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둔마의 마이웨이<끝>…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김진성

4. 남은 장작

쓴 소리와 괘씸죄

현직에 있으면서 장관이나 교육감에게 직언을 자주 했다. 엄격한 공직사회 위계질서 속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나의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소신껏 할 말을 하며 살아왔다. 잘못된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병이고 탈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키워준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나 귀국할 때면 초·중·고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길가에 줄을 서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국군의 날이면 수천 명의 학생들이 여의도 광장에 나가 카드섹션을 했다. 학교별로 3주일 정도 연습한 다음, 최종 일주일은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여의도 광장 뙤약볕아래 모여 연습했다. 얼굴이 까맣게 타는 것은 둘째 치고, 힘에 겨워 쓰러지는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국군의 날 행사 실무자인 현역 중령이 학생 동원 협조를 위해 여러 차례 찾아왔을 때, 어렵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 공문이 계속 내려왔다. 화가 치밀었다. 내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자 국군의 날 제병 지휘관인 J 중장이 군복 차림으로 참모를 대동하고 교육감실을 찾아왔다. 교육감은 실무자인 나를 불렀다.

"교육감님 그리고 장군님, 학생은 동원의 대상이 아라 참여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이제는 학생 동원이 어렵습니다,"

겁이 났지만 오기가 발동해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뒤로부터 학생을 길거리나 광장에 동원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나는 이 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1989년 3월, 장·차관을 비롯하여 교육부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자체 연수가 있었다. 국무총리실을 비롯하여 많은 부처가 같이 있는 광화문 종합청사 19층 대회의실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교육부에 4년 반 근무하는 동안 그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다. 그 날 강사로 나가 에 대해 강연을 했다. "교육부는 민주화, 교육청은 전문화, 학교는 능률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교육 전문직인 정신교육 장학관으로서의 존재감을 확고히 굳혔다. 그 후 나에 대한 실 국장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 같았다.

당시 교육부의 통일 교육 관련 업무가 엉망이었다. 업무가 네 개의 실국에 나뉘어져 새로운 업무가 나오면 서로 핑퐁치기 일쑤였다. 통일 교육 관련 업무 전체를 맡고 싶다고 장관에게 말했다. 그 후 장학실 정신교육 장학관 소관 업무로 통합되었다. 증원을 요청해 연구관과 연구사를 세 명 늘렸다. 업무를 가져갔다고 빈정대는 직원들도 있었다. 통일원과도 협력했다. 당시 남북이 공동으로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세 개의 분과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나는 사회문화공동위원회(위원장 임동원)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통일교육원에서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학교 통일 교육의 방향'에 대해 강의를 하였다.

서울시 의원으로 일할 때, 무상급식이 최대 이슈가 되어 있었다. 나는 무상급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상머리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쓴 소리를 토해냈다. 건강, 체질, 취향이 각기 다르고, 소아 비만, 당뇨, 아토피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강제 급식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처럼 급식은 개개인이 선택할 기본권이라고 주장했다. 공짜라고 하는 무상급식은 납세자가 밥값을 내는 유상급식이고, 그렇지 않으면 밥 먹은 학생이 장차 이자까지 붙여 내는 외상급식이며, 표를 의식해 만들어낸 정치급식이라고 비판했다.

교육부 장관 평균 재임 기간은 일 년도 채 안 된다. 장관은 잠시 왔다가 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니 무슨 수로 일관성 있는 교육정책이 원활히 수행되겠는가. 장관이 업무를 파악해서 일할 때쯤 되면 '장관 안 바뀌나'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무슨 국가 백년대계를 논의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교육부에서 다섯 분의 장관을 모시고 일했다.그 중 세 분에게 교육개혁을 하려면 3개월 내에 하고, 6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사업을 아예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교육부의 인적 구성은 일반 행정직과 교육 전문직으로 이원화돼 있다. 일반 공무원인 일반직은 관리 기능을, 교원 출신의 전문직은 장학 편수기능을 담당한다. 이들은 협력보다는 갈등의 골이 깊었다. 내가 교육부에 근무하던 1980년대, 장관이 주재하는 실·국장 회의에 참석하는 6명의 고위직 중 전문직은 장학편수실장 한 명뿐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일반직과 전문직이 비슷했는데 전문직은 계속 줄어들어 일반직의 5분의1 수준이 되었다. 전문직은 일반직에 종속되어 일하는 구조가 되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직제의 밸런스뿐만 아니라 전문직도 일반직처럼 국가 비용으로 유학도 보내고, 국방대학원과 중앙공무원교육원에도 보내 전문직 간부를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나는 교육부 안팎에서 전문직의 대변인으로 불려졌다.

1991년 여름, 일반직 출신 교육부 퇴직공무원 모임에서 헌법재판소에 위헌 소송을 냈다. 교육감은 교육 행정의 수장인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실·국장을 역임한 일반직이 교육감에 적격자라고 주장하였다. 자신들에게 피선거권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법은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평등권과 공무담임권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적극 대처했다. 헌법의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및 정치적 중립성' 규정은 평등권과 공무 담임권 규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할 특별 규정이라고 주장했다. 교육 행정 기관에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감 자격을 인정한다는 것은 법무부에서 일반직으로 근무했다고 지방 검찰청장이 되고, 국방부의 일반직 국장이 군 사단장이 되겠다는 것과 같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교육 자치는 교육의 전문성, 특수성을 살리기 위한 헌법적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일반직들의 헌소는 흐지부지 됐지만 나는 더욱 더 일반직의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1994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작은 정부' 방침에 따라 각 부처의 직제 개편이 이뤄졌다. 교육부 역시 기구를 줄인다는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니까 만만한 전문직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다. 교과서를 만드는 편수국을 없애더니 교육 자치를 구실로 장학지도 담당 부서까지 없애버렸다. 내가 교육부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후 일어난 일이었다. 일본에서 국제전화로 장관에게 이 문제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편수국과 장학실을 없애면 안 된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장관에게 전화 건 것이 일반직들에게 알려지면서 나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높아졌다.

1997년 3월 1일자로 고등학교 교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당시 S고등학교는 시내에서 전교조 영향력이 가장 큰 학교 중의 하나였다. 교사들이 담임을 거부하고 보충수업도 거부하는 등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교육감으로서는 큰 골칫덩어리였다. 교장을 다른 학교로 옮기고 나를 그 자리에 발령 낸 것이다. 3년간 해외 근무한 탓에 국내 사정이 어두운 나를 학교를 수습할 유능한 적임자라고 치켜세워 발령을 냈다. 실제 내막은 교육감 선거 경쟁자로 거론되던 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EBS TV 토론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육 개혁의 꽃인가'에 출연했다. 장관, 교장, 교사, 학부모, 교수가 함께 참석했는데, 학운위를 비판하는 사람은 교장인 나밖에 없었다. 함께 참석한 이 모 장관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부모이고, 사모님은 학운위 위원장이었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회자 허운나 교수가 내게 물었다. "학교운영위원회를 교육개혁의 꽃이라고 하는데, 이에 동의하십니까?"

"글쎄요, 잘 해야지요. 지금 학교현장 사방에 갈등의 꽃만 피고 있지 않나요?"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이 교육개혁의 꽃이라고 하는데 현직 교장이, 그것도 장관이 학부모이고 장관 부인이 학운위 위원장인 그 학교의 교장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학운위 반대론자였다.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신문에 학운위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난리가 났다. 어찌 현직 교장이 그런 비민주적인 글을 쓰느냐고 하면서 교육부 담당 과장이 반론 칼럼을 실었다. 나는 반개혁 교장으로 몰렸다. 나는 학운위는 교사들의 집단이기주의와 편의주의와 결탁하고, 학교장 책임제를 약화시켜 학교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은 그런 쪽으로 흘러갔다. 학교의 민주화, 교육의 민주화는 제도 개혁이 아닌 체질 개선으로 가야 성공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었다. 그 후 홍익대에서 '학교운영위원회에 대한 학교 구성원의 인식과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운 놈하고 오래 지나다 보니 정이 들었js 것 같다.

1998년 교육부 관리관급인 학교정책실장 발령이 있었다. 내가 0순위라고들 했지만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러려니 했다. 내 자신에게 '네가 한 짓을 네가 알렸다!'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일본에 갈 때 내가 추천해서 내 자리를 이어받은 분에게 밀리고 말았다. 지금도 장관과 일반직에게 밉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2년이 지나 이번에는 학교정책실장을 공모한다기에 지원서를 냈다. 면접으로 선발한다고 하기에 기대를 걸었다. 면접관은 대학 교수와 일반직 관료 네 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일반직 관료가 두 명 있는 것을 보고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반직 관료인 한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김 교장님은 정부의 교원 정년 정책을 강력히 반대했고, 지금도 정년 환원 운동을 벌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실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년을 환원해야 한다는 개인적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입니다. 국민소득 100불 시대에 교직에 들어온 분들을 토사구팽시키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조직의 일원으로 일할 때는 그 조직의 방침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버무렸지만 돌직구로 물었는데 스리쿠션으로 답한 셈이다. 면접관이 또 물었다.

"교육부에 일반직과 전문직 간의 갈등이 있다고 보십니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일반직이 전문직 대변자, 저격수로 불리는 내게 답변을 요구한 것이다.

"일반직과 전문직 간의 갈등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교육부에 들어가면, 원인을 찾아 갈등 관계를 상호 보완 관계로 만들어가겠습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학교정책실장은 우리나라 전체 교원을 대표하는 자리이고, 전문직 출신의 최고급 참모인데 어떻게 일반직 관료가 면접을 해 뽑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교육부장관이 직접 면접을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 면접관은 내가 교육부에 처음 들어가서 전 직원을 모아놓고 연수할 때, "장학관님은 이곳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대학 교수로 가셔야 합니다."라면서 나를 보좌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부에서 장관을 모시는데 천재적 소질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뒤 그는 승승장구하면서 '아무개의 남자'라고 신문에 이름을 올렸다. 쓴 소리는 괘씸죄가 되어 나의 앞길을 막았지만 그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바보들의 행진곡

1991년 경상남도에서 교육위원이 교육감에 당선되었다. 그 당시 교육감 선출 방식은 소수의 교육위원이 교육감을 뽑는 방식이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은 교육감 선출을 위촉받은 자가 교육감에 선출된 것은 무효라고 했지만, 교육위원이 교육감 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으므로 당선이 위법이 아니라는 법제처 해석이 나왔다. 이후 각 시·도에서는 교육위원 중에서 교육감이 나왔다. 일본은 금지 규정은 없지만 '교육위원의 교육감 불가라'는 법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교육위원이 교육감이 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교육감 선출을 둘러싼 비리 부정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선거 방식을 바뀌었다. 선출권이 학교 운영위원장에게 갔다가 계속 말썽이 일어나 다시 학교 운영위원 전원으로 확대되었다.

나는 2000년 7월,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입후보했다. 9명이 출마했다. 중등 후보 중 내가 최다득점을 했다. 그러나 선거를 치르고 난 후, 과연 그런 선거를 해야 하는지 회의에 빠졌다. 현직 교육감과 전교조를 뺀 나머지 입후보자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선거건자 명단조차 구할 수 없었다. 명단은 교육감과 전교조만 갖고 있었다. 나는 선거 유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단체와 언론에서 계속 이 같은 불합리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치권은 강 건너 불을 보듯 구경만 했다. 교육청 간부들로부터 현 교육감을 지지해 달라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는 제보가 계속 들어왔지만 손쓸 방도가 없었다.

2000년 4월 10일자 중앙일보는 '교육감 선거 관권 의혹'이란 제목으로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현 Y교육감의 재선을 위한 포석으로 일선 학교 운영위원으로 교육청 국·과장, 장학관, 장학사 등 직원들을 대거 참여시켰다고 보도했다. 교육감이 관권을 이용하여 학년 초에 일선 학교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았다는 보도였다.

2000년 6월 9일자 문화일보는 '특별 예산 선심성 집행 의혹, 학교운영위 연수에서 노골적 사전 운동 물의'란 제목으로 부정, 관건선거의 실상을 보도했다. 모 교육청 연수에서 Y교육감은 전체 연수 시간 80분 중 절반을 할애 받아 자기 자랑을 하도록 했다. 다른 강사인 교육장 역시 "Y교육감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실제 Y교육감은 일선 학교를 방문하여 학교 운영위원을 모아놓고 선심성 약속을 하고 예산 지원을 하였다.

2000년 7월 19일자 국민일보에 '서울시 교육감 선거, 정치판 뺨치는 과열 혼란'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2000년 7월 25일자 문화일보는 '교육감선거법 현직 우대 논란, 현 교육감만 연수 학교 방문 나 홀로 운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소도 웃을 교육감 선거'라는 글이 독자란에 실리기도 했다. 각 일간지는 사설이나 시론을 통해 교육감 선거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땅 짚고 헤엄치는, 소도 웃을 불공정 게임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나는 국회로 이주호 의원을 찾아가 그간의 교육감 선거의 문제점과 법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 의원은 자신이 교육자치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법 개정을 발의해서 추진하던 이 의원이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입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육감 선거 관련 개정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나는 학교 운영위원이 뽑는 교육감 선거에 실패했지만 제대로 된 법아래서 교육감이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의 법-제도를 연구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법안을 마련했다. 돈 안 들고, 교육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시·도지사와 협조가 잘 되고, 어느 정파에도 유불리가 없는 안이 만들ㅓ졌다. 국회로 여야 의원을 찾아다니며 이를 설명했다. 교육감은 시·도지사와 러닝메이트로 하고, 교육 전문가를 시·도의원으로 뽑자는 안案이었다. 교육청에 있는 이름뿐인 교육위원을 없애고, 실질적 권한을 갖는 명실상부한 교육의원을 비례대표로 선출해 다른 일반 시·도의원과 똑같이 활동하도록 했다.

시민단체 '교육선진화운동'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내가 주제 발표를 하고 토론자로 한겨레 논설위원, 광주 지자체장, 교육법학자, 교육개발원, 학부모, 교육위원, 교장 대표를 불렀다. 비판 세력도 다 부른 것은 그 누구를 상대로 하든 내 안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에 '이대로 가면 교육계 아수라장 된다'와 '교육감 선거는 범죄 선거 아닌가'라는 칼럼을 써 큰 호응을 얻었다. 이어 30개 시민단체 대표가 모여 '교육 자치법 개정 건의문'을 채택하여 국회에 올렸다. 서울시의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교육자치법 개정을 위한 입법청원 결의를 하여 여야 정당과 교육부, 그리고 국회에 제출했다. 모두 교육감 러닝메이트와 교육의원 비례대표제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여야 국회의원들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개정안을 갖고 있었다.

제18대 국회에는 교육자치법 개정을 위한 12개의 의원 입법안이 올라와 있고, 정부안도 2개 있었다. 이주영 외 17인을 비롯하여 안민석 외 13인, 이용섭 외 42인, 강봉균 외 83인, 이상민 외 11인, 이시종 외 10인, 김세연 외 10인, 정희수 외 10인, 박주선 외 12인, 양승조 외 13인으로 재적의원 3분의 2가 넘는 숫자다. 그러나 정작 통과된 법안은 엉성하기 짝이 없고 문제투성이였다. 여야 법안소위에서 합의한 교육의원 비례대표제도 막판에 물거품이 되었다. 선거일이 임박해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교육계가 갑자기 여야소위에서 통과된 안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어긋난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국회는 이를 핑계로 어물쩍 처리해버렸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되었다.

교육계는 동상이몽이었다. 교육감 선거에 대해 각자 계산법이 달랐다. 전교조는 우파 난립의 선거판에서 좌파 단일화라는 어부지리의 꿈을 꾸고 있었다. 교총은 비대한 자신의 몸집만 믿고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반대 명분을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서 찾은 것이다. 결국 교육감, 교육위원 모두 주민 직선제가 되었다.

교육의원 서거구가 시·도지사 선거구보다 더 넓은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광주, 대전, 울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제주가 인구 200만이 안 되는데 이 보다 더 큰 교육의원 선거구가 수두룩했다. 투표를 하려니 누가 적임자인지 알 수는 없고, 기권하자니 찜찜해 기호 1번을 찍고 말았다. 소위 '로또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셈이다. 기상천외의 제도로 입성한 로또 교육의원의 의정활동은 기대 수준 이하였다. 교육의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고, 일반 시‧도의원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드디어 국회가 교육의원 제도 자체를 없애버렸다.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감히 말하건대, 교육의원 제도는 내 작품 아닌가. 기회 있을 때마다 교육의원 직선제를 비례대표제로 바꾸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말해왔다. 제도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경고를 해도 귀 기울이는 교육의원이 없었다. 로또선거를 만들어낸 교직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교육감 러닝메이트와 교육의원 비례대표제가 채택되었더라면 우수하고 덕망 있는 교육 전문가들이 발탁되는 등 교육계의 위상이 크게 향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를 차버린 사람들이 한국교총, 전교조 그리고 당시 교육감 옆에 있던 일부 교육위원들이다.

교육계가 즐겨 부르는 애창곡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다. 이 애창곡은 전교조, 한국교총, 교육위원 모두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니 그럴듯하게 들린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노래는 교실에서나 불러야 할 노래지, 정치 선거판에서 부를 노래가 아니다. 이는 교실에서 교사가 지켜야 할 지침이요 덕목인 것이다.

드디어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2014년 교육감 선거가 끝난 후 '교육감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청원서'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현행 제도를 반대하는 서명자가 18만 명에 달했다. 청원서를 국회와 교육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교육계의 분열과 비협조로 이루지 못한 교육자치 제도 개선을 위해 시민단체가 구원투수로 나선 것이다. 내가 취지와 내용을 설명했으나 힘이 나지 않았다. 지난날 온 힘을 다해 뛰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던 사항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국회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제 밥도 제대로 찾아먹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하는 교육계가 과연 교육자치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정치를 몰라

나는 그 동안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교육 문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눠봤다. 2000년 3월 어느 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현직 교장인 나를 플라자호텔에 초청하여 장시간 교육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대학 교수 세 사람을 함께 초청했지만 주로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내가 남다른 교육 이론가라서가 아니라 현재 학교에 몸담고 있어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2001년 9월, 내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책 출판기념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석해서 축사까지 해주었다. 이 때 이명박 씨를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회창 총재가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나의 저서 『교육, 문제는 많지만 대안도 있다』를 챙겨 간다는 동아일보 가십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또 한나라당 손학규 대선 예비후보와 유세 버스 안에서 두 시간 넘게 교육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 내용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나갔다. 경기도 김문수 지사는 교육정책 세미나에 나를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 청중이 많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갔으나 달랑 김문수 지사 외에 좌승희 경기발전연구원장 등 세 사람만 있었다. 전문가 좌담인 셈이었다. 내가 '한국교육의 위기와 대책'으로 주제 발표를 하고 두 사람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김 지사는 세 시간 자리를 뜨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하고 꼼꼼히 질문을 했다.

서울시장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명박 시장은 그 전에 나의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해 주었고, 시장 재직 중에는 강남 도산로에 있는 유인촌의 연극 전용극장 유 씨어터와 세종문화회관에서 함께 공연을 관람하는 등 격의 없이 사담도 나누는 사이였다. 나는 대선이 끝난 후에 내심 이명박 대통령에게 줄 '교육정책 제안서'를 만들어 놓고 기다렸으나 불러주지 않아 헛수고였다. 뒤늦게 최측근에게 대통령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헛일이었다.

나는 그 동안 정치인들에게 많은 서신을 써서 보냈다. 장관들에게도 잔소리깨나 해댔다. 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데 찾아가 교육 뮨제 해결을 부탁했다. 정치인에게 보낸 서신이 수백 통은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임태희 대통령 실장, 윤진식 청와대 정책실장, 박근혜, 정몽준, 홍준표, 황우여, 이종구, 정두언, 유승민, 권영세, 진수희, 권영진 의원, 오세훈 시장, 박세일 이사장, 안병만 장관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정치권에 보낸 편지는 몇 사람만 빼고는 먹통이었다. 회신을 받아본 경우가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서울시의원 시절, 하루는 어느 동료 의원이 찾아와 무엇인가 부탁하려는 눈치를 보이더니 그것을 접고 이렇게 말했다.

"김 의원님, 의원님께서 서울시장, 교육감에 대한 질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의원님은 정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잘 부탁합니다."

큰소리치던 그는 얼마 후 문제가 생겨 옷을 벗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분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정치를 모른다'고 한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정치는 구정물 튕기며 더러워도 무조건 끌어안아야 한다. 속마음을 감추고 실속을 챙길 줄도 알아야 한다. 거래도 하고 허풍도 떨고 돈도 펑펑 쓸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고고한 인격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남이 주는 것을 무조건 거절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한계가 있었다.

시의원 시절, 교육문화위원회 소속이었다. 교문위 상임위원장에 출마했다. 선거운동은 치열하였다. 위원장 후보가 나의 의원실로 연달아 찾아오고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술파티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나의 선거운동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나를 알리는 방법으로 출판회를 열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교조 증후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강영훈, 현승종, 이회창, 정원식 전 총리, 김수환 전 국회의장과 김동길, 이동복 전의원 등이 격려사를 해주었다. 공정택 교육감, 신지호, 진수희, 임태희, 이시종 의원, 김허남 전 의원, 조완규, 김숙희, 이승훈 전 장관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다. 시의회의장을 비롯하여 동료의원들도 많이 참석했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내빈을 일일이 소개하지 않고 단지 이름만 호명했다. 애국가는 4절을 다 부르게 했으나 끝나고 나서 기념 촬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착각했다. 그날의 출판회에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시의원들도 알아주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서울시의회 110명 의원 중에 유일한 교육계 출신이라 인정해주리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상임위원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나는 역시 둔마였다. 교육자의 티를 벗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1996년 8월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가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때 나는 주일한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유력 정치인으로부터 나를 서울 교육감으로 만들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쉽게 승낙했으나 지난날 나의 상사가 입후보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나대신 L교육감을 지지해 달라고 간청했다. 정치권이 손 놓은 상태에서 선거가 이뤄졌다. 투표 결과는 13 대 12로 당시 Y교육위원의 승리로 끝났다. 교육감 선거 무효 소송이 서울고등법원에 제기되었다. 승소가 확실하니 모든 것을 정리하고 교육감 선거에 대비해야 한다고 서둘러 귀국하라는 주문이 빗발쳤다. 일본에서 벌여놓은 일이 많아 고민하다가 결국 귀국을 결심했다.

당시의 교육자치법은 "교육위원은 교육위원회 회의 시에 본인 또는 직계 존비속과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안건에 관하여는 의사議事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법을 믿고 귀국했다. 이 규정은 누가 보아도 교육위원은 자기 자신을 교육감으로 뽑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대법원 재판 결과는 뜻밖이었다. "본인 또는 직계 존비속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안건이라 함은 일신상의 문제나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경우를 말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가. 그때부터 사법부를 믿지 않는 못된 버릇이 생겼다. 교육감으로 뽑아주겠다고 하는데도 양보를 하다니. '기회는 나는 새와 같다. 날기 전에 잡아라'고 했는데 그만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나는 둔마였고 바보였다.

그 뒤에도 기회가 있었다. 교육계 출신 J 전 총리가 나를 교육감으로 추대하겠다고 했을 때도, M 전 장관이 교육감 후보를 양보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지지 사인을 보내왔을 때도,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나는 단순한 개혁 의지가 아닌, 강력한 권력 의지를 보여주었어야 했었다. 역시 나는 누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를 모르는 정치 감각이 둔한 존재였다.

내가 좋아하고 가까이 지낸 정치인들은 많다. 그 분들과 만나 대화하면 부담이 없고 즐거웠다. 고교 시절 나의 꿈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여의도 진출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기성 정당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박세일 교수와 함께 '국민생각'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어 정계 진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한동안 그렇게 동경하던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혐오대상이 되었다. 여의도에 입성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다 태우고 싶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의미가 내 마음을 울린다.

어떠한 어려움도 굳센 의지로 밀고 나가면 극복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의 학교붕괴 사태를 풀려면 산에 있는 돌 하나하나를 옮기는 우공이산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숨에 해결할 수 없지만 그쳐서는 안 된다.

정치권은 교육계의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왔다. 평준화, 사교육, 사학법, 전교조, 교원정책, 단체협약, 교장 임기제, 정년단축, 무상급식, 인권조례, 혁신학교 등 역대 정권의 대표적인 교육 정책이 하나같이 정치적 꼼수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되어 왔다. 이제 학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학원은 문전성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정치권은 교육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내몰라 한다. 교육 행정은 헛발질을 하고, 학교 현장은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지난 세월 여덟 권의 책을 통해 그리고 신문 칼럼이나 TV 토론, 세미나, 강연 등을 통해 수없이 내놓았던 나의 주장은 어디로 갔는가?

필자가 2012년에 펴낸 『꼼수가 교육 망쳤다』는 우리나라 교육이 정치꼼수에 의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 많은 의견과 주장 중에 교육당국에 의해 반영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주장은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정책 실패를 통해서 느낀다.

퇴임하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좋은 때 교장 한번 못하고, 이 좋은 때 교사 한번 못하고 물러갑니다."

학교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만하다. 식물 교장은 오늘도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난다. 방휼지쟁蚌鷸之爭을 생각한다. 조개와 도요새가 물고 물리며 서로 싸우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만다는 고사다. 학교는 교장과 교사가 파워 게임하는 장소가 아니다. 교장과 교사가 서로 싸우고, 교총과 전교조로 갈라져 싸우는 사이, 학교는 표류하고 있다.

마침내 교육현장은 안개와 스모그가 깔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데, 정작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들은 담장 안에 모여 앉아서 햇볕만 쬐고 있다. 학교는 죽어가고 있다. 위정자들은 선거철만 되면 교육개혁을 깃발처럼 나부끼지만, 그때뿐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개발에 재건축을 해야 한다.

학교 붕괴 실태를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선은 교사나 학교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겠지만, 학교의 힘만으로는 학교 붕괴를 해결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일선 학교 교장이나 교사들은 그 동안 역량 부족, 의지 결여, 무능으로 지적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학부모들에게 제대로 알려 그들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학교와 가정은 달리는 수레의 두 바퀴다. 솔직한 현실 파악과 반성 위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방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편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주저하는 준마로 살지 않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가는 둔마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분노를 삭이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은 편하다. 인간 세상에 대한 그 동안의 미움이나 안타까움도 접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런데도 지난날의 미련이 앙금처럼 남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다시 가슴앓이를 하라 한다. 먼 곳을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나의 벗이었다.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었다.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뛰었다. 내 가슴을 뛰게 한 욕망은 어떤 사람들에겐 눈을 멀게 했지만 내게는 눈을 뜨게 한 원동력이었다.

아직도 타다 남은 장작이 남아 있다. 남은 장작을 모두 태우고 싶다. 나의 주장과 꿈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날아갈지라도 언젠가는 성책이란 메아리가 되어 돌아 오리라고 믿는다. 병든 교육을 고치고, 일그러진 교육을 바로 세울 수만 있다면 험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노를 잡고 바다로 나가리라.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화를 대하면 나의 존재는 너무도 초라하고 왜소하다. 둔마는 노마지지老馬之智를 이용한 관중管仲이 나타나리라 기대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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