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1>…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제1부 공학도의 길

1.기계공학전공

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나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진실한 인생을 살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 편의 창작을 남기는 게 내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늘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던 "문학과 인생"이란 제목의 최 재서 선생님의 글 중에서 "불후의 명작은 진실한 인생의 삶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평생 잊어본 적이 없다.

이런 내가 공학도의 길을 선택하고 자동차 만드는 일과 자동차에 관련한 일을 평생 해 오고 있는 것은 그 시작이 참으로 기이한 사연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연좌제란 악의 굴레이었다. 나는 평범하게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과 가족들의 권유로 대구상고에 은행원이 되려는 끔을 안고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꿈은 고교 3학년 때에 육사진학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굴절이 되었던 것이다. 가족 중에 6.25 때 부역자가 되어 있는 줄을 모르고 육사를 지망하였으니 될 리가 없었고 육사 진학 실패에 따른 깊은 좌절감과 허망함에 한 때 가출을 하기도 해서 부모님께 불효를 했고 형제 자매에게도 죄를 지었다. 악은 악을 불렀던 것이다.

가까스로 마음을 잡아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해오던 중 그래도 내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문학에 대한 꿈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울대 국문학과를 목표로 새롭게 도전하게 됨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대 도전은 고교 졸업 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역시 무모한 일이었으나 청구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에 4년 전면 장학생으로 합격하는 데에는 성공을 하였던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던 둘째 매형이 청구 대학 신입생 모집 요강과 장학생 선발내용이 실린 동아 일보를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응시 원서를 쓰려 대학을 들렀던 것이다. 응시원서를 받아 든 나는 인문계의 국문학과를 비롯한 상경계 여러 학과가 있었지만 공학부에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엔지니어의 길을 가서 진실한 삶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창작 한편도 이룰 수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결국 공학부의 기계공학과가 졸업 후 취직이 잘 되는 줄 알고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기계공학은 공부하기가 어려운 분야이면서도 한편 재미가 있기도 하였다. 수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두철미 냉정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재료역학은 기계를 설계하는 기본 바탕이 되는 이론이고, 기구학, 금속학 열역학 유체역학 등은 또한 기계가 움직이는 원리를 이루고 있다. 특히 4학년 때 배운 함수론은 수학을 뛰어넘는 그 무엇 철학 같은 것이었다. 無에서 有는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4년 내내 공부에 열중하였다. 한 눈 팔 새가 없었다. 덕택에 "A" 학점을 받은 과목이 많았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공부에 지치거나 자칫 건조해지는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해 대구역 앞에 있었던 음악 다방 '녹향'에 가끔 들렸던 일이 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정신의 고향이다.

2.신진자동차 입사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가 기계공업의 총아인 자동차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바램이었다. 늦가을 입사시험 시즌 중 나는 자동차 3개회사에 응시하는 기회를 가졌다. 선발 주자인 신진자동차,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현대자동차,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아시아자동차에 다행히 응시 날짜가 겹치지 않아 이들 3개회사에 모두 응시하였고 또 모두 합격하였다. 3개회사를 합격해 놓고 행복한 고민도 하였다. 과연 어느 회사를 선택할 것인가? 특히 아시아자동차에서 보낸 합격통지서에는 수석으로 합격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담당자의 글도 동봉되어 있었다.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곳은 신진자동차이었다. 영남대학교 김상철 교수님의 권고도 있었다.

1968년 12월 1일 신지자동차에 입사하였다. 회사공채 2기였다. 함께 입사한 사람들은 200명에 달했다. 회사는 욱일 승천하는 기운을 타고 있었고, 입사한 사람들은 모두 쟁쟁한 면모와 함께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이중 인문계 출신 사원들은 한 주일간의 간단한 교육을 마친 뒤 바로 배치 발령을 받아 근무를 시작했고 이공계 출신 150명 가량은 부평공장에서 3개월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받게 되었다. 처음 한 달 간은 서울 명륜동 처 고모님 댁에서 지냈다. 회사 출근은 통근 버스를 이용했다. 통근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침에는 항상 긴장하였고 바빴다. 이듬해 1월 초에는 부평 회사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유시진의 집으로 옮겨 비로소 통근의 고달픔에서 벗어났다. 유시진이를 입사하고 난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는 대구 대학 출신이었다. 청구대학과 대구 대학이 통합이 되어 영남대가 된 첫해에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다소 여유가 생겨서 많은 친구들에게 내가 신진자동차에 입사한 것을 알렸다.

연수 과정은 부평공장 작업 현장에 배치되어 실제로 작업을 해 보는 것이었다. 당시 부평공장엔 승용차를 생산하는 프레스, 차체, 도장 및 조립 공장이 있었고, 트럭 조립 공장을 합해서 다섯 개 공장이 있었다. 부평공장 30만평 넓은 부지엔 이들 공장이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를 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연수생 150명은 30명씩 다섯 조로 편성이 되었고 각각 3개월간 전 공장을 다 돌도록 연수 일정이 짜여있다. 현장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는 선배 사원들, 계장, 과장 등이 나와서 강의부터 하였다. 표준공법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공정 설명을 해 주고 레이아웃(Layout)도 보여 주었다. 실습생들은 모든 공장 모든 공정의 작업을 다 해보았으며 그날 그날 연수 일지를 작성했다. 작업표준서를 숙지하고 실제로 그렇게 작업을 해 보는 것은 참으로 신선하였다. 회사에서는 이런 연수를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 연수를 받는 동안 동료들간이 서로 친숙해져서 향후 회사 근무를 하면서 대화와 업무소통이 원활해졌다. 또 이때 익힌 현장 작업은 실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이런 연수과정에서 많은 장점들을 발견하게 되어서 필수 과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2부 부산 버스 공장

1. 작업시간측정

이듬해 3월 초 3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은 부산 버스 공장 생산과였다. 와서 보니 부산공장은 전포동 황령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고 부산 사람들은 거저 '신진공업사'라고 불렀다. 함께 부산으로 내려온 사원은 이공계 출신이 여섯 명이고, 인문계 출신이 네 명이었다. 인문계 출신 중에는 상고 출신이 두 사람이 있었으며 이들 네 사람은 부산공장으로 일찍 배치 발령을 받아서 근무 중이었다. 부산공장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원들을 공채로 받아들여서 근무를 시작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경영자들이 기대하는 바도 컸고 기존 사원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은 모두 한껏 자부심을 가졌다.

생산과에는 나, 유시진과 배은효 세 사람이었다. 나와 유시진은 생산기술을, 배은효는 생산관리를 맡았다. 생산과 배열규 과장이 나와 유신진에게 처음 부여한 업무는 표준작업설정이었다. 이 업무는 그때까지만 해도 표준 공법이 없으니 현장 작업이 개량화되지 못해서 생산과장으로서는 생산 관리가 주먹구구식임을 느끼고 이를 개선해 보려는 최초의 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작업시간 측정은 참으로 생소한 업무이다. 어떻게 측정하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이 일을 지시한 과장 자신도 타임워치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을 지켜 서서 재어보라고 한 것뿐이다. 유시진과 나 두 사람은 시내 책방을 뒤졌다. 여기에 관한 책이 있는 지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한 책방에서 생산기술연구소에서 발간한 산업공학(Industrial Engineering;IE)이란 책에서 "작업시간 측정 방법"이란 내용을 보게 되었다. 밤 낮 주야 이 책에 빠져들어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한 일주일 지나서 두 사람은 서로 공부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측정하는 방법이나 순서나 일정을 잡아서 과장에게 보고를 하였다.

작업측정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파악할 사항들이 많았다. 현장 작업 흐름을 지켜보면서 공정을 세세하게 파악하는 일이었다. 작업공정단위 즉 한 작업의 시작과 끝을 정해 놓는 일이었다. 각 작업단위에 작업하는 사람 수, 사용하는 치공구와 장비 및 작업대 그리고 이동 수단들을 다 기록하였다. 후렘 조립을 시작해서 차체조립과 도장을 거쳐 마지막 의장 작업을 마치고 최후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파악해서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처음 작성한 것에서 잘 못되었거나 누락된 사항들을 수정했다. 다음은 타임워치를 가지고 몇 군데 샘풀 작업을 측정해 보면서 작동법을 익혔고 측정한 시간을 기록하는 양식까지도 개발하였다. 이렇게 준비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무려 두 달이 넘었다.

측정대상 차량이 정해지고 드디어 작업시간측정에 들어갔다. 현장을 떠날 수가 없으니 철저하게 작업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오전 오후 중간의 10분 휴식 시간에 볼일을 보았고 중식과 석식 시간에 언제나 식사를 마쳐야 했다. 야간 세시간 특근에도 물론 어김없이 현장에 있어야 했다. 처음 맡은 업무가 참으로 벅찼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나와 유시진 두 사람은 측정한 결과를 놓고 비교하면서 얼마나 일치하는지 혹 무슨 잘 못은 없는지 작업자의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성실도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면서 평가율(Rating)을 정하였다.

후렘 인 푸트 (Frame Input)에서 의장 라인 아우트 푸트(Output)까지 걸린 날자는 15일이 소요되었다. 측정 결과를 정리해서 공동 명의로 보고하였더니 과장은 별 말이 없고 똑 같은 작업을 한 번 더 하도록 지시하였다. 두 번째는 한 결 여유 있게 임했고 작업자들도 모두 구면이니 그들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작업을 담담하게 수행하였다. 측정이 끝나자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1차의 결과보다 약간 줄어들었다. 생산과장은 두 번째 보고를 받고는 비로서 노고를 치하 하고자 우리 두 사람을 산성 막걸리 집으로 데려갔다. 처음 마신 산성 밀주는 시골 농사를 지으면서 익숙해진 농주의 맛 그대로였다. 나는 즐겁게 많이 마셨지마는 별로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시진이는 대취해 버렸다. 배 과장은 내가 술을 유쾌하게 잘 마시는 것을 보고 술이 좀 센 사람으로 여겼다. 나에게 무척 호감을 가져 주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성한 작업시간 측정 결과는 생산현장을 관리하는 중요 자료가 되었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개량화된 자료이니 생산과장이 술자리까지 열어 주었으니까. 두 사람이 얻은 또 다른 수확은 버스생산작업 과정을 세세하게 파악 하였다는 것이다. 생산기술 업무를 하면서 생산 현장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2. 1차 버스 프로젝트

버스를 생산하는 공장으로써는 너무 협소하고 작업이 너무 무질서 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는데 신홍조 상무님은 이를 개선할 방법을 기술과에 지시를 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버스 수요가 많아져서 회사에서는 증산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주어진 업무는 공장 내에서 자가 제작하고 있었던 부품들에 대한 작업시간 측정이었다. 자가품들을 외주로 전환하고 많은 장소를 확보해서 버스 조립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었다.

두 번째 맡겨진 이 일은 자가부품을 외주로 내보낼 시 책정해야 할 부품 단가 중 인건비와 부자재비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인건비는 작업하는데 걸리는 시간 즉 맨아워 (M/H; Men Hour)가 기초가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작업시간측정 하는 업무를 숙달하여서 이 일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자료는 자재과에 넘겨져서 크게 활용되었다. 이로부터 부산버스 공장에 이공계 대졸 공채 사원이 처음으로 배치되어 주먹구구식 업무가 점차 계량화 되고 있다고 상급자들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기술과에서 설계한 장비 도면이 나왔다. 버스 차체를 조립하는 라인을 택트(TACT; 일정한 주기로 작업장을 옮기는 것) 작업에서 흐름 작업(컨베어 라인)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공장 바닥에 두 줄씩 두 개의 레일을 설치고 그 레일 위에 차체 바퀴를 올려놓을 운반대를 만들었다. 운반대와 운반대 사이에는 체인으로 연결하고 맨 앞쪽에 윈치(Winch)를 설치해서 천천히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20대 정도의 차체들이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흘러나온다. 이것을 설치하기 전에는 차체를 일렬로 세워놓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작업 하는 것을 멈추고 작업 차체를 일일이 토잉카(Towing Car)로 밀어냈다. 이 움직이는 시간에는 모든 작업이 중단되고 작업대와 공구들을 치워야 하는 막대한 시간 손실이 있었다.

이 흐름 작업으로 개선한 것이 생산량 증가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기술과에서는 윈치시스템(Winch System)을 설치하는 일로 끝나고 부수적으로 보안해야 할 것들은 생산과 몫이었다. 유시진과 나 두 사람은 이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였다. 모든 작업대들도 바퀴를 달고 갈고리를 만들어 차에 고정하여 함께 움직이도록 한다 던지, 용접기와 그 전선, 에어라인(Air Line)과 호스(Hose)등을 편리하게 설치하는 등 보안해야 할 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이 개선작업은 실로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개선하기 전 생산은 오전에 한대 오후에 한대였으나 개선 후에는 각각 2대씩 증가하였던 것이다. 기본구상은 생산을 총괄하였던 신홍조 상무님이었으나 이를 잘 수행한 기술과와 생산과 직원들은 극찬을 받았다. 이것이 처음으로 부산 공장 작업 라인을 개선한 획기적인 프로젝트이었다. 투자한 돈은 극히 소액이었지만 생산능력은 배가된 것이니 상무님의 아이디어는 빛이 났다.

3. 신홍조 상무님

추석 때 신상무님은 직원들을 자기집으로 초청하였다. 선임자들이 신입 사원인 나, 유시진, 배은효 세 사람에게 상무님께서 술잔을 돌리는 법칙 세가지를 미리 말해 주면서 주의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첫째 술잔을 받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마실 것, 둘째 다 마신 뒤에는 카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말 것, 셋째 빈 잔을 옆 사람에게 건네주고 술을 가득 채워 줄 것 등이었다.

상무님 집은 동래에 있었는데 큰 저택이었다. 안 층 거실이 엄청나게 넓어서 20명쯤 되는 직원들이 직사각형으로 죽 둘러앉았다. 좋은 음식들이 앞에 가득 차려져 있는데 술잔은 상무님 앞에 딱 한 개뿐이다. 미리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 주전자들이 직원들 앞 상위에 드문드문 놓여졌다. 드디어 상무님이 세가지 법칙에 대해서 말하고 어기면 벌주를 내린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서는 옆에 있는 직원에게

"자, 술을 따르라." 하시면서 술잔을 내밀었다. 큰 유리잔에 알맞게 데워진 정종을 가득 받아서 단숨에 마신다. 그런 다음 웃음 가득한 얼굴로 옆에 사람에게 술잔을 건넨다. 그러고 정중하고 공손하게 술을 가득 부어준다. 이로써 상무님의 시범은 끝나고 술잔은 재빠르게 돌았다. 모두 긴장하고 있던 터라 첫 순배에서는 벌주를 받은 사람이 없다. 상무님은

"모두들 술을 잘 마시는구먼" 하면서 두 번째 순배를 시작하였다. 마치 어느 놈이 반칙을 하나 눈을 부릅뜨면서. 두 번째 순배에서는 내가 걸리고 말았다. 상무님께서는 다 마신 뒤 인상을 찡그렸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인상을 찌푸리지 아니했는데 억울하였지만 좌중에선 이미 폭소가 터졌으니 고스란히 벌주를 받았다. 두 잔 연거푸 술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얼떨떨해 온다. 다음 또 누가 벌주를 받으면 좌중은 폭소로 웃음바다가 되고 즐거워한다. 세 순배를 잔이 돌았다. 술이 약한 사람은 자세가 흐트러지고 혀가 꼬부라진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나도 이렇게 술을 먹기는 평생 처음이다.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상무님은 술고래였다. 이렇게 직원들을 대취하게 만들고 정을 주시는 사심 없는 분이었다. 나는 대취하였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상무님은 회사에서 부하 직원들에게는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관계없이 "야 임마"라고 불렀다. 나의 회사 일은 이럭저럭 잘 적응해갔다.

4. 신입사원의 해고

10월 초순 경 입사한지 아직 1년도 채 안되었는데 유시진 친구는 회사의 해고통지를 받았다. 참으로 뜻밖이다. 해고사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간 약 8개월 동안 똑 같은 업무를 부여 받아서 함께 일했고 공동명의로 보고서도 작성하였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해고통지를 받았다. 누가 봐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유시진이 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었던가?

나는 배열규 생산과장에게 심하게 항의를 하였다. 배 과장은 자기도 동감한다면서 해고발령취소를 강력하게 회사에 요청하겠다고 한다. 과장의 이 말은 물론 믿어야 하겠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한 우리 두 사람은 신 상무님 방으로 들어가서 해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우리 말을 들은 상무님은 김기섭 공장장에게 전화를 건다. 상무님께서도 입사한지 아직도 1년이 안된 직원을 해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로 생각한다면서 해고발령 취소를 요청하였다. 상무님 방을 나온 나는 배과장에게

"유시진이가 복직 될 때까지 회사에 출근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선언하였다.

다음 날 그와 함께 김해 수로로 가서 하루 종일 그와 함께 낚시를 하였다. 그는 가끔 낚시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붕어 몇 마리를 낚아 우리 집으로 왔다. 마누라는 붕어를 갈아서 추어탕처럼 얼큰한 매운탕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늦게까지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술이 취한 그를 단칸방이지만 자고 가라고 하였으나 하숙집으로 가겠다고 고집함으로 버스 타는 곳까지 나왔다. 그는 헤어지면서

"친구야 너는 오늘 결근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꼭 출근을 하여라."

하면서 신신당부를 하였다. 난 그 이튿날은 출근을 하였다. 하루쯤 시위를 하고 그쳤다. 친구는 며칠 혼자서 낚시를 하면서 지내다가 일단 상주 고향으로 올라갔다. 그는 끝내 복직이 되지 않았다.

생산과 야유회 한 마당 왼쪽부터 배열규과장, 유시진, 김 영화, 필자, 엄말현 등

그의 빈 자리를 보면서 나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썼다. 그는 내가 4년전면장학생으로 졸업한 것을 알고 다른 직원에게 칭찬을 많이 하였다. 그 뒤 그는 회사 밑 철뚝 길 좀 미쳐 길가에 사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흥아 타이어에 새 직장을 잡았다. 그러나 결혼한지 몇 달 되지 않아서 급성 신장염으로 세상을 떴다. 유복자를 남기고. 배은효와 내가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집에 가니 그의 부친이 와계셨다. 우리는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거저 친구를 잃은 슬픔에 울었던 것이다. 부산 묘원 등성이에 그는 묻혔다. "학사유시진지묘(學士柳時珍之墓)"란 묘비명이 세워졌다. 돌아오는 장의버스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5. 작업표준서 작성

이듬 해 1970년 3월초에 양영길, 황중광 두 사람이 생산과로 부임하였다. 양영길사원은 부산대 기계과, 황중광사원은 영남대 기계과를 졸업했으며 모두 ROTC 출신들이다. 이 두 사람은 뒷날 나의 필리핀 중고자동차 수출 사업에서 함께 일하는 인연이 되었다. 1년 만에 후배사원들이 들어왔으니 나와 배은효는 고참사원이 된 셈이다. 황중광이는 배은효가 속해있는 생산계로 배치되었다. 생산계는 생산계획을 수립, 통제하는 것이 주 업무이고 내가 속해 있는 공정계는 버스제술기술을 담당하면서 공장설비를 개선하는 일을 하였다.

나는 이미 버스생산공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양영길 사원에게 잘 설명하여 주었다. 곧 공정계의 업무분담이 있었는데, 그는 차체조립을 나는 의장조립을 맡았다. 이때 수행한 업무는 표준공법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부산공장에서는 작업표준서가 없었기 때문에 시급한 일이었다. 표준공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사항들은 작업공정별 소요자재, 작업인원, 장비, 공구 및 작업인원 M/H등 이었다. 소요자재에는 용접봉, 접착제, 소음방지제와 방청제등의 안전보호구도 언급되었다. 여기서 M/H는 앞서 유시진이와 둘이서 완성해 놓은 것을 활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이 작업표준서는 작업현장은 물론이고 자재부서에게는 대단히 유익한 것이었다. 참으로 벅찬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의 사명감을 가지고 열성을 다했다. 6개월이 지나 이것이 완성되었고 각 필요부서에 배부되었다. 이로써 개량화 되어야 할 업무는 거의 완성을 한 셈이다.

6. 방위병 근무

한편 1.21 사태 이후 정부는 군비강화에 주력하였다. 예비군 훈련을 강화하였고 병역기피자들의 색출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입영조치를 취하였다. 나 같은 보충역 자원들을 방위병으로 동원하였다. 나에게는 2920시간의 방위병 근무명령이 떨어졌다. 부산 용호동 해안을 경비하는 일이었다. 낮엔 회사근무를 해야 하고 밤엔 전포동 파출소에 집결하여 인원 점검을 받은 뒤 트럭을 타고 용호동으로 갔다. 오륙도가 앞에 있는 해안가 군 초소에 배치되어 군현역병과 함께 밤새 잠복근무를 하거나 순찰하는 일을 하였다.

새벽 다섯 시에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던 군 트럭을 타고 파출소에 돌아와서 신고를 하고 집으로 간다. 이렇게 근무하면 하루 8시간을 처 준다. 2920시간 복무를 다 마치는 데는 꼭 365일이 걸린다. 나 같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생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고의 세월 1년이 지나고 제대를 하였는데 계급은 이병이었고 군번은 93101599였다. 이것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방위병 근무 중 받은 어느 경남 여중생의 위문편지가 아내의 유품 속에 있었다. 이 편지를 받고 근무의 고달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7. 지엠코리아(GM Korea)

미국의 GM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한 파트너를 신진자동차로 결정하였다. GM은 현금투자를, 신진은 현물투자로 투자비율을 50:50으로 맞추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부산공장의 고정자산중 장비에 대한 자료작성이 나에게 떨어졌다. 난 부평공장으로 출장을 가서 이 일을 하는 지침을 설명 받았다. 자료가 작성되면 GM으로 넘기고 GM측이 현장실사를 하고 동시에 한국감정원으로부터 감정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장비목록표를 만들었다. 다 만들고 보니 이를 시설물, 일반기계, 공구로 분류할 필요성이 이었다. 그래서 각각 목록표를 다시 만들고 고유번호를 부여하였다. 누가 봐도 알아보기 쉽게 시설물은 F(Facility) 일반기계는 M(Machine) 그리고 공구는 T(Tool)등으로 첫머리에 붙였다. 그리고 이들을 Layout 상에 그 위치를 표시하였다.

각 설비나 기계, 공구에 대해서 규격, 취득일, 취득금액, 상각금액, 잔존가격의 내용이 총 망라되었다. 또 눈으로도 쉽게 볼 수 있어야 함으로 장비이력카드를 만들고 사진도 촬영하여 붙였다.

고유번호를 제작하여 해당 설비에다 붙여 놓으니 비로서 준비가 완료되었다.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최영재 계장이 GM 실사관 한 사람을 데리고 부산공장에 왔다. 나는 모든 준비된 자료를 최계장에게 넘겼다. GM 실사관은 내가 제출한 각종 자료를 보고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음으로 전량조사 하지 않고 랜덤 샘플링 하여 그것만 확인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지적한 장비의 고유번호를 보고 Layout에 그 위치를 확인하여 장비이력카드에 첨부된 사진과 현품을 대조 확인하니 일이 아주 쉽게 진행되었다. 최계장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 한국감정원 직원들이 공장을 방문해서 앞에서와 똑같이 일을 하였는데 그들도 일을 쉽게 끝마쳤다. 특히 내가 만든 장비이력카드를 보고 대단히 칭찬해 주었다.

현장실사를 한 뒤, 이들은 한 여관을 잡아서 함께 일을 하였는데 난 이들이 일을 끝낼 때까지 여관에서 같이 지냈다.

이렇게 해서 1972년 GM Korea 가 탄생하였다. 신문에는 미국의 최대기업이 한국에 투자를 한 사실을 보도하면서 미국의 대한 한국의 안보에 힘을 받게 되었다고 역설하였다. 나도 이 일의 축을 맡아 원만하게 수행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사람들하고 함께 일을 해야 할 것이니 영어실력을 연마하기에 애를 썼다. 생산과의 네 사람은 점심시간에 별도로 모여 공부를 하였다.

8. 2차 버스프로젝트

2차 버스 프로젝트를 승인 받았다. 주요골자는 도장라인의 설비를 대폭 보완해서 시간당 1대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산공장이 너무 협소함으로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애로점이 많았다. 그래서 윗 사람들은 언젠가는 버스공장을 이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 돈을 땅에다 파묻는 일을 금기시했다. 즉 공장이전 시 이설할 수 있도록 도장 설비를 설계 해야 했다. 그래서 대형 도장실(Spray Booth) 또는 대형 적외선건조실(Infrared Oven)들은 이전 설치 시 해체가 손 쉽도록 설계하였다. 결재과정에서 높은 분들은 한결같이 이에 대한 질문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나는 설계도를 펴 놓고 해체 시에는 이렇게 하도록 고안되었다고 설명을 해야 했다. 차체조립라인과 의장완성라인은 공정수를 세분하고 작업인원을 대폭 투입하는 것으로 시간당 1대 생산능력을 갖도록 하니 전 공장이 똑 같은 생산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니 계획대로 생산능력은 배가 되었다. 시간당 1대의 버스 생산 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당시 버스수요가 급증해서 버스를 사려는 운송업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즈음 이런 프로젝트를 완료하였으니 대단한 일을 하였다. 버스증산을 성공리에 끝낸 프로젝트 팀은 칭찬을 많이 받았고 모범사원표창도 받게 되었다. 이듬 해 1973년에 난 계장으로 승진하였다.

9. 3차 버스 프로젝트

3차 버스 프로젝트를 입안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밀리고 밀리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한 달에 육백대를 생산해 내는 공장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엔지니어들이 모였다. 부산공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나와 양영길, 조성기 계장이 참여하였고 본사에서는 진영무, 사재철 계장 등이 내려 왔다. 주야 맞 교대를 검토하였으나 주민들과 협의를 한 끝에 밤 9시까지만 작업이 가능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 온 것인데 이웃 주민들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만큼 차체 리뱃팅하는 소음이 컸던 것이다.

월600대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가동일을 월 25일 일 때 하루에 24대를 생산해야 된다. 이를 하루 가동 시간을 정상 8시간 특근 3시간 특근율 80%으로 계산하면 시간당 2.3대를 생산해 내어야 하니 곧 26분에 버스 한대씩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차체조립라인은 그 길이가 늘어나야 했으므로 그 앞 공정의 작업장을 비워야 했다. 2개의 큰 작업장이 있었는데 후레임조립라인은 동래공장으로, 차체서브라인은 외주로 내 보기로 결정하였다. 도장라인은 설비를 증설할 공간이 전혀 없음으로 어쩔 도리 없이 주야 맞교대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야간에 안면을 방해할 정도의 소음이 없었고 이웃 주민들이 합의를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작업자 식사시간 겸 휴식시간 한 시간씩 2시간을 빼면 하룰 22대 생산으로 2대가 모자란다. 이것은 도장 전문가인 조성기 사재철 두 계장이 공법을 개선해서 50분 택타임(Tact Time)으로 맞춘다는 복안이었다. 의장완성라인은 동쪽 편 출고장을 주래 찦차 공장으로 옮기고 이 자리를 활용하면 된다. 그런데 최대 난관은 차체조립라인에서 26분마다 흘러 나오는 차량을 50분에 한대씩 들어가는 도장라인과의 불균형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이었다. 완성된 차체를 주례공장으로 이전하였다가 야간에 투입하는 일은 거리가 멀고 교통이 번잡한 서면 로타리를 통과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서 불가하다고 결론을 보았다. 마지막 방법은 완성차체를 공장외곽 담벼락 밑에 불법 주차를 하였다가 야간에 한대씩 끌고 들어오는 방안이었다. 항상 최소한 12대는 불법 주차를 해야 하는 일인데 이 일의 해결은 총무부가 나서서 당국의 양해를 구하는 일이었다. 총무부가 이 일을 해 내었다. 당시 전포동 신진공업사라고 하면 부산에서는 제법 큰 공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3차 버스 프로젝트의 추진 방향이 결정이 되었고 성안되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뭉쳐진 결과이었다. 후레임 조립라인은 모든 설비와 작업인원들이 그대로 동래공장으로 차질 없이 이전되었다. 차체 옆장과 앞 뒤장 서브 조립라인은 후배 사원 한 사람이 발주를 받아 나가서 공장을 차렸다. 그는 재빠르게 선수를 써서 의엿한 사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동쪽 축대 위 공간은 공장 건물을 짓지 말라는 윗 사람들의 지시 때문에 할 수 없이 노천 작업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비가 올 경우 의장외부작업이 불가함으로 내부작업만 하도록 공법을 다 바꾸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어감에 따라 작업자를 먼저 뽑아서 교육을 시켜야 했다. 대대적인 공원채용광고가 나갔다. 나는 실기 시험관으로 지명을 받았는데 위 사람, 동료들의 청탁이 많았다. 나는 실기시험관이었지만 응시자 대부분이 농촌에서 일하고 있던 무지렁이 들이었으므로 나의 실기 과제를 제대로 해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실기과제는 접어두고 사람의 심성이나 첫 인상 체력 등을 감안해서 채점을 했다. 솔직히 객관성이 없었다. 청탁은 큰 하자가 없으면 다 들어 주었다. 이때 시골 마을 친척들, 그리고 처가 집 동네의 처남과 그 이웃 청년들을 많이 들어오게 하였다. 그 중 장모님이 부탁하는 청년도 두어 사람 있었고, 둘째 매제도, 초등학교 동기생 한 사람 등도 입사를 시켜 주었다.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산업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싯점이 되었다. 이런 일은 뒷날 부평공장 르망생산을 위해서도 또 한 한 번 일어났는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회사에 입사하도록 도왔다.

드디어 각고의 노력 끝에 모든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몇 번 시험작업(Tryout)을 거쳐 처음으로 600대 월 생산이 이루어진 달 회사에서는 대대적인 잔치를 벌렸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좁은 공장에서 어떻게 월 600대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것인가? 버스를 컨베어 라인에서 조립을 하다니 이것은 세계 유례가 없는 사실이고 기적에 가깝다"

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당시에는 버스 공장이 벌어서 부평 공장을 먹여 살린다고들 하였다.

10. 동래공장

1978년 나는 과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동래공장 프레스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버스공장에서는 더 크게 할 일이 없던 나는 동래공장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공장 앞 마당에 정신 없이 늘어놓은 금형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프레스 공장 실태조사를 해보니 금형 관리가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한 작업이 끝나면 다음 작업을 하기 위해서 금형을 교환해야 하였다. 사용한 금형을 마당에 옮겨놓고 교환해야 할 금형을 찾아와야 하는데 마당에 그때그때 제 멋대로 갔다 놓았으니 그 금형을 찾아 내는데 헤맸다. 이것을 정리하는 일이 급선무이었다. 나는 현장에서 똑똑한 직원 네 사람을 선발하여 기초자료 조사부터 시작하였다. 조사할 양식은 내가 만들어 주었다. 프레스기 호수, 작업하는 부품명, 공정, 금형 규격 등 양식에 채워 넣도록 하였다. 이 조사가 완료되니 금형에 코드 부여가 가능하였다. 금형 총 수량과 규격을 계량화하니 저장할 저장대의 크기와 수량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저장대가 하나 둘 제작이 될 때마다 저장대 번호가 부여되고 저장할 공간에 금형코드(Code)가 흰 페인트로 예쁘게 쓰여졌다. 그렇게 하나 둘씩 금형이 전부 저장대에 보관되고 보니 공장은 완전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정신 없이 널브러져 있던 크고 작은 금형들이 저장대위에 일정한 장소에 저장되고 지게차의 통로가 넓어 원활하게 되었다. 많은 장소도 생겨났고 금형을 찾아 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누가 봐도 일목요연하게 또 보기 좋게 정리 정돈이 되었으니 과연 프레스 공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일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던 이옥남 공장장은 드디어 완성 된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나와 참여한 직원과 부장을 대단히 칭찬하였다. 또 큰 술자리를 열어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술자리에서 흥이 난 나는 나의 십팔번 청해가를 부르며 함께 즐거워했다.

가을에는 직,공장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의도로 부평공장을 견학하는 계획이 있었는데 그 인솔 책임자로 내가 가게 되었다. 총 인원은 40명 가까이 되는 대부대였다. 회사에서는 직장 또는 공장의 직위를 가지고 근무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보는 것은 처음인 사람이 많았다. 서울 한강변에 늘어선 아파트들을 보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부평 공장 구석구석 둘러보았으며 특히 동래공장에서 만든 부품들이 부평 트럭공장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고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귀로에는 온양온천에 들러서 온천욕도 즐기고 맛 좋은 음식에다가 술을 기분 좋게 마셨다. 공장에서 갇혀 일만 하다가 이렇게 나들이를 하니 모두들 어린애 모양 즐거워하였다. 술을 좀 과음한 사람도 몇몇 있었지만 비교적 이른 시간에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들 내 지시에 순순히 따라 주니 고마운 생각이다.

이튿날 아산 현충사에 들렸다. 충무공 사당 앞에서 내가 대표로 헌향 하였으며 사원 도성재의 구령에 따라 묵념을 하고 충무공의 애국충성을 기렸다. 이제 돌아오는 길이다. 전날 지시한대로 도성재는 술과 좋은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하였다. 차 안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나는 사심 없이 놓고 싶었다.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술도 마음껏 마셨다. 한 사람도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이 모두들 즐거운 모습을 보였다.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견학을 마치고 온 것이 고마웠다.

이튿날 공장장님에게 무사히 견학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시종 화기애애 하였다고 보고를 드렸다. 그리고 총무부장에게 예비비로 쓰라고 준 돈 중에서 남은 것을 반납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이 돈은 내 재량 껏 다 사용하라고 준 돈임을 알았다. 총무부장은 남은 돈을 반납한 나를 두고 함으로 순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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