둘러보고 필립스에 들렀다. 거기에는 멜린다의 협조를 얻어서 내 책상이 있었고 한국에서 새로 가져온 컴퓨터와 인터넷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언제 만나도 멜린다는 나를 명랑하게 맞아주었다. 현씨를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현씨에게 검은 살점(Black Meat)을 가르키면서 "저것도 연육이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이리 저리 만져보고 하는 말이 "아 물론이지요 이것은 참치로 만든 최 고급 연육이 되겠습니다"
"저렇게 보기 싫을 정도의 시커먼 생선이 어떻게 연육이 된단 말이오?"
"이 시커먼 것은 피가 뭉쳐서 그렇게 보일 뿐 물로 씻으면 핏물이 빠지고 흰 살이 될 것입니다"
나는 멜린다에게 검은 살점을 실험용으로 쓸 것이니 2Kg정도만 포장해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포장하여 주었다. 나는 빨리 집으로 오고 싶었다. 집 근처 생선가게에서 사돈에게 차를 멈추게 하고 틸라피아 몇 마리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가져온 검은 살점을 반으로 뚝 짤라 내어 주면서 핏물을 제거해 보라고 하면서 현씨에게 내 밀었다. 그는 서슴없이 큰 그릇 하나에 그것을 담고 물을 가득 붓는 것이었다.
그 사이 나는 틸라피아 한 마리를 장만해서 숯불 화덕을 피우고 소금구이를 시작했다. 검은 살점을 담가 둔 그릇은 온통 빨간 색으로 변하였다. 꺼내어 보니 금새 흰색으로 바뀌었다. 현씨는 그것을 도마 위에 놓고 자르니 내부에는 여전히 검은 색 그대로였다. 몇 토막으로 더 잘게 잘라서 그것을 담고 또 물을 가득 부었다. 그러는 사이 틸라피아가 맛있게 구워졌다. 나는 석쇠채로 들고 와서 시식해 보라고 현씨에게 내 밀었다. 젓가락으로 몇 접시 맛본 그는
"아 맛이 기가 막히네, 그런데 이 물고기는 민물에서 자란 것이어서 흙냄새가 납니다. 이 냄새만 제거할 수 있다면 최상의 도미 연육이 되겠습니다." 고 하였다.
"냄새를 제거할 방법이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인체에 무해한 약품이 있는데 이를 소량 사용하면 됩니다"
"비싸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다시 검은 살점을 꺼내보니 완전히 흰 살점이 되어 있었다. 맛을 보니 그냥 참치의 맛 그대로였다. 나는 석쇠에다가 흰 살점과 검은 살점을 동시에 소금구이를 시작 하였다. 이 사람이 모든 걸 시원시원하게 말하니 내 가슴도 시원해짐을 느꼈다.
참치가 잘 구워졌다. 나는 알맞게 썰어서 식탁을 펴고 올려놓았다. 맛을 보니 오히려 검은 살점이 더 고소하였다. 이때까지 상황을 나는 궁금해하는 사돈에게 알렸다. 결론적으로 검은 살점을 사용해서 연육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되면 원가를 대폭 낮출 수가 있다.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짓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어 된장찌개를 만드는 한편 남아 있는 틸라피아 숯불구이를 시작했다. 현씨가 가만있지 못하고 고기 굽는 일을 자처하였다. 한 상 가득 저녁상을 차렸다. 세부에서 가져온 배추김치도 내 놓고 몇 가지의 밑반찬도 곁들어진 아주 푸짐한 상이다. 단연 생선 구이 두 가지도 훌륭한 반찬이 되었다. 탄두아이를 반주로 하였다.
식사도중 나는
"아까 생선 수율에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어째서 그렇지요?"
"그것은 첨가제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첨가제를 어떻게 사용하기에 그렇지요?"
"첨가제는 얼음 20%에다가 나머지는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은 몇 %의 수율을 원하십니까?"
"……?"
"만약 사장님께서 80% 짜리 수율을 원하시면 보통 20%의 얼음과 또 20%의 첨가제를 넣어서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60%의 순 고기 살이 됩니까?"
"예, 그것은 최고 중 최고의 연육이 되지요"
"도대체 그 첨가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웃으면서
"가공 기술자마다 다르고 노하우(Know-how)도 있으니 그것을 쉽게 말씀드릴 수가 없는 데요"
하면서 웃는다.
나는 순간 이 사람이 무슨 동화 속의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고 맛있게 저녁을 마쳤다. 설거지를 하는데 그는 또 도와주려고 한다. 한쪽 손가락이 없는 주먹손이다. 사돈은 일찍 자기 집으로 갔다. 현씨는 토속주 탄두아이를 더 마시고 싶다고 하여 나는 가게에 나가 제법 큰 병과 안주가 될 햄을 사왔다. 술을 놓고 마주앉고 보니 자연스럽게 개인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는 한쪽이 주먹손이 된 것이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 손가락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또 자기 마누라와 잘 지내지 못한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였다. 부부란 때론 다투기도 하고 서로 미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것이라고, 아내가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라고, 덮어주라고, 나는 한 마디 해 주었다. 그는 연육 만드는 일을 스물두 살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 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의 인상이 매우 평온하며 자상한 분으로 느끼며 만약 인연이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되면 나를 위해서 힘을 다 쏟겠다고 한다.
접이 식 침대 두 개를 나란히 해서 잠을 잤다.
이튿날 사돈이 일찍 왔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 사돈은 이제 김치를 좋아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사무실로 출근하였다. 사돈과 나는 이제 한집 식구처럼 되었다. 사무실 여직원들이 아주 친절하다. 나는 그에게 첫 과제를 주었다. 일일 생산능력 5톤 규모의 레이아웃을 그려보라고 하면서 준비해 두었던 모눈종이를 내 주었다. 아울러 임대예정 공장의 가로x세로 길이도 알려주었다. 그는 우선 공정 순서대로 공정이름을 적고 기계의 상면적을 적어나갔다. 그러다가 의문이 있는 부분이 있는지 한국으로 전화를 해 보겠다고 하였다. 내 책상 위의 전화를 내어 주며
"이것이 인터넷 전화인데 국제전화요금은 무료이니 마음껏 쓰시오"
그는 몇 차례 전화를 해서 그가 미심쩍은 사항들을 모두 확인하였고 1/100 척도로 레이아웃을 깨끗이 완료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들고 어항 내에 있는 임대예정 건물로 들어섰다. 그는 레이아웃을 펼쳐 놓고 기계의 위치를 표시(Marking)하여 갔다. 생선을 갖다 놓을 자리, 생선에 따라서 지느러미나 내장을 제거하는 여유지역(Buffer Zone), 마지막 연육을 담는 그릇을 둘 곳과 운반구 등의 위치도 표시하였다. 양전무의 자료에는 메인 공정만 표시되었는데 현씨는 생산에 필요한 모든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장은 신축 건물이고 -40도의 급랭시설도 갖추고 있어서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공장 외곽에 냉동 컨테이너가 대기하는 장소까지 갖추고 있으니 완벽하다고 하였다.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사돈이 사가지고 온 맥도날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좀 휴식을 하였다. 다음은 기계의 선정과 가격을 알아보았다. 먼저 완전히 새 것으로 할 것이냐 중고기계를 선택하느냐를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두 가지 다 해 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전화통과 오랫동안 씨름하였다. 한 두어 시간 후에 그는 가격표를 완성하였다. 완전 새 기계가 2억 원 정도이고 중고품이 7천만 원인데 핵심기계 한 가지는 신품이었다.
양전무가 보낸 자료와 대비해 보니 신품인지 중고품인지 구분이 되어 있질 않아서 애매하였다. 나는 현씨를 보고 다른 곳을 알아보든지 가격 협상을 하든지 해서 값을 낮추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몇 군데 전화를 해서 가격을 알아보더니 제일 먼저 7천만 원짜리 기계 가격을 무려 2천만 원이나 낮추어서 5천만 원으로 해 준다고 하였다.
나는 이 사람이 전화하는 것은 다 듣고 있었으므로 가격 결정 과정에서 믿음이 갔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계약금 1천만 원을 송금하고 구두계약을 하였다. 정식 계약서는 내가 한국에 가서 하기로 하였다. 한 가지 사항만 빼 놓고 내가 답답해하였던 사항들은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그 한 가지 사항이란 수율 문제인데 이것은 나에게는 놀라운 사항이었다. 나의 사업 계획서에는 수율을 40%로 보고 작성한 것이다. 이것을 80%나 그 이상으로 맞출 수 있다니 아주 크게 환영할 일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현씨에게 차근차근 물어 보았다.
"생선 자체의 수율이 40%인 것이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이 말은 다시 이야기 하면 100Kg의 생선에서 생산되는 순 생선살의 무게가 40Kg이고 나머지는 찌꺼기가 된다는 말씀이죠?"
"예 그렇고말고요"
"이 60%의 찌꺼기는 모두 버리게 됩니까?"
"아니지요, 이 찌꺼기를 가공해서 물고기나 가축들의 사료로 만들기도 하고 양질의 비료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 필리핀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곳의 연육 공장이 있다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돈에게 물어보았다. 사돈은 소규모 어묵을 생산하는 곳은 있지만 대량으로 연육을 생산하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 규묘 장어장이 있으니 판로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란다.
"찌꺼기 처리는 뒤에 알아보기로 하고 그 다음 얼음 20%를 넣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령 100Kg의 생선살이 있으면 이것의 20%인 20Kg을 넣는다는 뜻입니까?"
"예 맞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최종적으로 묻겠습니다, 80%짜리 연육을 만든다는 것은 가령 100Kg의 생선에서 순살고기가 40Kg 나오고 얼음이 20%이니까 8Kg을 넣고 나머지 첨가제를 32Kg 넣어서 총 80Kg으로 된다는 것입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첨가제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도 연육이 되는 것입니까?"
"아 되고말고요, 80% 짜리면 양질의 연육이 됩니다"
"얼음은 물을 얼리는 비용일 것이고 32%의 첨가제의 구체적인 종류와 가격을 알려 주어야 내가 사업계획서를 완성하겠는데요?"
그는 웃으면서
"그건 간단합니다. 첨가제는 다름아닌 밀가루, 감자가루, 콩가루 등입니다. 지금 Kg당 가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또 전화통을 붙잡고 한국으로 전화를 한다. 그는 곧 밀가루, 감자가루, 콩가루의 Kg당 가격을 알려 주었다. 나는 멜린다에게 얼음가격을 물었다. (모든 첨가제의 가격은 생선 값의 1/3 수준이었다) 어항 내의 얼음가격은 대량 생산을 하기 때문인지 값이 아주 싸다고 하였다.
나는 이로써 모든 의문사항이 풀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멜린다에게 저녁식사를 초대 하였다. 그녀는 좋아라 하였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주 비싼 것인데 정말 사 줄 것이냐?"
"그렇고말고, 이왕이면 당신의 남편도 같이 초대하고 싶다"
그녀는 씁쓸히 웃으면서
"나는 남편을 죽여버렸다 (I killed my husband)"
그러면 그녀는 미망인이라는 말인가? 난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던 것이다. 이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는데 글쎄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
멜린다는 사돈에게 식당이름을 말해준다. 나는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고 말했더니 한 바탕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한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다. 한탕 호기 있게 쏘고 싶었다. 많은 것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멜린다를 위시한 직원들에게 보답하는 뜻으로도.
식당으로 가는 차 중에서 나는 대충 계산해도 예상 수익률이 150%가 넘는다고 짐작하였다.
한편 멜린다가 "남편을 죽여버렸다"고 말하면서 쓸쓸히 웃던 모습이 자꾸 뇌리에 와 박혔다. 저 젊은 나이에 아직 40이 채 안되어 보이는데 미망인이 되다니……
도착한 곳은 중국집이었다. 남자는 셋이고 여자는 다섯이다. 여자가 많으니 좌석이 떠들썩하다. 사돈이 농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여자들 속에 있으니 꽃밭에 앉은 기분이라고, 안사돈하고 오래 떨어져 사니 여자가 그리울 수는 있다.
나도 이어 한마디 했다.
"이왕이면 이렇게 예쁜 꽃들이 많으니 한 가지 꺾어 드시라요"
나의 이 말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껄껄 웃었다. 현씨와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참으로 유쾌한 저녁이다.
8. 연육 사업 포기
딸과 사위에게 연육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설득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현 씨가 만들어 준 모든 자료와 함께 차근차근 설명하여 나갔다. 사위가 완전히 이해를 해야 함으로 영어로 말하였다. 사위는 반신반의 하였으나 딸은 완전히 무시하였다. 아예 사업을 포기 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버지가 잘 아는 자동차 사업에서도 숱한 고비가 있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젊었으면 몰라도 곧 칠십이 되는데 닥쳐 올 것이 뻔한 엄청난 시련을 극복해 나갈 힘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딸 이야기를 들은 사위도 음식물 사업에는 위험이 있게 마련이라면서 완곡히 만류를 한다. 이 사업에서 사위가 나서지 않으면 해 나갈 도리가 없다. 젠산이라는 곳이 그리 안전한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연육에 대해서 아는 것이 무엇이냐. 자문해 보니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였다.
나는 한국행을 조기 결심하였다. 현 씨에게 연락하여 부산으로 바로 가는 비행기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다. 먼저 연육공장을 둘러 볼 수 있도록 사전 준비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속으로
"한번 내 눈으로 보자, 대체 연육이란 게 무엇인지"
생산 공정을 하나씩 보면서 따라 가니 마지막 흰색 물체가 흘러나와 사각형 그릇에 채워진다. 생산과정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식품공장인데 작업 위생환경이 좋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받은 하삽(HCCP)기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다음에 기계를 발주한 곳을 현 씨가 안내를 하였다. 한마디로 아연 실색하였다. 기계를 만든다는 곳에 제대로 된 가공기계 하나 없었다. 나에게 납품한다는 기계를 보니 무슨 고철 덩어리 같다
"무슨 이 따위 기계가 있느냐?"
나는 고함을 쳤다. 사장이 놀라서 말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다니…… 이게 고철덩어리이지 무슨 기계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당장 집어 치우고 다른 것을 주시오"
나는 기계발주가 잘 못 되었음을 알고 크게 낙담하였다. 그 집을 그냥 뛰쳐 나오고 말았다.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양전무가 마련한 공장들을 둘러보고 조언을 들었는데 연육의 품질은 기계가 좌우한다는 것이다. 지금 발주한 기계를 포기하고 새 기계를 사용할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조언을 받았다. 필리핀에 왔던 노이사는 어떤 사람이 외국에서 연육사업을 하기 위해서 기계를 제작완료 하였다가 사업을 포기하고 그냥 팔려는 것이 있는데 1억 5천이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 각 사업장에서 생산하는 사업자들은 모두 좋은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품질경쟁에서 밀리면 사업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유통구조도 문제였다. 제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이성무역상사가 수입을 해서 별도 냉동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현찰을 받고 팔아야 했다. 이렇게 되면 자금회전이 늦고 그만큼 더 운영자금이 늘어난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10억의 자본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자본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방법이 안 보인다.
여기까지 와서 이 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양전무도 모르면서 섣불리 추천하였고, 나도 너무 무모하였다. 줄 잡아 1억원을 날렸다. 딸년의 말이 맞다. 애초부터 잘 모르는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포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미륵존여래불.
제10부 자동차 사업 일시 중단
1. 렌탈 사업
이제 본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 눈을 판 사이 자동차 사업은 뿌리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자동차 수입이 중단된 지가 어언 5개월이 다 되어간다. 재고 차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품이 필요하였다. 한국에서 부품들을 가져와야 했는데 다행이 다바오의 아이아의 주문량 두 컨테이너가 있었다. 부족 부품을 파악하여 한국 셋째 사위에게 아이아의 컨테이너에 실어 줄 것을 지시하였다.
한 번 더 사위에게 마지막으로 다른 업자들이 옮겨간 다바오나 가가얀(Gagayan)으로 자동차 매장을 내자고 하였으나 끝내 불응하였다. 거기 가서 현상유지만 하고 있다가 세부가 풀릴 때 다시 오면 되는 것이다. 세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던 많은 업체들이 민다나오의 가가얀으로 이미 옮긴 것이다.
사위는 회사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렌터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어지간히 판매에 지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안다. 판매가 얼마나 어려운 직업인지를, 따져 보니 이것도 괜찮은 사업이었다. 각자 스타렉스 3대 30,000페소, 스포티지 5대 20,000페소, 아벨라 2대 15,000페소씩 이렇게 10대를 렌탈로 내 보내면 한 달에 220,000 페소가 되는데 가동률이 70%만 되도 150,000페소(원화 3,750,000)이 예상이익이 된다.
나는 사위의 뜻에 따랐다. 사위는 10대중 반은 현금으로 나머지는 벌어서 1년 이내로 매달 갚겠다고 하였다. 사위는 이미 자기 차 10대를 골라 놓았다. 차 가격은 도매가 수준인 스타렉스 3대 300,000페소씩, 스포티지 5대 200,000페소씩, 그리고 아벨라 2대 100,000페소씩 총 가격 2,100,000 페소로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 살 도리를 하는구나 싶었지만 과히 밉지는 않았다. 나도 나의 차 10대를 골랐다. 20대의 렌탈을 운영하기 위한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내 보내기로 하였다. 헥터는 나의 차량 10대를 함께 관리하는 보수로 월 20,000페소씩만 받겠다고 하였다. 현재 보수의 딱 절반이다.
한편 레미디오공장의 남는 부분은 제3자에게 임대하여 고정경비를 줄이는 한편 모든 발생 비용은 반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땅 주인 부부를 워터프런트(Water Front Hotel)에 저녁 초대를 하였다. 땅 주인은 중국 사람이다. 나는 땅 주인에게
"그 동안 당신 땅을 싸게 임차하여 나의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는 데 참으로 감사합니다"고 운을 떼었더니
"감사한 건 오히려 나 쪽입니다. 당신이 매달 정해진 날짜에 임대료를 꼬박꼬박 지불하여 주었으니까요"
"아니 그건 당연히 내가 할 의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시다시피 자동차 수입이 중단되어 사업이 일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당분간 렌탈사업으로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시 수입길이 열릴 때까지 버텨 보자고 합니다. 그러니 계약기간이 아직 6개월이 남았지만 지금부터라도 당신이 임차료를 좀 낮추어 주시면 새롭게 5년 임대 계약을 하고자 합니다. 부디 선처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지금 임차료가 월 50,000페소인데 대폭 낮추어서 35,000페소에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남는 땅을 제 3자에게 당신의 책임으로 재임대를 하여도 좋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앞으로 사업을 잘 이끌어 가게 되었습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하면서 맞은편에 앉은 주인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그는 웃으면서
"앞으로 사업이 번창하시기를 빕니다. 대 성공을 하시고 내 땅을 헐값에 드릴 테니 다 사 가셔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그러지요"
좌중은 모두 크게 웃었다. 뜻 밖에 땅 임대문제는 이렇게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참으로 좋은 주인을 만났다. 이것이 다 황전무가 좋은 인품으로 이 주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 감사한 마음 한량없다.
또 다른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자동차 등록이 46대가 가짜인 것이고 또 하나는 지방 도매상에게 밀린 외상값을 받아 내는 일이었다.
등록을 다시 해야 했다. 어째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오래 전부터 나의 차량들 등록을 해 왔는데 그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등록에서 가짜 공문서를 만들고 자동차 No판을 제작하여 감쪽같이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집 것도 가짜로 만든 것에 고발을 당하여 이미 감옥소 수감 생활을 하고 있었다. 345,000페소(8,600,000원)를 고스란히 날리게 되었다. 새로 등록을 하자면 이만한 돈이 또 들어가야 하니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미수금 총액이 600,000페소에 달했다. 자동차 공급이 끊기게 되니 볼장 다 보았다고 하면서 아예 주지 않을 배짱들이다. 좀 시간이 걸렸지만 대부분 받아내었다. 나는 이만해도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번 돈이 훨씬 많으니까.
아이아에게 마지막 컨테이너를 띄운 달 셋째 사위에게 이성무역상사를 폐업신고를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 사위는 실업자가 되었다. 젠산의 사돈에게도 폐업신고를 하도록 말씀 드렸다. 그도 또한 실업자가 되었다. 전 직장으로 다시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사를 설립할 자본금으로 공탁 불입한 100,000페소를 가지고 정부로부터 환불 받아서 실업에 대한 보상금으로 가지라고 하였다.
2 .젠산(Gensan) 철수
부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아이아 야드에 도착할 때 나는 부품을 찾으려 다바오로 갔다. 부품을 찾아 포장을 해서 세부로 발송하였다. 아이아와 그 동업자 어네스트는 전의 그 중국집으로 초대하여 한턱 크게 쏘았다. 아이아는
"Mr Lee만큼 좋은 차를 보낸 사람은 다바오에선 없었다"라고 하였다. 셋째 사위가 좋은 차를 싣는 다고 많이 노력하였구나!
이제 아이아 야드에 세워 두었던 나의 차 스포티지를 몰고 나는 젠산으로 가서 모든 이삿짐을 싣고 배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차는 이미 두 달쯤 전에 사위 헥터가 제일 좋은 차를 골라서 보내주었던 것으로 다바오와 잰산 간을 한번 왕래한 적이 있었다. 아이아야드에 세워 두었는데 직원 세 사람이 훔쳐 달아나는 것을 Davao 경찰서장이 이상히 여겨 붙잡았다는 것이다. 자기 직원 세 사람이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데 경찰서장에게 선차를 부탁하는 청원서를 써 줄 수 없겠느냐고 아이아가 부탁을 해왔다. 훔친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그 자리에서 영문으로 써 주어 타이핑을 하게 하여 즉시 사인하여 주었다. 나의 유연한 영작실력은 유감없이 명문장으로 이어졌다. 아이아에게
"시간이 없어서 그들 유치장 면회는 갈 수 없다. 누군지는 몰라도 앞으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라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혹시 또 서장을 만날 수 있다면
"차주인 Korean Mr Lee가 무척 고마워하더라"
고 전해 달라 하였던 것이다. 경찰서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웠던 것이다.
젠산으로 가는 길은 이미 익숙하다. 도중에 다바오 어항(Davao Fish Port)에 들렸다. 부치에게서 받을 돈 30,000페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사직하고 없었다. 난 이것도 순순히 포기하고 말았다. 다 그것도 인연인 것이다. 도중에 길가 두리안 파는 곳에서 차를 세우고 '냄새는 지옥, 맛은 천국'인 과일을 즐겼다. 문득 김성진 그 사람 착한 청년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도 망했다. 그에게서 받아야 하는 외상값이 4백만 원이 조금 넘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미지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그는 이 사업을 하기 전 일본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았다고 한 일이 있었고 마치 한국 가정에 김이 있는 것처럼 일본 가정에서는 생 참치가 이미 대중화되어 있음을 보고 한국에서 생 참치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냉동 참치 맛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에게 어찌 생 참치 맛을 알게 하겠느냐? 달걀로 바위를 깨겠다는 무모함이다.
나는 여유롭게 차를 몰았다. 언제 봐도 새로운 이 필리핀의 시골 자연의 풍경엔 그저 내 마음도 한 점 욕심 없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립스의 멜린다에게 나를 진심으로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는 일이다. 문득 그 여자가 "나는 내남편을 죽여 버렸다"(I killed my husband)라 하면서 쓸쓸히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딘가 본 듯한 얼굴, 어디서 본 얼굴인가?
아! , 아! 한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6.25피난시절 밀양 내지 친척집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그 소녀다. 나는 아홉 살의 소년이었고 그녀는 7살은 되었을 것이다. 한 달 넘게 지내는 동안 뒷산에서 소도 먹이고 들꽃도 따고 메뚜기도 잡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오빠야 이 꽃 좀 봐라, 오빠야 메뚜기 잡았어, 오빠야 저 매미 좀 잡아줘" 하였던 그 소녀! 내가 부모님 뒤를 따라 다시 고향으로 떠나올 때
"오빠야! 잘 가제이"
하며 한없이 울던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침 산 위 전망대에 도달했으므로 나는 이곳에서 차를 세웠다. 커피를 한 잔 빼 들고 전망대 의자에 앉았다. 내 나이 70을 바라보는 때에 아직도 내 가슴 한 구석에 이름 모를 소녀의 잔영을 간직하고 있다니, 나는 애초 시인이 되었어야 할 것이었는데……
필립스로 바로 갔다.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여야 할 멜린다는 없었다. 직원들이 판나이(Panay)섬으로 출장 중 이라 하였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연육사업을 접었다, 엄청나게 많은 자본금이 필요한 걸 알고 투자자를 찾았으나 실패하였다. 오늘 세부로 철수한다. 그 동안 당신이 진심으로 도와주어서 고맙다.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기를 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행운을 비오 (Good Luck Mr Lee_"
"당신에게도 행운을 (Same to you, Mel)"
이렇게 멜린다와 헤어졌다. 섭섭한 마음 한량없다.
임대한 집에 오니 사돈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스포티지 의자를 접고 짐을 차근차근 실어니 운전석 옆자리까지 다 꽉 찼다. 다시 다바오로 갔다. 잰산에서 가가얀(Gagayan)으로 바로 가는 길은 곳곳이 위험함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사돈 집 근처에서 자주 들렀던 식당에 들어가서 사돈과 함께 마지막 점심을 들었다. 회사를 폐업하였느냐, 자본금 예탁금은 언제 찾게 되느냐, 무슨 문제는 없느냐 하면서 마지막 정리를 하였다. 나오면서
"사돈 그 동안 도와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빨리 새로운 직장을 찾기 바랍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잘 계십시오, 또 만납시다"
다바오로 오면서도 나는 멜린다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여러 차례 맛있는 샌드위치와 도시락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점심때 함께 먹었던 생각이 떠나질 않는 것이다. 비록 사업은 실패하였지만 한 여인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 싶다. 손목 한번 잡아 본 적은 없지만…
크라운 레전시(Crown Regency)에 들러 수영도 즐겼다. 이것이 다바오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른다.
이튿날 새벽길을 나섰다. 가가얀까지는 장장 6시간이 걸린다고 하니까 일찍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 버스로 한번 다녀 본 길이긴 하여도 내 차를 가보기는 처음이다. 내륙 민다나오의 모습은 많은 구름이 있고 오르막 내리막 산길도 많다. 터널 몇 개를 뚫으면 아주 편한 길이 될 것인데 말이다. 길에 드리워진 뭉게구름의 그림자도, 소나기도 한차례 만났다. 천천히 한가로운 마음으로 무언지 모를 행복한 마음으로 가끔 애송시 몇 편을 낭독해 보면서.
정오쯤 도착해서 자동차 선적절차를 마무리 하였다. 저녁 7시까지 많은 시간이 있다. 시내를 돌면서 세부에서 옮겨간 매장 몇 군데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모두들 아직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건설 예정지도 둘러보고 주재원 사무실을 찾아 들어가서 앞으로 할 일이 없는지도 알아보았다. 세부로 오는 큰 배에 몸을 실었다. 갑판에 나와서 맥주 한 병을 사서 들었다. 멀어져 가는 가가얀 데 오로(Gagayan De Oro) 항구의 아름다운 불빛을 바라보면서 문득 상념에 잠긴다.
주재원 시절 끝 무렵 세부 한인교회에서 주선한 2박3일간 여행한 일이 기억났다. 저 항구 남단 한 바닷가에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 때 아내는 행복했고 활짝 꽃이 핀 듯 아름다운 자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병이 깊었다. 뇌졸중이 온지 8년 동안 몸이 조금씩 쇠약해져 온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쏟는 정성이 부족한 것일까? 아내에게 잘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달 전에 1월 21일 40주년 결혼기념일을 연육사업에 몰두하느라 깜빡 잊고 지난 것이 생각났다. 마누라가 그때 무심코 지나버린 것을 나에게 말을 한 일은 없지만 속으로 섭섭해 하지 않았을까?
이제 내가 어질러 놓았던 주변 일들은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다. 어디 한번 이번에는 북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오래 전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아내는 얼마나 기뻐할까? (주; 이 여행기는 "어떤 사부곡"에 잘 실려 있다)
.3. 언덕위의 집
2008년 5월 초 반타얀 여행에서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한 대로 집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제 자동차 판매 사업이 중단되었으니 이 기간에 앞으로 아내와 살아갈 집을 짓기로 맘먹은 것이다. 집 지을 땅은 오래 전에 구입해 둔 것이었다. 로얄 세부 에스태이드(Royal Cebu Estate)란 주택단지이다. 건설업자에게 통째로 맡기는 것이 아니고 설계와 공사 감독을 할 사람을 채용하여 이 사람에게 일정 수수료를 주고 자재와 인건비를 사급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앞서 사위집을 지은 바 있는 엔지니어 보봉이라는 사람을 채용하였다. 이 사람은 공항관제사로 막탄 국제공항에서 일하고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임으로 하루 근무시간이 3시간뿐이었다. 여가 시간이 많았으므로 이런 집 짓는 일의 공사감독을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에게 지불할 감독수당은 매월 총 인건비의 10%였다. 앞서 딸의 집을 지을 때 그렇게 지불 하였다고 한다.
건축 설계도는 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최종 마무리 되었고 컨소라시온 시의 건축 허가를 받았다. 설계비 40.000페소를 지불하였다.
엔지니어 보봉이 작성한 총 공사비는 6백만페소(1억 5천만원)이었다. 모든 건축자재는 그날그날 시내에 있는 건축자재상에서 사다 날랐고 모래, 자갈은 보봉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비교적 싼 값으로 구매하였다. 그가 필요량을 전화로 알려주면 현장으로 배달되었다.
집사람이 집 짓는 일을 구경하고 싶어하였슴으로 매일 올 수 있게 조치를 하였다. 먼저 공사현장에서 한 50m 떨어진 길가에 우람하게 선 망고나무의 짙은 그늘 밑에다 나무 평상을 만들었다. 동쪽으로는 멀리 막탄섬 다리와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서쪽으로는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람이 언제나 시원하게 불어오고 있어서 그냥 몇 시간씩 있기는 좋은 곳이었다. 오전에 도리스가 시내 병원으로 가서 재활 치료를 마치고 곧장 여기로 온다. 집에서 나올 때 세 사람이 먹을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오게 해서 함께 먹었다. 집 사람은 평상에 걸 터 앉아 집일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침상에 드러누워 낮잠도 즐기고, 또 도리스와 함께 걷는 연습도 하였다. 내가 일을 마치면 내 차로 공장 숙소로 돌아오고. 아내에겐 이것이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매일 건축일지를 상세하게 적어 나갔다. 보봉이 작성한 공사 계획표를 보고 나는 이른 PERT기법을 사용하여 세밀하게 재작성 하였다. 보봉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라 하면서 현장 사무실에 걸었다.
나는 오로지 집 짓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회사업무 용으로 포타 트럭을 내가 직접 운전하면서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자재를 사다 날랐다. 나는 신이 났다. 에어컨이 없는 트럭을 운전하면서 숱한 땀을 흘렸으나 조금도 고단한 줄 몰랐다. 마누라는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 이것이 좋고 또 집의 기초공사가 완료되어 기둥이 세워지고 슬라브가 쳐지고, 기와가 이어지고 하여 집이 점점 완성 되어가는 모양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되었다. 지붕 기와나 태양열 집열판은 마닐라에서 사서 가져왔다.
완공이 거의 가까워 질 무렵 뜻 밖에도 마누라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왼 쪽 유방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중풍으로 고생을 해온 터에 또 유방암 수술이라니 아내가 불쌍해서 잠을 못 이룬다. 낮에는 간병인이, 밤에는 내가 병실을 지켰다. 아내는 9일 만에 퇴원을 하였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나도 병원 신세를 졌다. 차를 모는 도중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신호에 걸려 정차를 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모른다.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경찰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운전대에 엎드려서 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딸과 사위가 병원으로 달려와서 나를 중화 병원으로 옮겼다. 마누라가 유방암 수술을 받았던 곳이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결과 뇌졸중 초기증세이고 과로가 겹쳐 허혈성이 나타난 징후가 있다 하였다. 꼭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집 사람을 간호해 온 터에 집을 짓느라 과로한 것이 탈이었다. 이번 일에 정말 아찔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금강경을 독송하였고 독송한 공덕을 회양하고자 발원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세원사에서 발간한 "풍경소리"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세원사는 마산에 있는 사찰인데 최근 주지 천우 스님이 이 곳 세부에서 절을 창건하기로 하고 우선 관세음보살 점안식을 올린 바 있다. 정안식 날 집 사람과 함께 동참하였고 내가 포교사임을 말씀 드렸더니 앞으로 잘 도와달라고 하셨다.
"풍경소리"에서 화엄경의 한 구절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만난다.
무엇이든지 버리면 그에 상응한 것을 얻게 된다.
근심을 버리면 건강을 얻게 된다.
"꽃을 버려라", "강을 버려라"하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집착을 버리라는 뜻임을 알았다. 나는 차량과 부품 값에 집착하여 그 동안 빨리 정리를 못한 것이 내 골머리를 앓게 해 왔던 것이라 깨달았다. 사실 내 병의 원인도 거기 있었음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김준 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나의 병실을 찾아왔다. 이 젊은 청년부부는 선희네 집 이웃이었는데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우리 차량을 렌트해 쓰기도 하였다. 병원진단 결과가 뇌졸중 초기 증세라고 하였더니 김준의 아내는
"아버님, 뇌졸중 초기증세라면 한국으로 빨리 들어가셔서 후유증을 없애기 위한 치료를 받도록 하십시오."
간호사 일을 한 바 있다는 이 사람의 말에 나는 한국행을 택하였다.
2009년 1월초 귀국해서 연세대 박수철 교수의 검진을 받았다. 그는 뇌혈관 MRI 사진을 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세부에서 운전 중 졸도해서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필리핀 병원에서는 나의 상태를 뇌졸중 초기 증세라고 진단하였다는 말을 하였으나 거듭 뇌졸중이 지나간 흔적이 아무것도 없이 뇌혈관이 아주 깨끗한 상태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이런 진단결과에 나는 환호하였다. 당장 박삼도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는 나의 말을 듣고 대단히 반가워하면서 저녁을 초대하였다. 마포가든에 가니 김태랑 윤대용 표용태 고향 친구들이 와 있었다. 나는 표 교수에게 나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전하고 일단 중단하였던 고향 친구 세부 초청을 앞서 계획한 대로 실행하자고 하였다.
2009년 2월 5일 나는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집으로 오던 중 갑자기 현기증을 느껴 가까스로 길옆에 차를 세웠다. 급제동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경찰 두 사람도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잠시 쉬고 있다고 하였더니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집 위치를 알려 주었더니 친절하게도 나대신 운전을 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 경찰들이 참으로 고맙다. 집에는 마침 사위 헥터가 있었는데 내 차로 이들 경찰을 태우고 근무지로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사위도 현기증 증세를 느낀다면서 차가 이상이 없는지 조사를 시작했다. 차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창문을 다 내리고 차를 공장으로 몰고 갔다. 점검 결과 LPG가스가 새고 있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이 차를 LPG로 바꾸어 사용해왔던 것이다.
아! 그러면 그렇지!
지난번 졸도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뇌졸중 의심을 완전히 씻었다.
중학동창부부 일행 17명이 3월 19일 세부로 왔다. 집을 완공하자 즉시 실천한 것이었다. 집을 크게 지었는데 친구들 친지들을 한 번씩 초대하여 놀다 가게 하려던 계획을 이제 첫 번째로 실행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은 첫날과 마지막 날은 나의 집에서 지내고 중간의 이틀밤은 시내 크라운 레전시 호텔에서 지내게 한 것이다. 3월 26일 돌아 갈 때까지 뱃놀이, 경치 좋은 곳, 맛있는 필리핀 음식, 온갖 열대 과일 등 성심성의껏 친구들을 환대하였다.
친구들이 다녀가고 난 다음 주에 아내는 뇌졸중이 재발하여 사지가 마비되었다. 오른 쪽마저 마비가 되니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으로 급히 들어와서 아산 병원에 입원하였다. 한국에 있던 고향 친구들이 주선을 해 준 덕택으로 입국 당일 입원실에 들어갔다. MRI 사진을 걸어 놓고 의사는 설명을 해 주었는데 한 마디로 심각한 상태라고 하였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어느 정도 언어 기능은 회복이 될 것이라 한다.
뇌졸중 집중 치료실에서 1주일을 보내고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리고 곧 재활치료를 시작하였다. 현대적 재활치료는 곧 효과가 있어서 아내는 말문을 조금 열었다. 이대로 가면 빨리 희복하겠다는 희망을 가지려는 즈음 병원에서는 퇴원을 요구하였다. 4주간이 최대 입원 가능 기간이라고 한다. 야속하지만 할 수 없이 동국대 일산 병원으로 옮겼다. 또 4주 후에는 병원을 옮겨야 하였으나 한방병원이 있어서 같은 병원 내에서 쉽게 옮겼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산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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