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470 Project
1. 경력기술자 채용
1984년 7월 드디어 회사는 4년 전에 중단했던 신차생산 프로젝트를 재개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 사업의 제목은 "470 Project"라고 명명하였다. 회사는 이전의 특수사업본부보다 훨씬 큰 조직을 발표하였다. 나도 당당히 합류하였다. 나의 소속은 공장건설1부분 엔진/서스편션 담당이었다. 이로써 나는 엔진부를 잠시 떠나있게 된 것이다. 내가 자청해서 석별의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서 난 김 공장과 직장들과 손을 잡고 공장건설이 완료되면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이전의 트란스 엑슬팀은 없어졌다. 전륜구동의 트란스밋숀(Transmission)과 엑슬(Axle, CV Joint)등은 새로운 방계회사를 설립하여 생산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결국 남은 것은 서스펜션(Suspention)조립공장만이었다. 고로 이 분야에선 내가 단연 회사 내에선 제1인자이었다.
엔지/서스편션 담당의 팀장은 김승언 부장이었다. 그는 나에게 엔진조립라인도 맡겼다. 엔진조립라인에는 과장과 대리 한 사람씩 있었고 서스편션에는 대리 한 사람이 배정되었다.
"470 Project"의 골격은 이러하였다.
생산품목; S-car (Project가 완성되어 생산되었을 때 르망이라고 명명되었다)
생산능력; 60 Job
SOP(생산개시일); 1986년 6월 1일
신규공장건설; 엔진공장, 서스편션공장, 프레스공장, 차체공장, 도장공장,
조립공장, 시험주행라인, 출고사무실 및 출고장
부대시설; 중앙전산실, 기술연구소 증축, 대형식당과 사무실
부평공장 30만평의 부지에 들어설 각 공장의 위치와 크기, 도로, 부대시설 등이 빼곡히 들어설 레이아웃(Layout)이 결정되었다. 이 중 제일 먼저 회사가 착공한 것은 대형식당과 식당 2층의 사무실이었다. 이는 공장 한가운데를 차지하였다. 이어 회사는 인력확보에 나섰다. 신문에 대문짝 광고를 게재하여 각 분야별 인원을 모집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기술연구소를 위시한 각 분야별 경력기술사원과 컴퓨터 요원, IE(산업기술) 전공자. 자재관리요원 등 실로 다양하였다. 엔진분야 지원자들에 대한 서류심사요청이 인사부에서 왔다. 김승언부장은 이를 나에게 맡겼다 .인사부 방침은 경력기술사원의 채용은 면접으로 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당부서의 필요인원은 그 부서가 책임지고 선발하라는 것이었다. 인사부에서 온 입사지원서류를 한 아름 넘겨 받았다. 서류채점을 끌 낼 때까지 회사에 출근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을 집에서 하든지 또는 여관에 들어가서 하든지 자유라고. 그러면서 외근수당이 라고 하면서 돈 봉투까지 받았다. 세상에 별일도 다 맡아본다.
나는 서류를 포장해서 싸 들고 집으로 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 부서가 필요한 인력은 각 부품의 기계가동과 엔지조립 및 테스트, 그리고 서스편션 조립 등이었다. 즉 엔진부품가공을 한 사람은 "A"그룹, 기타자동차부품 가공자는 "B"그룹, 나머지는 "C"그룹 등이고 근무 연수도 3년 이상이면 "A", 1년이상 3년 미만은 "B", 1년이하는 "C", 이런 식으로 채점해 보겠다는 기준이다. 학력은 대부분 대졸일 것임으로, 그리고 출신 대학에는 차등을 두지 않는다. 마지막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평가할까 고심하다가 기준을 정하지 못하였다. 채점순서는 경력분야와 근무 년수 만 먼저 해 놓고 자기소개서를 일괄 보기로 하였다.
앞의 것은 객관적이니까 쉽게 끝냈다. 그러나 자기소개서를 읽고 채점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글 내용의 진실성이 있느냐. 채용한다면 과연 근무를 잘 할 것인가. 처음에 점수를 매기지 않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뭔가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아내나 아이들이 처다 보기도 하여 나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한다. 나는 하는 일이 중요하다면서 모든 서류를 싸 들고 여관으로 갔다. 한번 자기소개서를 다 읽고 나니 채점기준이 떠 올랐다. 글 내용의 진실성, 글씨 및 글을 쓴 정성, 얼굴 사진상에 나타난 느낌 등이고 딸이 많은 나에게는 사윗감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대하였다. 마지막 채점표를 종합 작성하고 나의 의견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맨 앞장에는 채점기준표와 채점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해서 100여명이 넘는 서류심사를 3일만에 완료해서 김 부장에게 제출하였다. 채점표를 일별한 후 그는 나보고 많이 애썼다고 칭찬해 주었다. 60Job 짜리 대량생산공장을 짓는 일은 회사가 처음 하는 일이다. 따라서 회사의 운명은 이 "470 Project"의 성공여하에 달려있다. SOP도 정해졌다. 1986년 6월 1일에 생산을 개시하는 일은 절대적이다. 모든 직원들은 모두 이 SOP를 지상명제로 하여 함께 뛰어야 하는 것이다.
최종 면접 전형은 통과한 경력사원들 대부분은 내가 예상한대로였다. 난 면접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가 심혈을 기우려 채점한 서류전형이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실제로 이들은 "470 Project" 진행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 이 때 입사하게 된 사원들 중에는 뒷날 사장까지 승진하였던 사람도 있고,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2. 기계 사양서 작성
1984년 연말에 가서 두 번째로 독일 연수를 떠났다. 4년 전 연수의 목적은 프로세스스터디(Process Study)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 번에는 기계 매이커에게 견적을 요청할 사양서를 만드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그러니 OPEL 공장에 설치되어 가동중인 기계가 어느 메이커가 만들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독일 측 엔지니어가 추천하는 기계메이커도 받았다. 이 무렵엔 오펠(OPEL)측에서도 대우자동차를 지원하는 팀이 구성되었고 회사에서는 각 부문별 중개역할자(Cordinator)를 파견하여 OPEL팀과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팀웍(Team Work)을 이루었다. 엔진/서스편션의 코디네이터로써는 이수열 과장, 기술연구소에는 최현식 과장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GMI출신들이었다
두 번째로 보쿰 공장에 들렀다. 4년 전 만난 사람들과 재회하였다. 현장의 폴란드 출신 오버 마이스터도 다시 만났다.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준비해 간 선물인 거북선을 드렸다. 이 거북선은 이 순신 장군이 500여년 전에 만든 세계최초의 철선으로 일본 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유용하게 쓰였다는 설명도 해 주었다. 간단한 영어와 몸짓 발짓으로 설명해 주려고 애를 썼는데 다행히 나의 설명이 잘 이해가 되었던 모양으로 이것이 진짜 철로 만들어진 것이냐고 되 물었다. 나는 나무로 만든 배인데 철판을 씌운 것이라고 하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나의 손에는 기술용어사전이 항상 들려 있었다. 독일어기술용어 한 마디라도 의사가 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보큼 공장 현장에 설치되어 가동 중인 기계에 대해서 메이커, 그 기계의 장점, 단점, 고장빈도, 가동율 들을 오버 마이스터에게 물었다. 현장을 잘 아는 이 사람의 대답 한 마디 한마디는 천금과 다를 바 없었다.
가격견적요청서에 첨부할 기계사양을 작성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중 짬을 내어 나와 김부장 두 사람은 카이저스라우테른에 있는 한 공장을 방문하였다. 이 공장은 리어데드액슬(Rear Dead Axle)의 용접 조립을 하고 있으며 다시 이를 기계가공하고 마지막으로 리어 휠 스핀들(RR Wheel Spindle)의 360도 원주 용접을 하는 곳이다. 우리가 생산코자 하는 차량은 전륜구동이므로 뒷축(Rear Axle)에는 차동장치 (Differential)이 없다. 고로 리어데드엘슬(Rear Dead Axle)이라고 불렀다. 엑슬(Axle)의 양단에는 4각형의 두꺼운 쇠 철판이 용접으로 붙어있다. 이 철판은 아주 물렁쇠이다. 이 물렁쇠를 밀링가공을 하여 평면이 되게 한다. 그 다음 드릴 작업으로 구멍을 뚫고 휠스핀들(Wheel Spindle)을 압입한다. 기계가공라인의 작업은 여기서 끝나고 다음은 용접작업이다. 철판에 압입된 부위 360도 원주를 가스(Co2)용접을 하는 작업이다. 이 용접이 된 스핀들(Spindle)에 두 바퀴가 최종 조립되고 자동차가 달리는 것이다. 이때 지면에서 받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물렁쇠를 붙여 논 것이다.
물렁쇠를 절삭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가공절삭성이 아주 나쁘기 때문이다. 이 기계를 만든 곳은 혼스베르그(Honsberg)라는 회사이다. 기계를 만드는 노하우(Know-How)를 분명 갖고 있는 회사이다. 원주 용접하는 기계도 만만치 않다. 큰 원통 속에 용접 지그(Jig)가 설치되어 있다. 원통 속에서 다섯 단계공정이 진행된다. 첫째는 소재를 장착(Loading)하는 것이고 두 번째에는 용접기는 고정되어있고 Jig가 360도 평면으로 한 바퀴 돈다. 그 다음은 반대편을 용접하기 위해서 Jig가 수직으로 180도 회전을 한다. 4번째 공정에서 두 번째 공정과 똑 같은 용접을 한다. 다섯 번째는 내려놓기(Unloading)이다. 모든 작업은 전자동으로 움직인다. 이와 같이 만든다면 기계 값이 비쌀 것 같다. 좀 간편한 방법이 없을까? 용접Jig가 4개, 용접기가 2대이다. 이 중 2대의 용접 Jig는 수평으로 360도 회전하고 수직으로 180도 회전을 서로 간섭 없이 해야 하니 자연 기계의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용접 중 발생한 Gas를 공장외부로 배출하고 또 용접 시 발생하는 불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원통형 구조는 좋아 보였다. 나는 이 기계를 용접 Jig 한대, 용접기 한 대로 간편화해서 작업을 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맘먹었다. 김 부장도 나의 생각에 동감하였다.
OPEL 측에서 추천하는 기계 매이커는 현재 가동 중인 기계를 납품한 회사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독일 국내 메이커이다. 기계를 만든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원가 절감을 할 수 있어서 견적가격이 낮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다른 나라에도 2개 업체 정도 견적을 받아보아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여간 기계사양서 작성은 OPEL 앤지니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속속 완료되었다.
3. 견적 요청 및 발주
이때의 나의 회사 생활은 고된 업무의 연속이었다. 새벽별 보고 출근을 해서 저녁별을 보고 집에 들어왔으니까. 독일과 일본의 기계 메이커(Maker)들이 속속 견적서를 보내온 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로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계 발주를 앞두고 발주처로 부상한 업체에게 가격을 하향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고 있던 때에 마침 일본 도쿄에서 국제 공작기계 박람회가 있었다. 김승언 부장을 필두로 나와 몇 사람의 과장이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다.
출장 중 김승언부장과 시린다블록라인(Cylinder Block Line) 발주처로 예정된 '엔슈그로스'란 회사의 부장과 가격협상이 있었다. 상대방이 저녁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측은 김 부장과 나 그리고 과장 두 사람이고 상대방은 부장 혼자서 우리를 저녁접대를 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서서히 가격 이야기를 김 부장이 꺼냈다. 당신 회사의 가격은 얼토당토 없이 너무 비싸다, 김 부장은 비싼 대목을 조목조목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비쌀 이유가 없다고 긴 설명 끝에 최소한 몇 %가 부풀어진 것이다라고 말을 끝냈다.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상대방이 앞서 김 부장이 언급한 내용을 조목조목 차례대로 가격이 그렇게 나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두 사람 간에는 무슨 서류를 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메모하는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은 조목조목 가격을 줄줄 외고 있었다. 두 사람간에는 팽팽한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한 쪽은 비싸다고 하고 반대쪽은 오히려 싸다고 주장한다. 한치의 양보가 없다. 김 부장의 일본말 구사는 완벽하고 말하는 솜씨는 아무 거침이 없었다. 상대방은 말은 달변이 아니지만 뚜벅뚜벅 신중하고 힘이 느껴진다. 두 사람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동석자 세 사람은 침묵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두 사람의 설전은 계속된다. 한 쪽은 최소한 XX %은 내리라고 했고 반대편은 한 푼도 깎아 줄 수가 없다고 버틴다. 식당의 영업 마감시간이 임박해 왔다. 두 사람은 어디 나가서 차를 한잔 하면서 더 이야기를 해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식당을 나와서 다른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도 가격협상은 한 치도 진전이 없다. 찻집 주인이 문을 닫아야 함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섰다.
김 부장은 마지막이라는 듯 엄포를 놓는다.
"이대로 끝낼 것이냐?"
"그래 끝내도 좋다. 그러나 당신이 더 할 말이 있으면 당신 호텔로 따라 가겠다."
그렇게 해서 또 호텔까지 왔다. 호텔 로비에 빙 둘러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부장만 혼자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무언의 응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견적 내용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나머지 두 과장도 이럴 때에는 '침묵이 금이다' 라는 식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호텔에 와서는 김 부장은 가격이야기는 접어두고 자기의 사생활 일부를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하다.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어머니 혼자서 나를 키웠다. 집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지금의 나의 아내는 내가 대학교 때 가정교사로 있었던 집의 딸이다. 결혼을 해서 지금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아버지가 되었다. 뼈 빠지게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누구보다도 회사를 위해 헌신해 왔다. 그래서 지금 부장이라는 위치에 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낸 때를 조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뛰어 갈 것이다.'
김 부장의 이야기가 끝났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듣고 보니 당신은 참 존경할만한 분이다."
그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내일 다시 오겠다. 시간이 있는가?"
"내일은 시간을 낼 수 없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으면 한국으로 와 달라"
"그래 알았다. 한국으로 가겠다"
그는 돌아갔다. 또 같은 방을 쓰게 된 우리는 방으로 들어왔다. 같은 방에 투숙하는 것은 이것이 세 번째이다. 그 첫 번째는 미국 연수 때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잔 하룻밤이고 두 번째는 독일 보쿰(Voccumn)에 출장 때 호텔에서 꽤 오랜 동안 같은 방에서 지냈다.
방안에 들어와서도 김 부장은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혼잣말처럼
"그 자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여야 하는데 말이야. 참 지독한 사람이야……"
나는 이 말을 듣고 민망스러워했다.
"예 그렇네요. 부장님 애쓰셨습니다. 그만 오늘 일은 잊으시고 잠이나 잡시다. 내일 할 일이 또 있으니까요"
김 부장은 나더러 먼저 샤워를 하라고 하신다. 내가 겸양을 해서 먼저 샤워를 권해도 한사코 사양하신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와 가운을 입었다. 김 부장이 샤워를 하는 동안 난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맥주와 간단한 안주가 있었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맥주 두 캔과 안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도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여기 오십시오. 부장님! 맥주나 한잔 합시다."
우리는 마주 앉았다
"가격 Nego가 이렇게 어려운 줄을 오늘 실감하였습니다."
"다 그렇지요. 특히 일본 사람들과는 오늘처럼 다 어렵게 갑니다."
이제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오늘 세 사람이 침묵을 지켜주느라 힘이 들었을 거라고 오히려 감사의 말을 하였다. 저녁 식당에 들어간 것이 6시경이었는데 그가 호텔까지 와서 돌아 간 시각이 새벽 한시 무렵이니 장장 7시간의 설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 내고(Nego)는 한치도 진전된 것이 없다. 나에게도 엔진 조립라인과 다이나모 테스트 라인의 기계, 그리고 서스펜션(Suspension) 라인의 여러 기계들이 많이 있다. 이들 기계를 가격 Nego를 하고 발주를 줄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아득하였다. 더구나 나는 이런 일을 처음 해 보는 것이다. 부산공장에서 생산을 증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설비를 설치하였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맡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뒤에 실린더 블록(Cylinder Block Line)을 결국 일본의 그 업체가 따 갔다. 가격 네교(Nego)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결말이 난 지는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가격 Nego를 진행할 무렵 김승언부장은 나에게 엔진조립라인 업무는 그만하고 서스펜션(Suspension)공장 일만 하도록 조정하였다. 나의 업무는 많이 줄어서 홀가분해졌다. 리어 데드 엑슬(Rear Dead Axle)가공 라인은 처음부터 독일 메이크인 호스베르크(Honsberg)가 낙점되어 있었다. 휠스핀들(Wheel spindle) 용접기계에 대해서는 내가 구상한대로 업무를 추진하였다. 용접 지그(JIG)한 대와 로봇트(Robot)를 이용해서 용접을 하며, 용접 시 발생하는 가스는 닥터(Ductor)를 설치하여 공장외부로 배출시키며, 용접 불빛을 용접기 사방에 칸막이를 설치하여 차단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사양서를 만들어서 국내 대우중공업과 일본 산요(Sanyo)라는 회사에 견적을 요청하였다. 물론 독일의 메이트에게도 가동중인 기계와 똑같은 사양의 견적을 요구하였다. 도중에 대우중공업은 용접로봇트 기술력이 없어서 포기하였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 두 회사가 남았는데 견적가격은 독일이 일본보다 무려 3배가 높은 것이었다. 이것은 처음 기계를 보았을 때 이미 예견된 사항이었다. 나는 일본 산요(Sanyo)를 채택하였다. 발주품의서에 김승언 부장은 쉽게 사인을 하였다. 왜냐하면 독일현장에서 이미 나의 의견에 동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펠측이 추천한 기계와 다른 것이니 왕 상무님이 신중하게 질문을 하셨다. 나는 내 소신대로 답하였다.
"이봐 이 차장! 헐한 것이 비지떡이라고 만약 잘못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네 이것 정말 자신이 있는 거야?"
나는 거침없이
"예 자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왕 상무님은 싸인을 한 서류를 내어주면서 착오 없이 일을 하라고 당부하셨다.
결재서류를 받아 들고 상무님 방을 나오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다, 기계 가격 1억 원을 줄일 수 있다. 무모한 도전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 하자)
엑슬과 맥퍼슨스트러트유니트(Mcpherson Strut Unit)를 조립하는 Line 설치는 필요한 컨베어, 공구, 간단한 프레스등을 사와서 직접 라인(Line)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470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날 무렵 모든 기계발주는 끝이 났다. 그 동안 정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제일 먼저 착공한 식당과 그 2층의 사무실 건물이 완공되었다. 2층 사무실에는 470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임직원들과 대우건설팀, 그리고 오펠 측 코디네이터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누가 봐도 대단한 조직이다. 회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 곳에 다 모였으니 모든 업무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4. 불의의 화재 발생
부평공장 사내부지에는 각 공장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건축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도장공장은 유일하게 3층 건물이었다. 철골구조물이었는데 각 철재 부재들이 대형 크레인에 매달려 하나씩 하늘 높이 조립되어 올라갔다. 모든 부서가 오직 하나의 목표인 SOP(생산개시일)를 향하여 뛰고 또 뛴다.
1985년 여름 어느 일요일 나는 크게 놀랐다. 일요일 낮 당직을 선 날이었는데 엔진공장 지붕을 작업하다 큰 불이 났다. 그 무렵 각 공장건물은 지붕을 덮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모든 지붕은 단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마감재를 사용하였다. 이 마감재를 한 장 한 장 붙여나가는 작업은 콜탈을 먼저 도포한 다음 이루어졌다. 각 공장 지붕에는 이 콜탈을 끓이는 장치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 끓고 있던 콜탈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었다. 한여름 맹렬한 불길은 거대한 검은 연기 기둥을 하늘 높이 뻗혀 올랐다. 이미 작업을 완료한 지붕에도 불길이 번져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요란한 소방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금새 불자동차들이 속속 도착하여 물을 뿜기 시작하였다. 난 뛰고 있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당직실로 달려가서 사장님께 보고하였다.
"엔진공장 지붕 마감재를 붙이는 작업을 하던 중 콜탈에 불이 옮겨 붙어 화재가 났습니다. 수십 대의 소방차가 즉시 도착을 해서 진화작업 중이니 불길은 곧 잡힐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장님은 담담하게
"알았다. 불길이 잡히는 대로 또 보고해 달라"고 하셨다. 내가 현장에 다시 달려갔을 때에는 큰 불은 잡힌 상태였다. 나는 당직실로 뛰어와 사장님께 재차 보고를 드렸다. 그리고 왕영남 상무와 김승인 부장에게도 보고를 했고 비상연락망에 따라 차례차례 전화를 했다. 얼마 후 회사 간부들이 속속 현장에 도착하였다. 불길을 빠른 시간에 잡았기 때문에 건물의 철골 구조에는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들 이었다.
나의 놀란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나는 화재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놀란 가슴을 쉽사리 진정시키지 못했다. 하늘 높이 치솟던 거대한 검은 연기 구름이 눈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날 대우 건설의 안전진단 결과 건물의 철골 구조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참으로 다행이다. 공장 건설의 일정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재발 방지를 위해 대우건설 측에서는 작업방법을 개선하였음은 물론이다.
5. 기계검사(Machine Inspection)
1985년 10월 경에는 기계 메이크에서 시행할 기계검사(Machine Inspection)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상주하고 있던 독일 코디네이터에게 시험가동에 필요한 시험가공용 자재(Test Piece)를 준비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즈음엔 내 밑에도 두 사람의 엔지니어가 보충되었다. 기계 운전을 맡을 기능직 한 사람도 선발되었다. 먼저 독일 혼스베르크에 사원 원대희와 앞으로 작업을 할 기능직 한 사람을 함께 출장 보냈다. 기계를 조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조립이 완료되면 테스트 피스(Test Piece)를 시험가공 해 보는 것이다. 말이 기계 장비 입회 검사이지만 실제로는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다. 나는 사원 원대희에게 그날그날 진척 된 일들은 꼼꼼히 기록하라고 새삼 당부하였다. 이 기록은 훗날 발생할 지도 모를 고장이 날 때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해와 나들이가 처음임으로 독일 프랑크프르트 공항까지 가는 길을 메모해서 주었다. 공항의 픽업은 혼스베르크가 나가도록 조치해 두었다.
혼스베르크가 먼저 보고를 해왔다. 이들 두 사람이 무사히 도착했으며, 머물고 있는 호텔이며, 호텔의 전화번호 등 팩스로 알려왔던 것이다. 나는 수시로 원군에게 전화를 걸어 진행 사항을 알아보았다.
한편 일본 산요에는 양승한 대리를 보냈다. 그는 서울 공대를 나온 유능한 엔지니어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기계 도면을 잘 익히도록 하였다. 나는 독일 오펠이 사용하고 있는 기계에 대해서 잘 설명하여 주었고 원가 절감을 위해서 이 기계를 구상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기계는 하나의 모험이며 도전이라 로봇을 이용한 CO2 용접은 이것이 처음이다. 알다시피 이것은 직선 용접이 아니고 360 원주 용접이다. 산요도 처음이라 하니 반드시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잘 유의해서 잘 배워라."
이렇게 말했지만 내심 불안한 생각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왕상무님께서 "자신 있느냐?"고 다짐하던 말이 귀에 쟁쟁하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코디네이터도 반신반의 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서스펜션( Suspension) 공장
서스펜션 공장건물은 기존 자재창고 건물을 개조해서 사용하기로 회사는 결정해 놓고 있었다. 자재창고 신축 건물은 정문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기존 창고의 자재들이 모두 옮겨지고 텅 비었다. 건물 개조 공사는 지붕과 벽체의 단열공사와, 난방용 스팀배관 공사 밑 동력선 설치 등이며 혼스베르크 기계를 설치할 바닥 기초공사 등이었다. 그리고 공장 내 조도를 밝게 하기 위하여 천정에 수은등을 추가 설치하는 작업도 있었다. 이 작업을 하던 인부 한 사람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대우건설이 발주를 준 외부업체의 인부이기는 하였으나 내가 맡고 있는 공장건설 현장에서 사망한 것은 매우 꺼림직한 일이었다. 난 병원영안실을 찾아서 조문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이번에는 천정 개조 작업 중 또 불이 났다. 지난여름 엔진공장 지붕의 큰 불로 많이 놀랐는데 이번에도 또 한 번 놀랐다.
이번에는 사내 소방차가 즉시 달려와서 초기진압에 성공하였다. 여름 대형 화재 이후 회사는 또 다른 화재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 소방차 한 대를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작업인부의 추락사 이후 나는 매사 조심하고 있었는데 또 한 번의 화재사고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난 대형분말 소화기를 아예 현장에 가져다놓고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렇게 해서 용접 가스 배출을 위한 닥터(Ductor) 공사와 조립라인 위 형광등 설치를 위한 찬넬 설치 등은 무사히 마쳤다.
연말이 가까워 오고 장비검사를 나갔던 직원들도 돌아왔다. 혼스베르크와 산요가 장비를 선적한 날짜와 도착 예정일도 알려왔다. 설치에 소요되는 기간도 알려왔다. 1986년 초에 기계가 도착하면 2월 말까지 설치 작업을 끝내고 3월부터 시험생산을 거쳐 대망의 SOP인 1986. 6. 1 생산을 시작하는 것이다.
연말이 되어서 매년 있는 직원 인사고과가 시작되었다. 양승한 대리를 과장으로 진급시키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으나 원대희를 대리로 승진시키기는 것은 좀 어려웠다. 김승언 부장 앞에서 정윤택 차장과 내가 이 일로 심한 말다툼을 하였다. 정윤택 차장 밑에는 대리로 승진 시켜야 할 후보들이 많이 있었다. 결말이 날 수 없는 싸움이다.
김 부장은 두 사람의 설전을 중지시키고 대리진급 문제는 자기에게 일임하여 달라고 하였다. 정 차장이 먼저 그렇게 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나는
"원대희의 능력과 자질을 보아서 부장님이 선처하여 주실 것을 믿겠습니다."
하고 그 방을 나왔다.
부하 직원의 승진도 승진이겠지만 사실 나 자신도 부장으로 승진을 꼭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김부장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의 늬앙스에는 (제발 이 사람도 진급을 시켜주도록 선처하여 주십시오.) 하는 바램이 섞여 있었다.
부산 공장에서 온 나를 적극적으로 끌어 줄 사람은 오직 김승언 부장이고 왕영남 상무였다. 앞서 말했지만 변윤식 전무는 퇴직을 해서 자기 사업을 하는 중이고 그나마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던 조항균 상무님은 기술연구소로 자리를 옮기시었다. 승진 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던 것은 단연 서울대 출신들이었고 그 다음은 한양대와 인하대 등이었으며 무엇보다 소위 줄이 중요한 것이었다. 지방대 출신인 내가 '줄'이라고 생각하여 온 것이 김 부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장이라면 회사의 고급 간부에 속한다. 회사는 "470 프로젝트"에 모든 사운을 걸고 있다. 나도 당당히 이 프로젝트의 한 사람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는 내년 상반기에 판결이 나겠지만 올 연말에 대대적인 승진인사를 해서 이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승진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6. 12. 31 발표된 승진자 명단에는 내 이름은 빠져 있었다. 내 밑에 두 사람은 모두 승진을 하였다. 두 사람은 내가 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것을 위로해 주었다.
예상한 대로 정윤택 차장은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엔진부에서 오랫동안 적을 두고 일해왔으며 나보다 훨씬 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다 싶었다. 난 진심으로 그에게 승진 축하말을 보냈다. 나는 서운하기 그지 없었지만 내년에는 내 차례가 틀림 없을 것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김승언부장은 이사로 왕영남상무는 전무로 각각 승진하였다.
7. 시험생산(Tryout)
1986년 초 호스베르크의 기계가 먼저 도착하였다. 통관 수속을 마친 장비들이 공장 안으로 운반되었다. 원대희 대리는 이를 포장 박스를 설치할 장소에 차례대로 정리하였다. 박스에 미리 번호를 써 두었던 것이다. 이어 혼스베르크에서 두 사람이 왔다. 1월 달 한국의 추운 날씨에 대비해서 그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는 거대한 중앙 보일러실이 완공되어서 모든 공장에는 난방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래서 밖에 있으면 춥지만 공장 내부에는 언제나 훈훈하였으니 이들은 기분 좋게 일을 하였다. 독일 사람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음식에 애로를 겪는 모양이었다. 이들을 위한 회사의 식당이 별도로 제공되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점심때는 돼지고기를 구워서 식빵과 함께 먹는 것이었다. 원 대리가 숯불 난로와 숯, 그리고 빵과 돼지고기 등을 사다 주었다. 회사에서는 그 경비를 지불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녁엔 가끔 회식도 시켜주었다. 원 대리와 직장 한 사람은 독일 연수 시에 이들과 함께 지냈으므로 이미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혼스베르크 기계 설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럴 즈음 산요의 기계도 들어왔다.
산요의 용접기계 설치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용접 지그에 올리고 내리고(Loading & Unloading)하는 작업은 수동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용접기 앞뒤로 여유공간(Buffer Zone)을 두어 소재를 저장하고 이동시키면 된다. 이를 수작업으로 해야 되니 작업자 한 사람이 더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독일 용접기보다 1억 원이나 싼 것이니 한 사람의 인건비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용접기 설치가 쉽게 끝나고 곧 시험생산에 들어갔다. 소재는 혼스베르크가 독일에서 시험생산(Tryout)으로 생산된 것이다. 난 이것을 버리지 말고 기계와 함께 포장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나의 요청대로 소재가 들어왔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용접기의 시험가동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을 다녀온 양과장의 보고로는 별 문제점이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하루속히 시험생산(Tryout)을 성공하여 김승언이사나 왕 전무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는 의외였다. 일본에서 시험생산 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는 기계가 한국에서 설치를 했는데 용접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로봇트가 360도 앞 또는 뒤에서 끝이 나기도 하고 진원의 궤적을 이탈하기도 한다. 산요측 기술자는 이런 현상을 잡으려고 그 원인 분석에 나섰다. 여러 가지 의심이 될 만한 것을 검사 해 본다. 첫째 로봇이 설정해 놓은 진원의 궤적을 이탈하는 원인이 무엇이냐? 이 원인을 찾기 위하여 다 각도로 실험을 하였다. 나는 로봇에 대해서 깊은 지식이 없다. 발주과정에서 산요측이 로봇트 원주 용접은 쉬운 일이라고 장담을 했기 때문에 나는 믿었던 것이다. 믿으면서도 이것은 도전이고 모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시험생산을 해봐서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조기 발견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며칠 동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산요 본사에서는 기술자를 귀국하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난 양과장을 같이 동행하여 출장을 보냈다.
며칠 후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 나는 산요의 기계제작 책임자를 호출하였다. 그는 로봇 기술자 한 사람을 대동해서 한국으로 왔다. 각고 끝에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단 했을 때 형성된 용접리드가 들쭉날쭉 하였다. 육안으로도 그렇게 보인다. 용접은 잘 되는데, 용접의 상태가 고르지 않아서 도면의 사양(Spec)에 벗어난다.
SOP가 1986. 6. 1 이니 아직 3개월의 시간이 있다. 나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썼다. 한편 혼스베르크의 기계는 대 성공이었다. 기계설치를 무사히 끝내고 독일 사람들은 돌아갔다.
멕퍼슨 스트러트(Mcpherson Strut Unit)의 조립 라인과 뒷축(RR Dead Axle)의 조립 라인도 완성되었다. 멕퍼슨 라인(Mcpherson line)은 이미 시험 작업을 잘 끝냈다. 뒷축의 시험조립은 용접작업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진행 할 수가 없었다.
용접 리드의 문제가 거의 해결되었다 싶을 무렵 이번에는 최초에 발생했던 문제가 재발되었다. SOP는 이제 2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다. 이제 나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있다. 엔진 서스편션 공장의 수많은 기계 중 나의 용접기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가고 있음을 시시각각 느꼈다. 김 이사가 현장에 자주 내려오더니 급기야는 왕 전무님도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한다는 말씀이
"이 사람아 내가 뭐라 했던가? 싼 것이 비지떡이라고."
전무님도 조바심이 나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다. 이 기계 하나 때문에 SOP가 늦춰지는 사태가 온다면 전무님의 수치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공장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을 터인데 이를 내가 몽땅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의 얼굴은 화끈거렸다. 이제는 낮이고 밤이고가 없다. 사생결단이 따로 없다. 나는 양과장의 연수 일지를 꼼꼼이 살펴 보기도 하고 지그 도면에 잘못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았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찾아보는 과정에서 산요측이 제품 도면을 잘못 해석한 것을 발견하였다. 제품 도면은 모두 1각법인데 산요 측이 3각법으로 잘못 해석해서 오류가 생긴 것이었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지그 도면을 수정하고 지그를 수정하니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SOP를 겨우 한 달 남겨 놓은 싯점이었다.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8. 완공된 공장의 모습
SOP는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지켜졌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르망(LEMANS)이다 부평공장 30만평 부지 위에는 빈틈이 한 뼘도 없이 여러 공장건물들과 그 사이의 도로들로 꽉 들어찼다. 북쪽담벽을 따라 자동차 주행시험장이 들어섰고 그 옆에 출고사무소와 완성차량주차장이 있고 잇따라 수출차량 상하차 등이 시야가 좀 트여 있을 뿐이다. 그 식당 앞에 있던 테니스장도 없어져 버렸다. 회사에서는 이것 대신 남쪽 담장을 따라 잔디 축구장 한 면을 신설하였다. 내가 아끼던 테니스장은 기술연구소 건물 확장으로 들어갔다. 중앙 보일러 실에는 하늘 높이 거대한 굴뚝 두 개가 솟았다. 이 모든 것이 단 2년 만에 완공되었다. 공장건설 즉 470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500여명의 직원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루어 낸 대 대역사의 결과이다. 이 뒷면에는 독일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모든 것을 다 들어내 놓고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기술 자료들을 내 준 그 은혜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지금은 이름도 기억해 낼 수 없는 그 오버 마이스터(Over Meister)의 헌신에 감사를 드린다. 또 한 사람 미국 GM 기술연구소(Tech Center)의 연구원 에릭 앵브롬(Eric Engbroam)씨가 베풀어 준 친절과 은혜에 뜨겁게 감사를 드린다. 아마 지금쯤은 모두 영면하셨을 것이다.
이런 한편 서스편션 공장 지붕개조를 하다가 추락사한 이름도 모를 인부의 희생에도 고개를 숙여 애도의 마음 드린다.
르망의 출시는 소비자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자동차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소형차이면서도 갖출 기능은 모두 갖추고 있었고 그 외모의 경이로움은 소비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고출력 엔진의 성능과 에어컨의 시원함, 그리고 내가 생산한 서스펜셔(Suspension)의 안락함은 이때까지 선보인 어떤 차량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펠(Opel)의 경영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자기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지만 이렇게 성능 좋은 차가 생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특히 엔진의 품질은 그 출력과, 토크(Torque) 및 연비는 균일한 것이라서 감탄을 하였다는 후문을 들었다. 이후 대우자동차 사람에게는 문을 걸어 잠그고 연구소 출입이나 공장현장에 들어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였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제자 대우자동차는 스승인 오펠(Opel)을 뛰어 넘었으니 그 자체로 보은을 한 셈이다. 470 프로젝트를 통해서 대우자동차가 습득한 기술은 완벽하였다. 이후 군산공장과 창원 국민차 공장은 독자적인 기술로 건설하였던 것이다.
공장건설이 완료되자 회사는 프로젝트 건설부문을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발표하였다. 엔진부는 엔진 1부와 엔진 2부로 나누어졌다. 나의 소속은 엔진 1부이었으며 사무실은 서스펜션(Suspension) 공장 동쪽 편에 붙어 있었다. 서스펜션 공장의 가동은 원활하였다. 용접기 때문에 가슴을 태웠던 나는 고생했던 때가 아득한 추억과도 같다. 나는 생산을 개시한지 한 달쯤 지나자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그래서 다른 공장들은 어떻게 지어졌을까가 궁금하여 틈틈이 다른 공장을 찾아보았다. 먼저 프레스 공장을 찾았다. 거대한 프레스 기계들이 일렬로 쭉 서 있고 기계와 기계 사이에는 벨트 컨베어가 돌고 있다. 제일 앞 부분에는 포철에서 온 철판 말이 뭉치가 그대로 걸려있다. 이 철판 말이가 돌면서 철판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설치된 절단기(Shearing Machine)을 통과하면서 일정한 길이로 잘려진다. 이 잘려진 철판은 벨트 컨베어(Belt Conveyor)위에 놓여 프레스 기계로 들어가서 자동 로딩(Loading)이 되고 프레스 기에 눌려서 어떤 형상이 된다. 이것이 다음 프레스 기에 들어가서 눌러지면 모양이 좀 더 구체화된다. 이렇게 해서 6,7대의 프레스 기를 통과하면 하나의 제품이 되는 것을 보았다. 제품은 바퀴가 달린 적재함에 차곡차곡 담겨서 다음 차체공장으로 이송되는 것이다. 프레스 공장은 이런 라인(Line)이 여러 개 있었으며 모두 벨트 컨베어를 돌려 자동으로 움직이고 최종기계를 흘러 나와서 제품이 되었다. 자동차의 바닥판을 작업하는 기계들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제품이니까 기계들도 그 만큼 크고 라인도 길었다. 공장사방에는 꼬리표가 다양하게 붙여있는 저장대에 차곡히 금형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있다. 옛날 모습하고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일사불란하게 흘러나오는 부품들과 이를 적재하여 다음 공장으로 끌고 가는 토인 카(Towing Car)의 부지런한 움직임은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음은 차체공장이다. 프레스 공장에서 넘어온 온갖 형상의 차체부품들을 하나하나 점용접으로 조립해 나가서 최종 차체를 완성하는 곳이다. 수백 대의 로봇들이 수백 가지의 모양을 한 스폿트 건(Spot Gun)을 움직여 불꽃을 튀기면서 점용접을 하고 있다. 장관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위예술이다. 차체 구석구석을 찾아서 용접을 해 나가는 로봇 팔의 움직임은 실로 경이롭다. 완성된 차체의 엔진룸 안쪽 상단에 자동으로 차체 번호(Vin No.)가 타각된다. 그리고 컨베어에 실려 이웃 도장공장으로 이송된다. 차체와 도장공장 사이에는 컨베어 이동 통로를 설치해 놓았다.
컨베어에 매달린 차체는 먼저 워싱룸(Washing Room)을 통과하면서 차체에 묻어있던 온갖 기름기, 먼지, 불순물들이 깨끗이 제거된다. 그리고 마지막 통과할 무렵에는 강력한 에어 블로우(Air Blow)로 묻어있던 물기를 말끔히 없앤다. 그 다음 전처리 공정으로 차체표면에 기초도장을 하는 곳이다. 거대한 탱크에 프라이머(Primer) 도료가 가득 담겨있는 곳을 차체가 푹 잠겨서 지나간다. 이것을 디핑시스템(Dipping System )이라고 했던가? 전착도장이라고 해서 도료입자가 차체 구석구석 달라붙도록 하는 곳이다. 모든 일에는 기초가 중요하듯 자동차 도장에서도 이 공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후 차체는 열건조(Baking Oven,) 도색실(Spray Booth) 등 여러 공정을 1,2,3층을 곡예 하듯이 거쳐서 최종 도장이 완성되었다. 이 공장을 양영길 차장이 안내해 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공장은 독일 듀어(Dur)라는 회사가 턴키베이스(Turn Key Base)로 완공된 것이라 하였다.
도장공장과 조립공장 사이에도 컨배이어 이동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메인 컨베이어 위에 차체가 흘러 지나는 동안 한 가지씩 부품들이 조립된다. 문짝이나 대쉬보드. 타이어(Tire)등 별도 라인에서 미리 조립되어 또 다른 컨베이어에 매달려 각각 조립할 위치에 도착한다. 엔진과 뒷축(Rear Axle Assy), 맥퍼슨 스트러트(Mcpherson Strut Unit) 등이 이동 적재함에 실려 조립공장으로 공급된다. 이들 부품을 조립할 때에는 컨베이어가 공중으로 떠서 흘러가고 있다. 엔진과 트란스 액슬도 조립한다 컨베이어 끝 부분에 가서는 연료가 주입되고 엔진 시동이 걸린다. 이때 컨베이어는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린다. 작업자는 비로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각종 검사 장비를 통과해서 야적장으로 옮겨진다. 1분에 한 대씩 공장을 빠져 나오는 모습은 경이로운 것이다. 조립공장은 지상으로 메인 컨베이어가 흐르는 중에 천정 여기저기서 다양한 모양의 컨베이어가 부품을 매달고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 이런 작업이 가능한 것은 공장 전체를 연동하여 제어하는 중앙전산실이 있기 때문이며 각종 컨베이어가 있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는 마침내 60 Job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것이다.
9. 발병
마음의 여유가 생겨 이렇게 공장전체를 둘러보고 회사의 성공을 확신하였으며 나도 일정부문 맡은 바를 완수하였다는 자부심도 느껴졌다. 서스펜션 공장도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이제 되었다) 하는 순간 마음의 긴장은 완전히 풀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몸이 여기저기 아파오는 것이었다. 가끔 가슴이 무엇에 짓눌린 듯 답답함을 느낀다. 머리가 어질 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두 차례 화재와 용접 로봇트의 말썽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니 일시에 터져 나오는 병증이었다. 나는 남 몰래 병원을 찾았다. 진단결과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다고 하였다. 당뇨로 인해서 몸이 노곤하고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당뇨"란 말에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당뇨합병증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이모들도 당뇨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나의 당뇨는 유전인가? 암담한 생각이 든다. 의사는
"당뇨는 잘 낫지 않는 병이지만 식이요법과 운동을 꾸준히 계속하면 큰 문제없이 살 수가 있다."고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 가슴이 답답한 증세는 협심증일 수도 있는데 큰 병원으로 가서 심장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부평성모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협심증의 특이증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최근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의사는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권유하였다.
나는 의사의 휴식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을 해 보았다. 한 달이나 두 달 회사에 휴가계를 내고 어디 산 속 절간에 가서 그냥 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덟 명의 대 식구에 줄줄이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 마누라가 내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어 써도 모자라는 판에 무슨 휴식이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마누라하고 한마디 상의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난 연말에는 꼭 부장으로 승진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다. (그래 연말까지 다섯 달을 어떻게 해서라도 참아내자. 꼭 참아내야 해)
나는 이렇게 다짐했지만 한번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몸은 급박하게 무너졌다. 꿈엔 시뻘건 불길이 나를 덮치는 꿈을 자주 꾸었고 이런 꿈을 깨고 나면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는다. 나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난 견디다 못해 김 이사실을 찾았다. 그는 나의 병세를 다 듣더니
"이것은 큰 프로젝트 업무의 중압감에서 생긴 후유증이지요. 나는 일찍이 이런 증상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다녔다는 정신과 병원을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며칠 뒤 회사근무 중이었는데 나는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해서 결국 병원에 입원하고야 말았다.
10. 구동부품개발부
한 달 뒤 나는 완전히 몸을 추스렸고 다시 출근을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닥쳐왔다. 구매부 구동부품개발담당으로 전보발령이 난 것이다. 나는 아연 실색하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김이사를 찾아가 맹렬히 항의 하였다.
"이 차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은 그렇지 못 합니다. 외주업체들의 생산과 품질이 안정되지 못해서 생산라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구동부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기계가공분야에서 일해 온 이 차장의 업무 기여가 절실한 상태입니다"
"아무리 그러기로서니 보다시피 아직 몸도 성치 못하는데 또 거기 가서 혹사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연말이면 꼭 진급을 하여야 하는데 승진을 시킨 후에 다른 데에 보내도 될 일이 아닙니까?"
나의 항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 이사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가는 곳은 부장자리입니다. 승진이 보장된 자리입니다. 아무쪼록 거기 가서 한 번만 더 고생을 하여 주십시오. 이 차장이 가서 개발할 부품들이 모두 엔진과 서스팬션 부품들입니다. 엔진부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일해 주십시오."
김 이사의 달변에 나는 눌렸다. 이미 발령이 난 것을 뒤집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나는 쫓겨나는 심정을 더 하소연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외주부서를 부임하였다. 가서 보니 조직이 엄청나게 켜졌다. 각 분야별로 담당을 두었다. 내가 맡은 구동부품을 위시해서 프레스부품, 플라스틱부품, 화공부품, 의장부품, 전장부품, 공조부품 등등의 분야별로 담당이 분리되었고 이 외에 구매관리담당과 원가관리담당까지 있었으며 이사가 두 사람 상무 및 전무 한 사람씩이 있는 대 조직이었다. 몇 달 뒤에는 부사장까지 왔다.
구동부품들은 말할 것도 없이 엔진과 샤시부품들이었다. 주요 엔지부품으로는 피스톤 및 피스톤링, 컨넥팅롯드, 각종 메탈베어링, 밸브, 타펫트 등의 정밀 부품들이며, 샤시부품으로는 스티니어링넉컬, 씨브이 조인트(CV joint), 뒷축(FR AXLE), 쇽암소바, 스프링, 브레이크마스터시린다(Brake Master Cylinder) 등등 많은 부품 , 그리고 수많은 업체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가?
내 밑에는 과장이 두 사람, 대리가 두 사람이며 사원이 8명이나 되는 큰 조직이었다.
나는 업무파악부터 시작하였다. 과장이나 대리 한 사람씩을 대동하고 그 업체를 찾아가서 현장을 보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찾아내고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말이 그렇지 한두 가지 부품이 아니고 한두 업체가 아니다. 급하다고 한 두 부품에 몰두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조립라인에 부품이 미처 공급되지 못하여 생산라인이 멈춰 서기라도 하면 야단벼락이 떨어진다. 나는 상황판단도 미쳐 하지 못한 체 여승옥 이사의 호출을 받고 쩔쩔 메었다. 470 프로젝트 에서 고생을 그렇게 하고 병까지 얻었는데 이건 그때보다 훨씬 더 하다, 바로 발밑에 불이 튕기는 것이다. 난 아픈 몸을 추스르기도 전인데 또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몸은 아파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 번 다신 병원에 입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이 구매부 사무실이거나 업체 현장에서거나 어디서든 쓰러져 죽자. 나는 이렇게 내 목숨을 걸었다.
죽겠다는 각오로 덤비니 살아 날 길도 보였다. 회사입사 후 지금까지 해온 일이 물건을 만드는 일이었으니 업체현장에서 내가 지적한 것은 정곡을 찔렀다. 업체의 작업자나 관리자들이 차차 나를 믿고 따라주었다. 나는 업체에서 밤샘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내 밑의 과장과 대리들도 몸을 아끼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해서 한 3개월이 지나니 고질적인 업체들이 하나 둘씩 생산이 안정이 되고 결품을 내는 일이 없어졌다. 가슴의 통증이 가끔 있을 때에는 비상약 "니트로글리세린"을 얼른 혀 밑에 넣고 화장실이나 남이 안 보는 장소에 가서 조용히 안정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 업무가 안정이 되어가자 나는 여승옥이사가 나를 불러도 쩔쩔매는 일은 더 이상 없어졌다. 오히려 자주 여 이사 방을 찾아서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라도 있으면 미리 보고도 하였다.
연말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행복한 날을 고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CI Team이 대거 몰려왔다."코스트이노배이션팀(Cost Innovation Team)"말 그대로 원가절감을 혁신적으로 하겠다는 팀이다. 김성준 부사장이 ㈜대우에서 대거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부품납품가격을 후려치기 위해서는 기존 대우자동차 직원들 가지고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업체들은 여기저기서 CI Team 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묻고 벌써부터 벌벌 떨기 시작했다.
11. 기술연구소 시작담당
또 쓸쓸한 연말을 맞았다. 승진 대신에 이번에는 기술연구소 시작담당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구동부품개발담당 내 자리는 CIT 중 한 사람이 차지 하였다. 그들은 엔지니어가 아니었다. 나 같은 엔지니어들이 죽으라고 고생해서 부품개발을 완료해 놓으니 그 열매는 엉뚱한 데서 채갔다. ㈜ 대우 사람들은 전에 받았던 월급과 형평을 맞추다 보니 모두 한 직급씩 자동 승진도 하였다. 분하고 억울하였다. 여 이사에게 한마다 항변이나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김 이사가 강조하였던 "보장된 부장 자리"는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새해 첫 출근 날 상견례는 기술연구소 소장 한기상 전무님과 가졌다. 상견례 자리에서 뜻 밖에도 한 기상 전무님은
"이 차장이 시작담당을 맡아서 부하직원들을 잘 다스리고 업무를 잘 추진해 주기를 부탁한다. 이 차장을 시작담당을 맡기게 된 것은 버스공장에서나 엔진 현장에서 닦은 실무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잘 부탁 하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이런 전무님의 말씀을 들으니 (아 이분은 소문과는 달리 자상한 마음을 가진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무님은 무서운 호랑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담당이라는 곳은 기술연구소에서 나 온 시작도면 대로 부품을 만드는 곳이다. 각종 공작기계와 간이 금형제작시설, 그리고 판금 설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기능공이었다. 공장이 한 사람 직장이 두 사람이고 기능공이 30여명쯤 되었다.
전무님이 당부하신 말씀의 뜻을 나는 곧 알아차렸다. '부하직원들을 잘 다스리라'란 말의 뜻은 부하 직원들과 끈끈한 사적 유대라도 만들어 노조활동에 적극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당시 대우자동차 노조활동은 강성이었으며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진원지이었다. 1985년 봄 일어나기 시작한 노조 활동은 점차 격렬해 지고 있었다. 작년에는 르망 생산을 앞두고 파업사태까지 벌어져서 회사는 신차생산을 앞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신차개발생산이 절대 절명인 회사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요구를 대폭 수용하면서 수습하였던 것이다.
1987년 사회분위기는 5공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의식으로 팽배하고 있었으며 이 분위기에 휩싸여 노조 활동이 격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직원들을 다독거리는 일이라면 나는 자신이 있었다. 부산 동래공장에서 한 때 470명의 기능공을 관리한 일도 있다. 그 때 공,직장들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서는 술자리를 자주 만들어 섭섭했던 마음들을 풀게 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한잔씩 권하다 보니 나도 주는 술을 거절 못하고 받아 마셨다. 취하게 만들고 나도 취하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노래가 없을 수 없다. 나는 흥이 겨우면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청해가(靑海歌)이다. 대학 일학년 때 합창단에서 배운 것이다.
청해 청해 청 황해 황해 황(靑海 靑海 靑 黃海 黃海 黃 칭하이 칭하이 칭 헝하이 헝하이 헝)으로 시작되는 제법 긴 노래인데 중국말로 부르면 가사와 곡이 대단히 흥겹고 흥이 절로 나서 모두들 박자를 맞춘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이 과장님이 최고야 야! 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껏 분위기를 돌려 놓고 나는 손을 흔들면서 술자리를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엔진부 가공2과에 근무하였을 때도 대단한 환호를 받았던 것이다. 나의 이 작전은 적중하였다. 30여명 기능공을 관리하는 일은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특별한 기능과 손재주를 갖춘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이들과 쉽게 교감을 하였다.
노조 대의원 김영진을 퇴근 후 자주 만났다. 노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격의가 없어야 했다. 그의 집도 찾아가서 커피도 얻어 마셨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였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이 둘이 있었다.
기술연구소는 르망 후속 차종을 벌써 준비하고 있었다. 이태리에서 차체 스타일을 받았고 시작도면들이 속속 내게 넘어왔다. 나는 잘 소화해 내었다. 그럭저럭 호랑이 한 전무님의 질책 한번 없이 근무하게 되었다. 업무는 과중한 것이 없었으므로 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 시작담당의 공작기계들을 점검해 보았더니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공작 기계들이 있었다. 나는 이곳이야말로 내가 진짜 일을 해 볼만한 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부품을 만드는 것을 완전히 잘 배워두면 앞으로 내가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손에 익힐 수가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는 부평공장에 와서 마지막 이런 부서에 온 것이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하였다. 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것이 별로 한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4월이 되자 노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노조의 임금인상안이었다. 나는 이를 한전무님께 보고하였다. 전무님은 노조와 관련된 정보는 직접 보고 해 줄 것을 지시한 일이 있다.
5월 임금 협상이 결렬되었다. 회사는 노조의 임금인상요구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 해 신차생산을 앞두고 임금 인상을 대폭 해 주었는데 2년 연속 인상을 해 주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다고 선언해 버렸다. 임금을 올려 주어도 사회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형세를 관망하면서 추후 대처하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공장과 직장으로 하여금 기능공의 비상연락망을 구축을 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직장 두 사람은 기능공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집을 찾아 갈 때에는 조그마한 선물도 있어야 하므로 전무님의 결재를 받아 외근비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침 조회를 여러 차례 하면서 이렇게 다짐을 하여 두었다.
"우리는 기술연구소 시작담당 직원입니다. 여러분은 현장 직원하고는 달라져야 합니다. 혹시 파업을 해서 데모가 일어나더라도 절대 데모에는 참가 하지 마십시오.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나나 여러분의 가족이 괴로워하지 않겠습니까?"
12. 노조 파업의 불똥
예상대로 노조는 파업에 돌입하였다. 3층 사장실과 인사 총무부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온갖 섬뜩한 구호와 프랑카드가 내걸리고 공장 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스프레이 한 험악한 글씨들이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기술연구소 건물은 본관 3층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기술연구소 건물을 언제 점거 당할지 모를 급박한 상황으로 다가왔다. 구름다리 통로는 재빨리 차단해 두었다. 한 전무님은 전 연구소 직원들을 현관에 집합시켜서 파업노동자들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하였다. 모든 직원은 현관바닥에 줄을 지어 앉았다.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않아 있을 뿐이다. 이런 때에 나의 가슴엔 통증이 왔다. 나는 얼른 약 한 알 찾아 혀 밑에 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자리를 뜰 수 없는 상황임으로 어쩔 수 없었다. 전무님은 내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차장! 지금 이런 위급한 떼에 그렇게 잠이 오는가 자네는?"
나는 깜짝 놀라서
"아 아닙니다. 전무님! 제가 가슴에 통증이 있어서 잠시 진정하느라…."
"뭐라고 가슴이 아프다고? 그래도 그렇지 간부사원이 돼가지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시원찮은 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전무님!"
나는 더 변명도 못했다. 그때까지 전무님께선 내가 협심증이 있는 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질책을 당하였다.
저녁때까지는 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직원의 반은 남아서 계속 연구소를 지키고 반은 퇴근을 하여 내일 아침 교대하도록 지시하였다. 다행히 나는 퇴근하는 쪽에 포함되었다.
이튿날 아침 난 전무님께 내 밑의 노조원들이 집에 잘 있는지 가정방문을 하고 오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다. 나는 곧바로 대의원 집으로 갔다. 그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다른 직원들의 동태를 물어보니 모두 집에 잘 있을 것이란 대답이었다. 그래도 못 믿어서 나는 비상연락망 전화를 걸어 몇 사람 더 확인해 보았더니 다들 집에 잘 있었다. 난 결과를 전무님께 보고 하였다.
며칠 뒤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는 나날이 점점 격화되어 가고 있었다. 난 이 여파가 회사에 불똥을 튀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사태는 내가 염려하는 대로 터졌다. 노조원들이 회사로 출근하였다가 밖으로 나갔다. 민주화 시위에 불을 지핀 것이다. 사내 파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데모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부평역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진압하는 경찰들의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였다. 경찰들은 대우자동차가 주축이 되어 있음으로 다음 날부터는 회사정문부터 차단하였다. 회사정문을 나서려는 노조원들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한바탕 전쟁은 끝났다. 노조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고 경찰들도 물러갔다.
그런데 기어이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집에 내내 잘 있던 김영진 대의원이 자기 집으로 놀러 온 동료 두 사람하고 함께 회사로 와서 대모현장을 가 본 모양이었다. 무슨 호기심이 발동한 것인 지 불발 최루탄 하나를 세 사람이 둘러앉아서 만져보다가 그만 폭발하고 만 것이다. 세 사람 중 하필 김영진이만 눈에 파편이 박히는 사고가 난 것이다. 동료 두 사람이 김영진이를 부축하여 안전과로 가서 사고 사실을 알렸다. 안전과에서 나를 불렀다. 가보니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난 전무님께 보고를 드렸고, 전무님께서 급히 오셨다. 두 사람 동료직원은 다친 경위를 말하였다 눈을 살펴보니 한쪽 눈에서 출혈이 있고 눈을 뜨지 못한다. 파편이 박혔다면 수술을 해야 할 것이었다. 입원할 병원을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정하고 곧 출발하였다.
의사의 진단결과 세 개의 파편이 눈에 박혔는데 이를 재거하는 수술과정에서 혹시 시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김영진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놀란 가족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를 않고 의사를 찾아 상태를 묻는다. 의사에게 실명할 염려는 없는 것이냐고 몇 번이나 묻는다 의사는 분명히
"시력이 좀 떨어질 수가 있고 회복하는데 다소 기간이 걸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님은 의사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며 안절부절 하였다. 난 전무님께 의사의 진단결과를 그대로 말씀 드렸다. 난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몇몇 신문에는 "최루탄 폭발 눈 부상 실명위기"라고 대서 특필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신문기자가 찾아 온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느 기자가 이런 과장 보도를 하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회사 안전과 직원이 전화를 해서 신문에서 "실명위기"라고 하는데 어찌된 것이냐고 묻는다. 난 어제 의사가 이야기 한 것을 그대로 전해 주었고 신문보도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잇달아 전무님이 내가 전화를 하기 전에 먼저 전화를 해서 똑 같은 질문을 하시는 거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들은 대로 말씀 드렸다.
정오쯤 김우중 회장님이 한 전무님을 앞세워 병원에 오셨다. 회장님은 그 어머니를 부둥켜 않고 이렇게 위로를 하셨다.
"어머님,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기 마련 아닙니까, 아드님의 눈은 제가 책임을 지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고쳐드릴 것이오니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그 어머님은 회장님의 말씀에 감격하신 것인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예, 회장님 우리 아들 눈이 제발 아무 일 없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매달렸다. 회장님은 근무복에 붙어 있는 내 이름을 보고
"자네가 이 차장인가? 부탁 하네"
하시고는 곧 병원을 떠나셨다. 회장님을 모시고 온 한 전무님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나셨다. 김영진이는 수술을 잘 받고 일주일 만에 퇴원하였다. 나도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신문은 왜 그런 과장 보도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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