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4>…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제5부 정비. 판매

1. 대기 발령

민주화 데모는 절정으로 내달을 무렵 드디어 6.29 선언이 나왔다. 5공정부가 이를 수용하였다. 사태는 수습국면으로 돌아섰다. 파업도 끝나고 데모도 끝났다. 그 해 여름 난 대기발령을 받았다. 부하직원의 데모 현장에서 부상을 당하게 한 문책인사인가?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기획실 부로 발령이 나서 나는 대우빌딩에 있는 기획실로 출근을 하였다. 가서 보니 몇몇 부장과 연구소에서 같이 근무한 김종성 차장도 와 있었다. 부장들은 구매담당에서 같이 근무했던 자들이었다. 결국은 CI Team으로 왔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 준 모양이었다.

(내가 무슨 죄인인가? 좋다. 할대로 해 봐라) 나는 이런 오기심이 발동하였다. 최일선 기획실 부장은 우리를 보고 "그냥 좀 쉬어"라고 하였다.

김종성 차장은 나와 입사동기였다. 이 사람이나 나나 참 지지리도 못나고 순한 사람인가 보다. 그는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를 했던 반면 나는 여러 부서를 옮겨 다녔다. 같은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였으나 사귈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처지가 되고 보니 동병상린이라 할까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친한 사이가 되어갔다. 그는 내가 무엇이 좋았던지 하루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오후에 사무실을 빠져 나온 우리는 구로동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는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저능아였다. 손님이 왔으니까 인사를 해 보라고 하여도 들은 척도 않는다. 아빠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모양을 보이자 그 때서야 따라 해 본다. (아하 이 친구는 이 아이 때문에 고생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말에 의하면 부인은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자주 집에 들른다고 하였다. 아이 때문에 오래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퍽 밝은 표정이다. 친구도 그렇고 부인도 저능아를 가진 부모로서 어떤 자괴감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거저 담담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그의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 오면서 친구와 그의 아내의 평온한 모습이 자주 떠오른다. (이들 부부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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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회사에서는 대기 발령자들에 대한 처분을 내릴 모양이다. 김 차장이 먼저 인사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야 이차장 인사부장이 내일 아침 인사부로 출근을 하라고 하는데 무슨 일일까?"

"그야 뻔하지 뭐! 사표를 쓰라고 하겠지"

"어떡하면 좋겠어?"

"무얼 어떻게 해 사표는 죽어도 못 쓴다고 해"

나에게도 차례가 올 것이다. 그 땐 나는 똥배짱을 내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그는 풀이 죽어서 왔다.

"너 사표를 썼구나? 그렇지? 내가 그토록 말렸는데…"

"어쩔 수 없었어. 인사부장이 워낙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이런 배짱하고는… 그래 앞으로 어떻게 살꺼야?"

"뭐 대책이라고? 생각도 못해 보았어. 되는 대로 살면 되지 뭐"

그로부터 두어 달 후 다른 사람들은 판매점소장을 맡아 나갔고 나도 동서울정비센터로 발령을 받았다. 이는 최영재 상무님의 배려였다. 이 분은 부산공장에서도 같이 근무를 했고 부평공장 구매부서에서도 같이 있었는데 그 새 정비담당총괄로 자리를 옮기신 것이었다.

2. 동 서울 정비 센터

기획실 최일선 부장에게 그 동안 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고 곧 양평동 최 상무 방을 찾았다.

"동 서울 정비센터에 가서 우선 정비 일을 잘 배우고 있으시오. 그러면 기회 봐서 대전정비센터를 짓고 있는데 그리 보내 줄 터이니까"

"예 상무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다."

이때까지는 공장에서 차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내가 만든 차량의 고장 상태를 점검해서 고쳐 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시작담당에서 가졌던 큰 꿈은 노조 대의원의 부상으로 사회적 물의가 생기는 바람에 거기서 끝을 맺어야 했는데, 정비를 한다고 생각하니 이것은 새로운 희망이기도 한 것이었다. 정비 일을 잘 배워서 조그마한 카센터라도 운영해 보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성수동에 있는 동 서울정비로 출 퇴근을 시작하였다. 인천 구월동 대우아파트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교통수단은 오로지 버스와 전철뿐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동암역으로 가서 국철을 타고 시청에서 내려 2호선으로 성수역까지 가서 걸어가는데 꼭 2시간이 소요되었다. 고달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 서울 일반정비과에 부임하였다. 당시 소장은 백운형 차장이었다. 그는 부평공장 출신이었다. 안면이 있는 터였다. 내 밑에는 공장이 두 사람이고 직장은 여섯 사람이나 되었다. 일반정비과는 보증기간이 끝난 차량을, 그리고 사고차량은 돈을 받고 수리해 주는 곳이었다.

정비사업소의 표준조직은 소장 밑에 관리과 일반정비과. 보증수리과 자재과의 4개과가 있다. 관리과는 일반행정이고 보증수리과는 보증기간 내에 있는 차량들을 무료로 정비해 주는 곳이다. 일반정비과는 돈을 벌어야 하고 보증수리과는 돈을 쓰는 곳이다. 엉업실적은 두 과의 상반된 업무 성격에서 자주 의견 충돌도 일어났다. 소장 입장에서 보면 단연 일반정비과의 실적 향상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니 소장은 나를 채근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일반고장차량이나 사고 차량 수리를 더 빨리 많이 해서 돈을 벌어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표들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전임자보다 실적이 자꾸 떨어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출퇴근에 지치고 실적부진에 시달리던 나는 몸이 자구 지쳐가고 있다. 가슴통증의 빈도가 점점 많아졌다. 문제는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고 안전을 취하는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가 않는다. 그래서 난 근처 병원에 들어가서 한 두 시간씩 누워 있다가 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의 이런 사실들이 관리과장을 통해서 최 상무에게 보고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생각다 못해 근처 원룸을 얻었다. 출퇴근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아침밥만 집에서 챙겨먹고 나오면 점심 저녁은 회사에서 먹을 수 있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되니 저녁 야간작업도 가끔 감독하게 되었고 모진 추위도 피할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 내 건강 상태는 또 좋아졌다. 다행이었다. 난 원룸생활을 청산하였고 집에서 다시 출퇴근을 하였다.

그 무렵 대전 정비 센터가 완공되었으나 최 상무는 당초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보냈다. 내가 일을 잘 못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나를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예 단념을 하고 오로지 정비 기술이나 잘 배워보자는 일념이었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과정을 눈여겨보고 꼼꼼히 기록을 하였고, 또 직접 작업을 해 보기도 하였다. 뒷날 여기서 배운 정비 기술은 필리핀 주재원으로 일하였을 때나 중고 자동차 수출을 시작한 내 개인 사업에서 참으로 유용하게 써 먹은 것이다.

3. 중앙 추진실

1991년 6월 나는 중앙추진실 이라는 부서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대기발령이었다. 출퇴근의 고달픔에서 어찌되었건 간에 해방되었던 것이다. 중앙추진실은 남문가까이 제2식당 2층에 있었다. 가서 보니 무려 50여명이나 되었는데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온갖 직급이 다 있었고 모두들 보나마나 나 같은 꼴통들이었다. 나는 이미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기죽을 것도 없었다. 주어진 일도 없고 책임도 없었다. 인사부에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사표를 쓰고 나가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부평공장에 있으니 금강경독송회에 나갈 수 있었다. 정재영 차장이 이끄는 모임을 갖는 장소도 내가 있는 사무실 옆에 있는 클럽활동 회의실이었다. 모임은 점심시간이었는데 대개 12시 10분 정도 되어서 다 모였고 독경이 시작되었다. 난 여기서 독송용 금강경을 처음 보았다. 이는 정재영 차장이 서울 혜화법당에서 가져 온 것이라 한다. 기이하다. 이 책을 만난 인연이. 나는 점심시간만 기다려졌다. 12시가 되었다 하면 독송회 방으로 갔다. 알고 보니 여기에는 각종 모임의 방들이 따로 있었다. 산악회, 낚시회, 기우회, 테니스회, 신우회, 자전거 동호회 등등 모두 제각기 방이 있었고 활발한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내가 부평공장에서 떠난 사이 회사에서는 종업원들에게 이런 활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회사분위기도 많이 바뀐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노조파업도 없어졌고 데모도 없었다. 내가 부평공장을 떠난 지 4년여 동안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이는 6공 민선 대통령이 집권해서 격렬했던 한 시대가 지난 때문이었으리라.

정재영 차장의 안내를 받아 서울 혜화동에 있었던 금강경독송회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거기 모임을 이끌고 계신 김재웅 법사님을 만나 뵙는 인연을 만났다. 아내와 함께 매주 수요일 이 법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몸과 마음이 한 없이 지쳐있었던 것을 이를 계기로 회복 하는 기회를 갖게 된 때문이다. 내 마음 바치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대기발령을 받아 '할 일이 없다'란 생각을 하면 답답해진다. 이런 답답한 마음이 떠오르면 그 마음을 바치려고 애를 썼다. 김재웅 법사님의 법문과 같이 부처님께 무언가 복 짓는 마음을 내고 보면 주위에 할 일이 보였다. 내 주변을 정돈한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하는 조그마한 일들이다. 독송회 방 청소는 언재나 내가 하였다. 서랍에 꽃인 책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먼지도 털어 내고 걸레질도 해서 빤짝 반짝하게 만들었다.

같이 지내던 사람들 중에는 대우국민차 영업소를 차려서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 대우지정정비공장을 차려 자립하는 사람도 있었다. 좀 나이 젊은 직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떠나 간 사람의 빈자리는 그야말로 허전하다. 허전하다는 마음이 떠오르면 난 또 그것을 바치려고 애를 썼다.

11월 초쯤 정재영 차장이 나보고 익산에 있는 도솔암을 가 보자는 제의를 하였다. 나는 이 사람이 가 보자고 하는 절이면 반드시 뭔가 볼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를 따랐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전라선을 탔다. 기차표를 미리 사 두었던 터라 편히 내려갔다. 익산에 가니 벌써 어두웠다. 우선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도솔암을 물어서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저녁예불이 진행 중이었는데 우리도 예불에 참여하였다. 예불이 끝난 후 우리는 스님에게 3배의 예를 올리고 하룻밤 정진을 하고자 하니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스님의 승낙을 받고 요사채로 내려가서 이 절의 주인인 보살님을 친견하였다. 내려오는 차 중에서 정 차장은 이 보살님이 도솔암을 세우게 된 사연들을 이야기하여 주었고 이 절에는 미륵부처님 상이 모셔져 있다고도 하였던 것이다. 이 보살님은 80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이셨고 머리는 완전 백발이었다. 옆에 있던 공양주가 보살님이 귀가 약간 어두우니 큰 소리로 말 하라고 하였다. 정 차장이 큰 소리로

"미륵부처님 상을 친견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하룻밤을 지내고자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보살님은 쾌히 승낙하시고 손수 미륵부처님 상이 있는 곳을 안내해 주셨다. 우리는 3배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우리를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 주시면서

"이 방은 지금 대웅전에 모셔 둔 부처님이 계시던 곳이니까 이 방에서 하룻밤 지내면 부처님의 은덕을 받을 수 있을 게야"

하신다. 공양주를 불러 이부자리를 들리라 하셨다. 우리는 보살님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한 뒤 대웅전으로 다시 들어가서 금강경 독송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무슨 신심이 났는지 사전에 이야기 한 바도 없는데 금강경독송 7독을 단숨에 마쳤다.

이튿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나니 이 보살님은 점을 봐 줄 터이니 점괘를 뽑아보라 하시며 무슨 산통을 내밀었다. 산통에는 대나무가 들어있었다. 5개를 뽑아 던지라 하길래 그렇게 하였다. 보살님은 흐트러져 있는 대나무 막대들을 살펴보시더니

"자네는 지금 참 괴로운 처지에 있구만그려 조금만 더 참아 견디게. 그러면 모든 것이 곧 풀리고 앞이 창창할 걸세"라고 하신다.

나는 뜻 밖에도 이런 말씀을 얻어듣게 되었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친견한 것만으로도 앞으로 큰 음덕을 입게 될 것이야"

아침 일찍 사천왕문 위 문루의 대들보에 씌어져 있는 천서(天書)도 보았고 미륵부처님 상도 다시 참배하였는데 무언가 색다른 감을 받았다. 이런 터에 귀한 말씀도 해 주시니 우리는 한껏 고무되었다. 보살님께 정성껏 3배의 예를 올리고 귀로에 올랐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익산 도솔암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였다.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것이 곧 풀린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힘 내이소 여보!" 하고 아내도 기뻐하였다.

4. 판매 본부

1992년 새해가 밝았다. 중앙추진실에 남아 있던 직원 모두는 판매본부로 발령이 났다. 도솔암 보살님의 예언이 꼭 맞아 떨어진 것이다.

판매담당에 가보니 중앙추진실에 있었던 사람 이외에도 많은 직원이 와 있었다. 동서울정비에서 백 소장 후임으로 왔던 조 소장도 와 있었고, 엔진부의 정윤택 부장도 보였다.

판매사원 교육 일정이 배포된 걸 보니 2월 말까지 빈틈없이 짜여져있다.

(이제는 뭔가 되는가 보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밝은 마음으로 교육에 임하였다. 교육 마지막 일정은 지옥 훈련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강원도 어느 스키장 리조트이었는데 눈 덮인 높은 산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기도 하고 지옥 훈련과정을 통과하느라 무척 고생을 하였다. 2개월간의 지루한 교육이 끝났다.

이후 발령받은 곳은 원당영업소 관내 문산출장소이었다. 여기에 함께 발령받은 사람은 김 동진과 정 지수 두 대리이었다. 이들과 함께 일하니 나는 다시 생기를 찾았고 의욕에 넘쳤다. 두 대리는 부평공장 품질관리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인데 판매를 지원하여 온 것이다. 자신들이 판매를 해보겠다고 뛰어들었으니 당연히 의욕에 넘쳤다. 나도 오래 쉬었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해서 그 보충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산출장소 관할지역은 인근 파주, 적성, 법원 등을 포함하여 광대하였다.

원당영업소 소장은 배진홍부장이었다. 부산 버스공장에서 그는 자재과에 근무하였는데 언제 판매로 옮기고 서울까지 와서 부장으로 승진했는지 몰랐다. 그는 나에게 깎듯이 대해 주었고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출근길에 원당엉업소부터 먼저 들러서 배소장 얼굴을 보고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젊은 두 대리는 일하는 게 무척 민첩하였다. 판매 소구 활동을 하기 위한 기초자료 조사를 한 내용을 보니 엄청났다. 문산, 파주, 법원 및 적성 관내의 동, 가구수 인구 동장이름 전화번호 등이 있고 생활수준과 대우, 현대, 기아 각 회사별 차종별 최근 3년간 판매 대수 통계가 나와 있고 향후 판매예상대수 등이 일목요연하게 총 망라되어 있다. 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고 곧 배 소장에게 두 대리를 대동하고 보고를 하였다. 배소장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일찍이 이런 자료를 만들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배소장은 나를 대동하고 서울 판매본부로 가서 담당이사에게 보고하였다. 자료를 보고 난 이사님은 대단히 칭찬을 해주시면서 앞으로 문산영업소를 정식으로 개소하기 위해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배진홍 소장은 더욱 적국적이었다. 외근활동비를 대폭 인상해서 지급해 주었다. 그의 생각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세 사람이 다 인천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인천에서 문산까지의 출퇴근 거리, 관내 소구 활동 차 돌아다닐 거리 등을 꼼꼼히 적어서 유류비 지원 품의를 받았던 것이다.

판매에 나와서 일을 해보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세상은 넓어 보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갖가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 특히 문산 읍내 재래시장을 찾아보기를 좋아하였다. 거기는 치열한 생존경쟁 현장이었지만 한편 상인들의 후덕한 인심들을 만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5. 100일 기도

나는 3월 하순쯤 오랜만에 혜화법당을 찾았다. 판매로 가서 두 달간 교육을 받고 문산에서 판매활동을 시작하다 보니 그새 석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내가 다시 법당에 나가니 도반들이 반가와 했다. 김재웅 법사님께도 여전히 나를 웃음으로 맞아주셨는데 나는 그 동안 판매부서로 전보발령이 나서 교육을 받았고 문산영업소로 배치 받았다고 말씀 드렸다. "그것 참 잘 되었다"고 하시면서

"문산에는 금강경독송회 파주법당이 있습니다. 현재 파주법당이 비어 있으니 거기를 한 번 찾아보십시오"

난 이런 말씀을 듣고 파주 법당을 찾아가 보았으며 여기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나의 기도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우물가에 가서 세수를 하고 그리고 정한수 한 그릇을 떠 와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고 금강경을 독송을 연속해서 6독을 한다. 저녁에 나머지 1독을 하여 하루에 7독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물론 독송 후 미륵존여래불 정진을 하면서 내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을 바치려고 애쓴다. 잘 마음이 바쳐지지 않을 때에는 정진이 30분 이상이 되는 때도 있었다. 마음이 비게 되면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내면서 이 마음마저 부처님께 바친다. 그렇게 되니 대하는 사람 모두 부처님으로 여겨 공경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울어나게 되었다. 자동차판매 직업이란 내가 이렇게 하심(下心)을 하지 않으면 고객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오다가다 길가에 고장 난 차를 발견하면 다가가서 고장 진단을 해 주고 간단한 것이면 직접 고쳐주었으며 내가 못 고치는 것은 서비스 카를 호출해 주는 편의를 보였다. 그러면 그들 차주는 고마워하였다. 그 때는 내가 내 명함을 건네면서 차를 판매하는 사람이 남의 차를 고쳐주는 것도 하나의 업무라고 겸양을 한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고객을 소개시켜주기도 하였다.

이 100일 기도로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많이 받게 되었다. 우선 얼굴이 밝아졌고 협심증증세가 차츰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대리는 월셋방을 얻어서 거기를 임시 사무실로 쓰게 되었다. 나는 배소장에게 요청하여 전화와 팩스 한 대씩을 설치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피스텔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그 방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 하였다. 나도 파주법당에서 문산으로 바로 나오니 시간을 많이 벌었다. 세 사람은 판매 지역을 나누어 활동하기로 하였다. 우선 전단지를 도안하여 인쇄를 하였다. 전단내용은 문산영업소가 생겼음을 알리는 내용이고 연락처를 명기해 놓았다. 매일 번갈아 가면서 한 사람은 사무실에 남아 전화상담에 응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둘지 않았다. 하나하나 처음부터 일을 배워 나간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들의 신분은 전문판매원이 아니다. 그들은 차량 판매대수에 따라 보수가 결정된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뛰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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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법당의 나의 100일 기도는 아무런 장애가 없이 잘 계속되고 있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도 친숙해 지고 있었다. 법당으로 들어오는 길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내 차에 태우고 마을까지 왔다. 어떤 때는 출근 때 밖에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이 마을어구에 나와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 분들은 법원이나 파주읍 또는 문산까지 볼일이 있어서 나선 것이다. 나는 그냥 오는 걸음 가는 걸음에 조그마한 호의를 베푼 것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아주 고마워했다

6. 시산혈해

나는 적성에 자주 나가서 판매 활동을 하였다. 아담한 식당 한 곳을 정해서 점심 식사는 꼭 그 집에서 하였다. 대우 문산 영업소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차량 카다로그를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소구 활동을 하는 모습이 아주 좋아 보인다는 식당 아주머니께서 어느 날 가망 고객 한 분을 소개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곧 그 집을 찾았다. 60대 노장 부부가 제법 부유해 보이는 집에 살고 계셨다. 상담을 해 보니 현재 가지고 있는 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사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먼저 차분할 차의 상태를 먼저 점검하였다. 잠시 시운전까지 해 보고 나는 정지수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차량 제원과 시운전 느낌 등을 일러주고 인수할 적정가격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잠시 후 나의 삐삐가 울렸다. 곧 전화를 했더니 자기가 알아 본 가격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어떤 차를 원하는지 묻고 선택할 수 있는 차량들을 설명하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 차가 정해지자 판매가격을 처분 할 차의 평가 가격과 함께 말씀 드렸다. 판매조건도 결정하였다. 그래서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받았다. 참으로 기쁜 날이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원당영업소 배소장에게 판매 사실을 알렸다.

'형님! 축하합니다. 드디어 마수걸이를 하셨네요 당장 이리로 오이소. 제가 축하 파티를 열어 드리겠슴니더"

두 대리에게 함께 가자고 했더니 그들도 따라 나섰다. 영업소에 들러서 곧 계약서와 계약금을 직원에게 넘기고 배 소장을 만났다. 그는 또 한 번 축하한다고 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형님! 마수걸이를 했는데 우째 그냥 넘어갈 수 있능교? 마 가입시다"

그가 앞장서는 대로 따라가서 식사 겸 술을 마셨다. 아! 기분 좋은 날이다. 미륵존여래불!

며칠 후 아침 출근길에 원당영업소에 들러서 배소장을 만났다. 문산 영업소 설치에 대한 진행상황을 물었다. 회사방침이 좀 바뀌고 있다면서 나처럼 각 지역에 배치된 직원들이 원하면 독립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다.

문산으로 돌아와서 나는 두 대리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의견은 판매를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인데 뭔지 아직 잘 모르겠고 또 실적도 변변치 않다면서 당장 독립할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 나도 동감이었다. 그래서 배소장에게 우리 세 사람의 의견을 말하고 당초 계획대로 직영영업소 설치를 해 달라고 이야기 하였다.

한편 나의 출퇴근은 너무 힘 들었다. 인천에서 문사까지가 70km나 되고 또 거기서 파주 법원 적성 등을 다 돌아 다녀야 하니 힘 들었고 집에 돌아오면 거의 녹초가 되곤 하였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아내는 속으로 불만이 쌓여 갔던 모양이다.

문산출장소를 개소한 지도 어언 2개월이 지났다. 사무실만 있는 영업소이다. 그리고 여전히 원당영업소 관할이었다. 두 대리도 열심히 일을 하였고 드문드문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나도 세 번째 차량을 팔게 되었는데 적성 그 첫 손님이 소개해 준 것이다. 그 첫 손님에게 자주 들렀고 무슨 문제점은 없는 지 차량을 정성껏 관리해 주었더니 그 고객은 나의 성의에 감탄한다면서 다른 손님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였다. 차량을 판매 해 놓고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해 주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 할 수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차를 파는 일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찾아 다녀서 소구 활동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도 알았다. 두 대리가 하는 것을 보니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명부를 만들고 그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내는 것을 보았다. 난 이것도 좋은 방법이구나 생각해서 나도 그렇게 해 보았다. 그러다가 컴퓨터를 사용해서 활자화 하면 더욱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놀고 있는 컴퓨터를 들고 사무실에다 설치를 했다. 사용방법을 전혀 몰랐으므로 일요일 둘째 딸을 데리고 와서 배우기도 하였다. 딸이 고맙게도 한글자판 익히기 프로그램을 찾아 주어서 그대로 하였더니 쉽게 숙달할 수 있었다. 대구상고 1,2학년 때 배웠던 한글타자기의 글자 배치와 거의 비슷해서 그때의 타자 솜씨를 금방 찾았다. 내가 열 손 가락을 자판을 보지 않고도 빠르게 문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 대리는 놀라워했다. 전문판매직원들이 한 달에 대략 5대 정도 팔면은 성적이 좋은 편인데 이때 그들의 월급은 삼백만원 정도 되었다. 사람이 남에게 고용되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써 자기 월급의 3배를 벌어드리겠다고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면 자신이 주인의 마음이 되어서 떳떳해 진다는 김재웅 법사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던 나는 한 달에 최소한 3대를 팔 모표를 세웠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때 그 때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많았다. 난 원당영업소에 쓰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카다로그들을 매일매일 비우기 시작했다. 그 카다로그에 내 명함을 스티카로 만들어 붙이고 나는 그것을 문산 읍내 거리의 차량에다 꽂아놓기도 하고 집 대문 안에 들여 놓기도 하였다. 어차피 쓰지 않고 쌓아 둘 카다로그라면 그것을 그냥 두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꼭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지는 몰랐지만 판매원이 현장을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할 것이라면 이런 방법도 그 중의 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엔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만 보내다가 이번에는 조그마한 월간지 "맑은 샘"을 보냈다. 책을 받아보면 사람들이 한결 부드러운 마음이 될 것이다. 딱딱한 편지는 읽기 어려워도 책을 다 보지 않더라도 거저 한번 훑어보기는 할 것이다. 하여간 나는 잠시라도 놀지 않았다. 이런 무모하기까지 한 나의 활동을 보고 두 대리는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하였다. 그들이 오죽하면 나를 그렇게 보았을까? 사실 나도 어떤 때는 너무 고달프고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읍내 시장통을 찾아가서 치열한 생존경쟁현장을 피부로 맏닥드려 보곤 하였다.

나는 내 차부터 바꾸었다. 그때까지 난 구닥다리 맵시를 몰고 다녔는데 이를 큰 딸에게 주고 에스페로로 바꾸었다. 그래도 영업소장 체면이 있지 적어도 에스페로 정도는 몰고 다녀야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까.

내가 차를 바꾸던 달 부산에 살던 넷 째 여동생이 차를 샀다. 처음 사는 차인데 오빠 회사의 차를 산 것이다. 그래서 이 달에는 나의 차 자살 골을 포함해서 처음으로 두 대 판매실적을 올렸다.

7. 수상의 영광

청주에 사는 고교 동창 조정길이가 전화를 해 왔다. 나의 편지를 받았으며 보내준 책도 잘 보고 있다면서 차를 한 대 사고 싶다고 하였다. 운전면허를 이제 막 땄는데 내가 차를 사면 시내주행 연수를 시켜주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반가워서 쾌히 승낙을 했다. 차를 내가 직접 몰고 가져다 주겠으며 숙달할 때가지 시내연수를 시켜주겠다고 하였다. 마침 내 큰 딸이 청주에 살고 있으니까 며칠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아무 문제 없다고.

그래서 곧 상담이 진행되었는데 차종을 먼저 결정하였다. 가격 지불 조건은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견적서를 작성하여 그의 사무실에 팩스로 보냈다.

곧 그의 전화가 왔다. 그가 선택한 견적서대로 매매계약서를 작성해서 또 팩스로 보냈다. 계약금은 원당영업소 은행계좌로 곧 송금이 되었다. 배 소장은

"형님! 축하합니다. 오늘이 9월 초 하룬데 계약을 성사시켜서 이번 달은 예감이 좋심더"

하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판 차에 대해서는 우선해서 출고가 되도록 조치하겠다고 한다. 고맙다. 배소장이 말한 대로 예감이 좋다. 무언가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성주에서 내 대학 동기였던 김진권이라는 친구가 전화를 해 왔다. 참으로 오래도록 소식 없이 지내왔는데 반갑다. 내가 신진자동차에 입사를 해서 그 소식을 한 번 알렸고 그리고 답장을 받은 이후로 죽 소식 없이 지내 온 것이다. 너무나 반가워서 형수님과 아드님의 안부부터 먼저 물었다. 형수는 손자를 봐서 잘 있고 아들은 대구시내에 직장을 잡아서 살고 있다고 한다. 대학 시절 간난 아기였던 그 아들이 장가를 가고 직장을 잡고 있다니 그 동안 참으로 격조했다.

그는 아들이 쓸 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도 역시 내가 보낸 편지와 책을 잘 받고 있는데 내가 영업소에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들 회사의 전화를 알려 주어서 곧 통화를 하였다. 이후 진행사항은 앞서 청주 내 친구와 같은 순서로 밟아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송부 받았다. 배 소장은

"형님! 이젠 날개를 달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벌써 2대를 계약했으니 계속 잘 해서 이번 달에 일등을 해 보시지요. 마침 본부장이 인센티브를 걸어 놓았심니더"

그리고 직원을 시켜 먼저 계약차량의 출고가 언제 될 것인지 알아보고는 출고일을 이리저리 조정하여 다음 주에 되도록 하였다. 청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중반에 출고가 예정된다고 알려 주었더니 벌써 출고가 되느냐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금요일에 차를 몰고 가서 일요일까지 주행연수를 시키면 충분하리라 생각해서 그렇게 정했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마누라에게 청주 딸네에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 심통이 나 있는 마누라에게 기분전환의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마누라는 여전이 심드렁한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좋은 모양이다.

목요일 출고증이 나왔다고 직원이 전화를 해 왔다. 퇴근길에 출고증을 받아 들었다. 내일은 아내하고 즐거운 여행을 한다. 큰 딸에게 이미 기별을 해 두었다. 2살배기 손자가 어서 보고 싶다 금요일 아침 난 제일 먼저 출고사무실에 가서 차를 인수받았다. 곧장 집으로 가서 마누라를 태우고 청주로 향하였다. 시내를 벗어나니 초가을 농촌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옆 자리의 마누라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참으로 친구 덕분에 우리 내외간은 기분 좋은 여행을 하였다.

오후 약속시간에 친구가 왔다. 반갑게 악수를 하였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는 공설운동장으로 가자고 한다. 운동장은 넓고 아무도 없다. 운전주행연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운전면허를 땄다고는 하지만 우선 차를 조작하는 기본 동작에 먼저 익숙해야 한다. 우선 직진으로 출발 정지를 반복시켰다. 다음은 출발해서 2단까지 변속하기를 반복시켰다. 그 다음은 출발-2단 -3단-2단-정지까지, 그 다음은 출발-2단-3단-4단-3단-2단-정지까지 이 단계를 계속 반복시켜서 숙달이 되도록 하였다. 마지막 5단까지의 변속은 직진 주행으로는 불가하여 보류하였다. 마지막은 후진을 출발 –정지 반복해서 감을 익히게 했다. 여기까지 하고 휴식을 하였다. 휴식 중에 자동차의 엔진후드를 열고 중요 부품 명칭을 이야기 해 주었다. 연관된 기능과 함께. 둘째 시간엔 4각형 운동장을 도는 연습이다. 각 모서리를 유연하게 회전하는 요령을 숙달시켰다. 한 3,40분 쯤 돌고 도니, 기아 변속, 핸들조작, 가속, 제동 등 모든 것에 완전히 숙달하는 것이다. 난 친구의 순발력이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또 휴식을 하였다.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번져 나갔다. 처음 가진 두려운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 그 다음은 파킹 하는 법을 가르쳤다 운동장에다가 아파트와 같은 주차공간을 그어 놓고 차를 그 한 가운데 주차시키는 요령을 가르쳤다. 전진으로 들어가기 그 다음 후진으로 들어가기 순이었다. 다음은 일렬 주차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오로지 후진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좀 어려운 모양이었지만 반복 연습을 하니 곧 숙달하였다. 첫날은 이렇게 끝냈다. 돌아 올 때에는 내가 운전을 해서 사위집으로 왔다. 그는 저녁을 사겠다고 하였으나 내일로 미루었다. 손자가 보고 싶어서.

다음날 토요일 오전부터 시작하였다. 공설운동장으로 가서 어제 연습을 하였던 것을 반복 연습시켰다. 충분한 가속을 시켜 5단 기어까지 넣은 것도 잘 하였다. 이제는 시내를 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기 전에 운동장 주변도로를 먼저 주행해 보기로 하였다. 이 도로는 왕복 2차선 도로이며 무척 한가하다. 게다가 신호등도 두 군데나 있다. 안성맞춤이었다. 한 열 바퀴쯤 돌고 나서 운동장 안으로 들어와서 또 휴식을 하였다.

"차란 쉽게 말하면 달리는 기계이다. 무슨 기계이든지 사람이 주인이고 사람이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 조작하는 방법을 지금 습득 중이니까 마음 놓고 배워라"

"그래 그래 네 말 잘 알아 듣겠다 네가 이렇게 차근차근 쉽게 가르쳐 주니 잘 되고 있는 것 같다. 친구야 참 고맙다"

"고맙긴 뭐가. 차 파는 사람은 이것이 뭐 직업인데 내일 내가 하는 거야"

잠시 휴식을 하고 난 다음 운동장 외곽 길을 또 돌았다. 가끔 마주 오는 차도 지나가고 뒤 따르는 차는 추월을 시도하지 않았다. 신호등을 통과하는 것도 곧 잘 하였다.

"네가 이제 시내를 나가 봐도 되겠다는 자신이 있지?"

"그래 자신이 있어"

"그러면 우선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서 좀 쉬자 그러면서 네가 가고 싶은 곳 목적지를 먼저 정해라"

쉬면서 그는 목적지를 정했다고 한다. 그 곳까지 가는 길을 정해라고 하였다. 아무리 잘 아는 길이라도 차를 운전해서 가는 길은 또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출발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서 가볍게 몸을 움직여 풀고 심호흡도 몇 번 하였다.

"긴장을 풀고 자 출발. 옆에 있는 나를 의식하지 말아라"

그는 복잡한 시내 길도 잘 통과해서 자기가 정했던 길을 한 순간 착오도 없이 잘 해내었다. 앞 차와 거리를 유지하는 일도 차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잘 익혀 나갔다. 드디어 그는 차를 세웠다. 그가 근무하는 회사로 온 것이다. 빈자리에 얌전히 주차를 하였다.

"부라보! 축하한다. 첫 주행을!"

때마침 점심시간이 막 되었으므로 많은 회사 사람들이 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몰려왔다. 친구가 소개하기 전에 나는 내 명함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내가 자동차 판매 사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친구가 이끈 대로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푹 쉬었다.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친구에게 운전 연습을 시키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내가 운전교습을 받았던 때를 생각해서 그렇게 차근차근 가르쳤는데 내가 생각해도 잘 하였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참으로 힘든 일이다. 김동진, 정지수 두 대리는 나를 두고 시산혈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나는 결코 이 말이 싫지가 않았다. '부처님 시봉하겠다'는 마음인데 무슨 일이라도 못할 손가.

3시쯤 그는 회사 일을 마쳤다. 이번에 친구는 시내를 돌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시내 길을 어떻게 돌아 볼 것인가를 미리 정하라고 하였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2시간 동안 돌아다닌 것 같다. 그는 드디어 자기 집 아파트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자기가 사는 곳이라 한다. 나는 친구가 몇 동 몇 호에 사는 지 물어보고 친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친구는 그냥 들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길가에 나와서 뭐 살 것을 찾아보았다. 나는 케이크 하나를 사 들었다.

그의 집에 들어가니 친구 부인이 벌써 술상을 보아 놓았다. 생선회를 상에다 올려놓았다. 소주와 맥주 중 나는 소주를 택하였다. 소주는 내가 좋아하는 술이다. 친구와 나 두 사람은 무슨 큰일을 끝마친 사람들 같이 마음 끈 풀어 놓고 술을 마셨다. 공기 밥과 매운탕도 나와서 배불리 먹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내일 오전 까지는 시간이 있는데 더 주행연습을 해 보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되었다고 하면서 웃는다. 이로써 주행연습을 시켜주겠다고 한 나의 약속은 지켜졌다. 친구는 밖에 나와서 택시를 잡아 주었다.

나의 판매활동은 가속도가 붙었고 열이 올랐다. 여태 가보지 않았던 조그만 절도 찾아가기도 하였다. 원당 영업소에 쌓여 있었던 카다로그는 완전히 비워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이번에는 연달아서 계약을 한 쾌거를 올렸다. 그것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드나들었던 적성면사무소 직원과 문산 등 넘어 있는 한전 변전소 직원이 르망을 샀다. 배소장은 나를 격려하였다.

"형님! 조그만 더 힘을 내이소. 지금까지는 일등입니다. 본부장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형님을 주시하고 있슴니더"

이제 마지막 주간이다. 나는 여러 군데에 전화를 걸고 안부를 겸해서 주위에 차를 살 가망고객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난주엔 성주 친구의 아들이 부평 출고 사무소에 와서 차를 인수해 갔다. 그 아들에게도 전화를 해서 차가 이상이 없는지 알아보았다. 나의 판매활동은 잠시 쉴 틈이 없다. 전화 걸기, 편지나 판촉물 보내기, 방문, 전단지 직접 돌리기, 등 무엇이든 일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반갑게도 청주 친구가 자기회사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부라보! 나는 쾌재를 올렸다. 2주 전에 친구의 회사에서 내 명함을 나누어 준 일이 있는데 이 분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구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로써 나는 한 달에 다섯 대를 파는 쾌거를 올린 것이다. 꼭 한 대를 더 실적을 올렸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청주 친구의 도움으로 그것을 이루었다. 10월 달 첫 주 나는 상을 타려 서울 본부장실에 들렀다. 배 소장도 와 있었다. 본부장은 나의 손을 꽉 잡고

"배 소장으로부터 얘기 잘 듣고 있었소. 열심히 뛰고 계시니 이런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요 축하합니다." 그리고 본부장은

"이건 내가 건 인센티브입니다" 하면서 봉투 하나를 주었다. 그리고 금으로 된 대우자동차 뺏지를 내 양복 깃에다 달아 주었다. 본부장실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우렁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한없이 기뻤다. 중앙추진실 대기발령으로 치욕스럽던 때를 잘 참아 지냈던 것이 오늘의 기쁨도 맛보게 된 것이다.

혜화법당으로 가서 금강경 독송을 하면서 기쁜 마음을 부처님께 바쳤다. 십만원을 봉투에 넣어 부처님께 드렸다. 한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원당영업소에 들러서 사무실 직원에게 내가 오늘 저녁 한턱 쏠 터이니까 전 직원에게 연락을 하고 그리고 회식자리를 예약을 해 두라고 일러두었다. 원당법당에도 들렀다. 혜화법당에서 한 것과 똑 같이 하였다.

문산영업소에 오니 직원들이 이미 소식을 듣고 나에게 축하인사를 해왔다. 파주법당에 전화를 거니 젊은이가 받았다. 뭐 불편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는 것이다. 읍내 바닥을 훑어서 냉장고 수리점을 찾았다. 법원 어은리 파주법당에 찾아가 냉장고를 고치도록 조치하였고 수리비는 얼마가 되었던 내가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하루 종일 기쁜 마음으로 돈을 쓰는 날이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많은 직원의 축하를 받았고 술을 권하는 대로 받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배소장과 단 둘이서 2차를 갔다. 그는 나를 꾸준히 격려하여 주었고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부산버스공장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을 소중히 생각해서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격의 없이 대해 주었던 것이 너무 고마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 모두 대취해 버렸다. 두 사람은 근처 여관으로 들어가서 잤다. 나는 너무 취했으므로 마누라에게 전화도 걸지 못했다.

적성면사무소와 문산 한전변전소 직원의 차는 내가 직접 차를 출근하는 길에 몰고 가서 갖다 주었다. 퇴근하는 길은 김 대리나 정 대리의 차에 동승하였다. 이번 10월 달에도 나의 예감은 좋았다. 이미 판매에 길을 닦았으니 잘 해 나가고 싶었다. 그 즈음 나와 함께 판매로 나온 사람들 중에는 적응하지 못해서 회사를 떠난 사람도 생겨났다. 내가 그 때까지 경험한 판매는 고달픈 직업이고 힘이 드는 직업이었다. 경험과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연륜을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원당법당 노장도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차를 한 대 팔면 그 고객에게 정성을 다해서 돌봐 주라. 그리하면 그 고객은 다른 고객을 소개해 주게 된다. 고객이 고객을 불러 주는 것이다."

분명히 이 도인이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 동안 이 도인의 말대로 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고객이 고객을 부르다' 나는 이미 두 차례 이것을 경험하였다 이처럼 연륜을 쌓아 가야 한다. 나의 판매활동은 치열한 삶 그 자체였다. 곧 닥친 문산의 모진 추위와도 싸워야 했고 빙판길을 달리다가 자동차 사고도 크게 당할 뻔 하였다. 장거리 출 퇴근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문산읍 외곽에 사글세 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도 하였다. 모든 고통의 시련을 참고 견딘 힘은 무어라 해도 파주법당 100일 기도의 힘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해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부처님 시봉 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것이다. 이렇게 판매에도 잘 적응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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