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둔마의 마이웨이<2>…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김진성

2. 멍석

나는 초중등 교육계에서 어려운 시기마다 마당에 멍석 펴는 역할로 동분서주했다. 교외 생활지도, 학생극장, 극기수련, 국토순례, 오애교육, 통일광장, 도농 자매결연, 모의국회, 어머니 교실, 일일교사 등등에 수없이 많은 멍석을 폈다. 특히 기본생활습관지도와 공동체 교육에 신경을 썼다. 교육자치의 정상화를 위해서 남달리 뛰었다. 불합리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서 성취의 희열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평생 몸담아온 교육계에서 장작 주워오고 불 지피느라고 얼굴에 검정 묻히며 살아왔다. 평소 가만히 구경만 하다가 밥 끓을 때가 되면 숟가락 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보다 앞장서서 장작 주워 밥 짓고 멍석 까는 일을 가장 열심히 한 사람이 바로 '김 아무개'라는 칭찬만은 듣고 싶었다. 어린 아이 심정이라 할까. 이것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군가 하고 있는 일을 내가 발굴해 멍석을 편 것이 대부분이었다.

뒷골목 아이들

1980년대, 저녁 9시가 되면 라디오, TV에서 음악과 함께 방송이 흘러나왔다.

"청소년 여러분, 귀가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속히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그런데 귀가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없어지고 학생의 두발, 교복은 자율에 맡겨졌다. 까까머리 남학생이 머리를 기르게 되었고, 교복과 모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단발머리 여학생도 교복을 벗어 던지고 패션이 가미된 사복으로 마음껏 맵시를 뽐내게 되었다.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교복을 벗고 머리를 자유롭게 기르게 되었다. 자연히 학교나 교육청의 학생 생활 지도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 많던 중·고생이 일시에 거리에서 사라졌다.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머리를 기르고 사복을 입으니 일반인과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대낮에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다가가서 야단을 쳤다.

"너 어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냐!"

"저는 전경인데요."

"전경이면 다야."

외모로는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머쓱해졌지만 내친 김에 전경이 이런 곳에서 담배 피우면 되느냐고 기세를 돋웠지만,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고등학생은 머리를 길러 어른처럼 보였고, 전경은 머리가 짧아 학생처럼 보였던 것이다. 교복, 두발 자율화가 시행된 80년대 초반의 한 풍경이었다.

그 때, 나는 서울시교육청의 생활지도 장학관이었다. 자율화로 아이들의 비행 탈선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고교 학생들의 시간적·공간적 행동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심야 다방과 심야 극장의 주요 고객이 되었고, 유행처럼 늘어난 독서실은 그들의 탈선을 합리화시켜 주는 피난처가 되었다. 많은 비행 청소년은 독서실에 간다는 이유로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고 유흥업소를 찾았다. 이전에는 학생들이 방과 후에 학교 주변의 만홧가게나 분식점 등에 몰렸으나 이제는 교통 통신의 발달로 소위 '명소'란 지역으로 학생들이 몰리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청소년들이 PC방, 전화방, 노래방에 디스코텍, 호프집까지 진출한 것이 그 때쯤부터다. 청소년 대상 퇴폐업소가 계속 늘어났다. 교외생활 자도 교사들이 급습한 한 호프집은 목불인견이었다. 술 취한 남녀 학생들이 뒤엉켜 담배를 꼰아 물고 있었다. 접시에는 까치 담배가 수북이 쌓여있는데 한 개에 얼마씩 돈을 내고 피운다. 남녀 학생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많았고,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겁 없는 아이들이다. 돈이 떨어지면 무서운 아이로 돌변할 수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시내를 14개 지구로 나누어 각 학교 선생님들을 동원해 밤늦게까지 교외 생활지도를 하도록 하고 이를 지원했다. 교육청 공금으로 생활지도 하는 선생님들에게 추운 겨울에 입을 외투까지 구입해서 지급했다. 밤늦게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을 지도하자니 밤참도 먹어야 했다. 그 때 선생님들은 교내는 물론 교외의 학생 생활지도를 당연한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까지도 지도 대상이라는 책임감과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서울시내 돈암동, 화양동, 남영동, 신사동, 서초동, 천호동, 신림동, 영등포, 방배동 등 아이들이 몰리는 곳에는 예외 없이 청소년 선도 어깨띠를 두른 선생님들이 밤늦게까지 교외 지도를 하고 있었다. 유흥업소에 들어가 업자들과 다투기도 했다. 교외생활 지도 선생님들은 머리를 기르고 교복을 입지 않았지만 중·고교생들을 잘 찾아냈다. 연말에 대대적인 청소년 선도 캠페인이 벌어졌다. 한번은 학생 선도 어깨띠를 두르고 유흥업소를 돌고 있는데 검찰청과 경찰서 소속 선도위원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중에 유흥업소 주인들이 다수 섞여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요지경속이었다.

생활지도를 잘 하려면 우선 학생부장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용인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있는 삼성종합연수원을 연수 장소로 교섭했더니 삼성그룹 사원 연수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중앙일보, 삼성물산, 삼성문화재단, 삼성전자 등의 윗사람들과 접촉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수소문 끝에 이건희 회장의 자제가 K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란 사실을 알고, 그 학교 M교장을 통해 교섭했더니 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우리들에게 장소를 할애해 주었다.

그곳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 커리큘럼을 우리 선생님들에게도 실시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어렵다는 답변이었다. 까닭은 기업체의 사원 연수프로그램을 선생님들에게 실시하면 삼성 이미지에 손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삼성 그룹의 신입 사원들은 호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야외 교육 중 무단 방뇨했다는 이유로 퇴출되기도 하는 등 매우 엄격해 보였다. 우리 선생님들의 적응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소만 빌리기로 했다. 상담 전문가를 초청하여 심성 수련 프로그램으로 연수를 진행했다.

날마다 야단치거나 처벌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학생부장 선생님들로서는 상담 위주의 프로그램이 생리에 안 맞는 것 같아 보였다. 당시의 학교는 회초리로 아이들을 다스렸다. 정학이나 퇴학시키는 방식으로 학내 질서를 잡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생활지도의 기본 방향을 '단속, 금지, 처벌' 위주의 소극적 방식에서 '권장, 참여, 선도' 위주의 적극적 방식으로 바꾸자고 호소했다. 아이들에게 갈 곳과 할 일을 마련해 주지 않고 무조건 '가지 마라',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연수가 끝나는 날, 잔디밭에서 맥주파티를 하면서 청소년 선도를 잘 하자고 다짐했다.

그 후 십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삼성연수원이 달라졌다.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절대 안 된다고 하던 삼성의 사원연수 교육과정이 오픈되었다. 삼성연수원에 장관, 국회의원, 국영기업체 사장 등 우리나라 지도자급 인사들이 속속 들어가서 교육받고 나오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호연지기

1980년대, 서울 시내 여중생 네 명이 함께 투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은 청소년들이 세상을 비관해 충동적으로 집단 자살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담임교사는 "학교에서는 평소 말도 없고 출석도 빠지지 않는 조용한 아이들이었다."고 말했다. 함께 자살할 만큼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숨진 여중생들이 남긴 수첩에는 유명 가수의 생일, 공연일자 등이 적혀 있었고 연예인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고 한다. 네 명 모두 장래 희망이 연예인이었고, 백댄서가 되어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고민해 왔다고 한다. 20층 아파트 옥상에서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한 것이다.

기독교방송에서 '학생 자살'을 주제로 대담 토론이 있었다. 나와 함께 출연자로 참석한 Y대 S교수는 '입시가 가져온 제도적 타살'이라고 목청을 높이며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꼬집어 비판했다. 나는 '아이들을 심약하게 키우는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맞섰다. 건전한 놀이를 통해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어려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자제력을 길러주는 것이 대책이라고 말했다. 모진 비바람을 맞고 눈보라를 이겨낸 화초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온실에서만 자란 화초는 잎만 무성할 뿐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응수했다.

1985년, 서울 시내 S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P군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한 아이가 같은 반 급우로부터 버스 토큰을 빼앗았는데, 이 사실을 담임 선생님이 알고 야단을 쳤다. 야단맞은 아이가 신고한 P학생에게 죽을 줄 알라고 협박해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신문들은 '학교 가기가 무섭다', '교내 폭력, 이대로 좋은가' 등의 제목으로 시리즈를 엮어 보도했다.

생활지도 장학관이었던 나는 전전긍긍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P군의 자살 원인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마, 이따 봐, 네가 선생님께 고자질했지, 죽을 줄 알아." 라고 말했다고 수업 시간에 집에 돌아가 부엌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교육청 기자실에 들려 P군 자살 사건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런 일로 자살을 하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식으로 설명했다.

"오늘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약하게 키우고 있어요. 과잉보호, 온실에서 자란 아이들은 덩치만 크지 작은 일에도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참고 견디며 이겨내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들풀로 키워야 합니다. 모진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키워야 합니다.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그 대책의 하나로 학생 극기수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육감에게 올렸다.

1965년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들이 탄 수학여행 버스가 천안 모산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졌다. 그 이후 서울시 교육청은 수학여행 자체를 폐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여행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물며 극기 수련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아이들을 강인하게 키워야 한다는 취지를 교장 회의 때마다 강조하고 공문을 만들어 학교별로 극기 수련을 시행하도록 권장했으나 학교는 요지부동이었다.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지라는 말이냐는 분위기였다. 중학교 12교, 고등학교 14학교 등 26개교를 극기 수련 시범학교로 선정했다.

'사제동행 국토순례단'도 조직했다. 고등학교 특별활동반을 중심으로 편성했는데, 많은 학교가 참여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동작동 현충원에 모여 국토 순례단 발대식을 갖고 학교별로 목적지를 향해 각자 출발했다. 대중 버스, 기차, 봉고차 등을 이용했다. 곳곳에서 몇 시간은 반드시 걷도록 했다. 첫째 날 숙영지는 여섯 군데, 둘째 날은 두 군데, 그리고 마지막 날은 한 곳에 모두 모이도록 계획을 짰다. 숙영지는 미리 교섭해서 시골의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이용했다. 첫날은 청안(충북), 법주사(충북), 영월(강원), 직지(경북) 등 여섯 군데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사제 간의 대화, 동료 간의 대화, 장기 자랑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둘째 날은 수회(충북), 조령(경북)에서 모였다. 마지막 날은 수안보 한알 유스호스텔에 모였다. 교육감은 물론 서울 시내 모든 교육구청장(교육장)이 참여해 격려해 주었다. 마지막 날 밤, 국토 순례 경험을 학교별로 보고하면서 우의를 다지고 단합을 도모하였다. 국토 순례 기간 중 그림을 그리거나 천렵, 곤충 채집, 식물 채집, 고적 답사, 지질 조사, 글짓기 등의 행사를 하였다. 촛불을 켜고 부모님께 드리는 글을 발표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렸다.

매스컴의 시선이 달라졌다. '학교 가기가 무섭다', '교내 폭력, 이대로 좋은가'의 논조가 '심약한 어린이, 강하게 키워야 한다'로 바뀌면서 국토순례 행진을 크게 보도했다. KBS TV는 국토 순례 상황을 추적해 방영했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 "국토 순례는 호연지기를 기르고 우정과 질서, 봉사를 익히며 향토와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홍보했다. 신판 화랑도라고 자랑했다.

여행가 김찬삼, 작가 김주영과 함께 MBC TV의 '호연지기 국토순례'프로에 출연해 국토순례의 취지를 설명했다. 우정을 나누고, 협동을 생활화하며,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느껴 애향심을 기르고자 했던 이 프로그램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서울 인근의 목장 수십 군데가 학생 극기 수련장으로 바뀌었다. 국토순례는 설악산 지역, 비무장지대 등으로 확산됐다. 지금은 당연히 초·중·고교에서 일년에 한 번은 극기 수련을 한다. 교장으로 재직할 때, 소풍, 수학여행이나 극기, 심성 수련 때는 워크맨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바람 소리,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새 소리, 벌레 소리는 어떠하냐. 낙엽 밟는 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도 좋다. 비 소리도 잘 들어보아라."라고.

교육쿠데타

인천 어느 호프집에서 불이 났다. 수십 명의 중·고교생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안타까웠다. 똑같은 일이 대구에서도 일어났다.

정부가 개방과 자율의 정책을 내걸었다. 학생들에게 두발과 교복을 자유롭게 하도록 했다. 먼저 아이들이 갈 곳을 마련했다. 적십자사 강당, 숭의음악당 그리고 관악고, 서울고, 수도여고, 정의여고, 염광여상 강당을 학생극장으로 지정했다. 시간은 평일 오후 5시,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이후로 정했다. 말하자면 학생극장은 아이들의 놀이마당이었다. 무용, 합창, 체조, 보컬, 방송, 촌극, 그룹사운드 등등 무엇이든 다 좋다고 했다. 매주 두 번씩 공연토록 했는데, 그때마다 현장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을 격려했다.

"괜찮아, 학생 극장에서의 실수는 필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실수할까 봐 겁을 냈고 그래서 주저주저했다. 요란한 춤판을 벌이고 소리를 질러대도 그것을 받아주었다.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고 가라는 뜻이었다.

학생극장을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하여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를 벌이기로 했다. 이튿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이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를 비판하는 사설이 나왔다. 어느 신문은 머리카락 하나만 남은 대머리 교장 선생님이 여학생과 마주보고 디스코를 추는데, 바지가 반쯤 흘러내리고 있는 만화를 실었다. 애당초 사제 디스코는 없었다. 취지 설명에서 생활지도는 사제동행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한 것이 와전된 것인데 부인해도 믿지를 않았다. 결국 사제 디스코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매스컴이 요란하니 자연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문교부, 청와대에 불려가 이를 해명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긍정적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앙일보는 사설을 통해 청소년 지도에 고심하는 서울시 교육청의 고충을 이해한다고 했고, 한국일보 장명수 칼럼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선일보 는 매섭게 때렸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춤은 주로 상체를 움직이는 춤이다. 디스코란 아프리카 중부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는 하체를 격렬하게 흔들어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사제가 함께 이런 디스코 잔치를 벌인다고 하니 기상천외의 발상이다. 이는 교육 쿠데타이다."

사무실 전화가 불이 났다. KBS TV 프로에 출연해서 해명했다. 방송이 나가자 비난과 격려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전에 사는 분은 이런 편지를 보내 왔다. 글씨를 보니 연세가 있는 분 가았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탈선은 귀하와 같은 교육자가 학생을 잘 못 교육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무책임, 유아독선, 학생의 비위나 맞춰 인기나 얻으려는 귀하가 청소년 문제를 가정과 사회가 공동 책임져야 한다며 비겁한 책임 전가를 하고 있으니 당장 물러나십시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주의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 편지는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청소년 문화 창달에 애쓰고 계신 데 대해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부 언론들의 '디스코 여론'에 사기가 위축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주 조선일보에 보도된 잠실 학생극장 '사제 디스코 잔치' 기사를 읽고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부러워했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이제 한 곳에 모여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월 12일 서울 출장을 가서 당일 행사를 보고 우리 학교도 그런 행사를 추진하려고 합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지자 어떤 식품 회사에서는 학생 8천 명이 먹을 음료수와 빵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메리야스 회사와 신발 회사에서는 학생 수 대로 기증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치어걸을 보내주겠다고 하는가 하면 전통 혼례를 하는 결혼식장에서는 그 의식을 식전에 보여 줄 수 없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청소년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교장부터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설명이 '사제 디스코 잔치'로 변모한 것이다. 어쨌든 그 바람에 학생극장은 크게 홍보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지붕 아래 있는 서울시 교육청 감사실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을 백지화하라는 주위의 권고가 있었으나 끝까지 밀어붙였다.

1984년 5월 12일, 마침내 고교생들의 큰 잔치가 벌어졌다. 염광여상, 성암여상의 악대 퍼레이드가 시작을 알렸다. 그들에게 퍼레이드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나는 '전진'으로, 하나는 '환희'라고 불렀다. 은광여고, 경복여상의 그룹사운드, 창덕여고의 리듬체조, 오산고 남녀 학생들의 포크 댄스, 남자고의 태권도 시범과 기계체조 등으로 그 내용이 진행되었다. 청중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흥겨운 음악이 나오면 함께 따라 부르고 일어나 춤을 추웠다. TV 카메라는 무대보다 관중석을 비추기에 바빴다. 외국 TV도 취재 경쟁에 가담했다. 미국의 NBC TV, 일본의 후지 TV 취재진도 보였다.

"학생 여러분, 티 없이 자라고 있는 여러분을 보니 너무 즐겁습니다. 우리나라 장래는 밝습니다. 여러분 힘내세요."

사회를 맡은 나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기 힘들었다. 행사를 마치고 학생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캔이나 휴지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TV, 신문이 이를 크게 보도했다. 개그맨 이성미의 인터뷰가 있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깔깔대고 좋아했다. 어느 여자 교장 선생님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인터뷰에 응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정말 몰랐어요.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학생극장 큰 잔치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반응도 대단히 좋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감사원은 당초 '사제 디스코 잔치'를 문제 삼았으나 문제가 되지 않자 방향을 돌려버렸다. 정독, 남산, 종로, 용산, 마포, 동대문, 영등포, 강서 도서관은 문화영화 상영을 하고 있었는데 상영한 영화를 문제 삼은 것이다. 감사원의 지적은 엄했다.

"청소년 선도에 적극 나서야 할 교육청이 '청소년 입장 불가' 영화를 보여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무사안일의 대표적 사례 아닙니까?" '무협, 활극 영화를 상영하여 요즘 청소년들의 폭력이 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묻기까지 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 '태양은 가득히', '노틀담의 꼽추', '초원의 빛', '화니걸', '모정', '남태평양', '빠삐용', '마이웨이' 같은 영화가 왜 미성년 입장 불가 영화였다. 이해가 가지 않아 항의했다.

"KBS, MBC TV 명화 시간에 방영하고 있는 것인데 왜 문제가 됩니까?",

이에 대해 감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TV 영화는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도서관 시청각실 영화는 특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문제가 됩니다."

무식한 나는 유식한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감사원에 탄원서를 냈다.

"무사안일이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이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아이들을 위해 찾아서 한 일인데 어찌 무사안일이란 말입니까?"

토, 일요일까지 반납하고 아이들을 위해 뛰고 있는 사람을 보고 무사안일이라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나라는 청소년 대책 기구도 많고, 연구 기관도 많다. 하지만 발로 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미나장에서 청소년 문제를 토론하거나 청소년 문제를 논문으로 발표하는 사람은 박수를 받지만 음지에서 묵묵히 청소년 선도에 나서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낀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왜 내가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그렇게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방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으면 그만인 것을. 윗사람이 시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교육청 감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는데, 감사원은 끝내 나에게 '경고, 주의 촉구'라는 징계를 내렸다. 처음에는 사제 디스코 잔치를 친다고 칼을 뺐는데, 한번 뺀 칼을 그냥 집어넣기가 쑥스러웠나 보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복지부동만이 우리의 살길이다."리는 소리 없는 외침을 보았다. 지금은 복지안동伏地眼動 시대다. 눈만은 굴려야 산다.

나부터 시작하기

"현재 우리나라의 교직 풍토를 단적으로 말하면 교사의 냉소주의, 부장 교사의 기회주의, 교감의 적당주의, 교장의 무사안일주의로 표현할 수 있다. 상대를 탓하기에 앞서 각자 자신을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태도가 필요하다. 상대방 탓만 하며 세월을 축내면 결국 교단은 타율에 의해 구조 조정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교단은 이미 그 단계까지 와 있는 듯하다."

1998년 6월, 전교조가 발행하는 잡지『우리교육』은 내가 한 말을 특별히 뽑아 앞에다 실었다.『우리교육』의 김흥옥 기자가 S고등학교 교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특집 '새로운 리더로서의 교장'을 기획하는데, 내가 뉴리더로 선정됐다면서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당시는 전교조가 합법화되기 직전이었고, 교육계가 전교조 문제로 골머리를 썩일 때였다. '전교조 신문'이나 잡지 『우리교육』은 교장에 대한 비판 글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전교조는 교장을 민주화의 적으로 생각하고, 교장은 전교조를 불순 세력으로 치부하고 있는 때였다. 전교조에 대해 날선 비판을 계속해온 나를 '뉴리더'라며 찾아온 것은 예상 밖이어서 놀랍고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나를 뉴 리더로 선정했을까. 현직 교장으로서 정치권에 거침없이 할 말 다하는 교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대신 내가 투고하는 글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인터뷰를 하면 자기들이 싣고 싶은 것만 골라 편집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교육』이 동의하여 써 보낸 글의 제목은 '갈등을 씻기 위해 대화의 창문을 열자'였다. 그런데 『우리교육』 편집부는 이를 '각자 자기부터 시작하기'로 고쳐 잡지에 실었다.

특집은 '학교는 교장 공화국인가?'였다. 편집회의에서 '비록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가는 교장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자'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보통 명사로서의 '교장 선생님'은 대책 없는 갑갑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번 특집이 그 동안 교장은 교사에게, 교사는 교장에게 키워 왔던 불신의 벽에 작은 틈새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선생님, 저는 4․19세대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이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서 전쟁 중에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보릿고개, 초근목피, 입도선매 그리고 장려쌀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가능은 없다'와 '하면 된다'라고 외치면서 '못한다'를 수치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국가이지 민족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은 민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북한보다 잘 살게 된 것도, 미국이 지금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도 민족이 아닌 국가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정권과 국가를 혼동하고 적과 우방을 구별 못하는 이념적 색맹이 된 선생님을 보면 답답합니다. 정권은 유한하나 국가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나라가 과연 이 지구상에 있습니까?

일부 젊은 교사들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법과 제도에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를 내걸고 '진리와 양심'을 들먹입니다. 교장으로부터 질책을 받으면 민주 투사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아집과 독선을 철학과 신념이라고 포장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교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존재도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교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교사가 교장이 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의 교장은 내일의 나의 모습일 뿐입니다.

지금 학교는 교사들의 냉소주의, 부장 교사의 기회주의, 교감의 적당주의, 교장은 무사안일주의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잖아 타율에 의해 변화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교장의 영令을 세워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하되 권위는 살려야 합니다. 교장은 잘못된 여론에 끌려 다니고 인기에 영합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여론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합리한 요구인 줄 알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불성실한 근무 자세에 대해서도 못 본 체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학교가 시끄럽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교장의 지도력은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해서도 안 됩니다. 탄력성과 유연성을 보여 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의연하고 단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을 이기려고 하면 교직 생활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사의 말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선생님들은 전쟁을 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교장의 영이 무너져 버린 그 자리에 교사들의 영이 설 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등을 보고 자랍니다. 학생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선생님이 '하는 대로' 하는 존재입니다.

선생님, 명령의 시대가 가고 참여의 시대가 왔습니다. 학교는 정치논리가 아닌 교육논리로 운영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머리, 가슴, 배, 팔다리가 있듯이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두 머리가 되겠다고 하면 교육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생님, 저는 학교장으로서 '하라'고 명령하기보다 '하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앞에서 끌고 가기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교장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 같이 가야 합니다. 김진성 교장.

내게 많은 전화가 오고 글을 보내왔다. 전교조 교사로부터 온 것이다. 김주철 영주공고 교사는 ' 9월호에 나의 글을 읽은 소감을 올렸다. 전교조가 나를 '뉴리더로서의 교장'으로 선정해 준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지금 교육현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갈등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이 자리 잡고 있다. 교장은 이름 쁀인 식물 교장이 되었고, 전교조는 법외노조가 되었다. 1998년, '대화의 창문을 활짝 열자'고 프러포즈한 것을 한걸음 나아가 '각자 자기부터 시작하자'고 했던 전교조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가다가는 타율에 의해 구조조정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한 나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현대사 전쟁

2007년, 평소 우리나라 교과서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온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서울시의회 내 의원 사무실에서 모여 의논을 했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고교 교과서를 수합하여 면밀히 검토하였다. 도덕, 윤리, 국어, 사회, 한국근현대사, 정치 교과서기 대상이었다. 국정과 검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국사, 국사 중에서도 현대사를 중심으로 집중 분석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과 정통성 및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폄훼하는 내용이 허다했다. 민주주의를 '민중민주주의'적 시설명하면서 합법과 불법, 폭력과 비폭력을 차별화함이 없이 집단행동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공권력을 부정적으로 기술함으로써 대의제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유도하고 있다. 세계를 경탄케 한 비약적인 경제성장 및 이를 가능하게 한 정치적 지도력과 제도적 장치들에 대한 설명은 없이 오로지 '민주화 투쟁사' 차원에서 기술함으로써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국가관을 심어주고 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수백만 명의 아사자와 수십만 명의 탈북자를 발생시킨 경제적 파탄과 원천적인 인권 탄압 및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수령 독재와 전근대적인 권력세습 등 폭정의 실태 및 북한의 6・25전쟁 도발과 대남 무력·폭력 도발행위는 아예 취급을 하지 않거나 긍정적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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