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거운 짐
가시밭길
내 인생은 주경야독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내게는 젊은 시절 대학 생활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은 없다. 그런 꿈은 사치였다. 6형제의 장남으로 소년시절부터 짐을 지고 뚜벅뚜벅 돌 뿌리 가시밭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었다.
나의 경력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양하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출발해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장학사, 장학관이 되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교장을 두루 지냈으니 보통교육을 모두 섭렵한 셈이다. 한 때는 외교관으로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재일교포 민족교육을 총괄하였다. 그때 일본교육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는 명지대학 객원교수로 발령을 받고 출강했다. 그 뒤 나는 교육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서울시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했고, 지금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평생 교육계 안팎에서 현장을 체험하고 관찰했다고 할 것이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못하고 놀던 시절, 교사가 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뭔가 좀 더 큰일을 하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람들과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면서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 뒤, 중등교사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마음은 늘 어딘가 허전하기만 했다.
어느 날 이창갑 교장선생님이 나를 불러 윤리주임 발령을 내면서 말씀했다.
"김 선생, 교직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느끼게 될 거요. 열심히 하세요."
그 격려 말씀에 뭔가 내가 인정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 근무할 때, 학교의 권위주의적 풍토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창갑 교장님에게서는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가 보였다. 그 때, 남들이 동경하는 교직을 박차고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나 자신의 모습을 곰곰이 돌아보게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세상 바꾸는 일은 내가 서 있는 학교부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교직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둔마鈍馬였다.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뭐 잘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열심히 걷기만 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나이를 먹었다.
중국 오패五霸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대부 습붕隰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귀국길에 혹한 속에서 지름길을 찾다가 산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이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관중이 나서 "이런 때는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면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전군이 그 말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을 찾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교육 정책과 학교 현장간의 괴리 속에서 마음고생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가슴앓이는 복지부동을 못해서 생긴 병이었다. 아무리 모진 폭풍우가 불어도 방안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지를 못했다. 비위 맞추고, 맞장구치면 일신이 편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복창을 잘 하고, 받아쓰기를 잘하면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출세(?)하는 세상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쓴 소리로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괘씸죄밖에 돌아올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의 순리를 거역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현실이 침묵하고 있기에는 문제가 심각하기에 나선 것일 뿐이다. 몰라서 침묵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치더라도 뻔히 알면서 침묵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교육자로서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라 생각했다.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어린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의 교육위기는 어디에서 왔는가. 교육을 제대로 모르고 추진하는 정책 당국자도 문제지만 문제점을 뻔히 알면서 장단 맞추고 있는 교육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명심보감은 '경험하지 않으면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시인 라마르티는 '경험은 현명한 사람의 유일한 예언이다.'라고 했다. 나는 정책적 결정을 할 때는 심사숙고한다. 하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면, 망설이지 않고 시작했다. 벽에 부닥칠 때는 좌절하지 않고 분노를 삭이며 관문을 향해 나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학부모의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 정치인의 무지, 정치교사들의 무책임, 학교장의 나약함 그리고 관료들의 편법'이었다. 내가 평생 고민하며 싸운 대상은 이 같은 비정상적인 교육풍토였다.
조지훈이 지은 '빛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울할 때면 되뇌고 있는 시다. 나는 이 시를 좋아했고, 이 시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술 한 잔 하면 노래 대신 이 시를 읊기도 했다. 첫 구절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로 시작하면 마음이 가라앉았고,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하고 읊으면 힘이 났다.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꽃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로 가꾸어 보자"에 들어가면 용기가 솟았다.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는 끝 구절은 젊은 날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둔마도 세월이 지나면 준마가 될 수 있는 걸까.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의 내가 노마의 지혜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과연 길을 제대로 찾아 안내해줄 수 있을까.
트라우마
내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고 나는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6형제만 성장했다.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열아홉 된 막내아들의 장가를 서두르셨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막내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 아버지의 5형제들은 농사일은 아예 모르고 사셨다. 곶감 빼먹듯이 올해는 이 밭뙈기, 내년에는 저 논뙈기를 팔아치우는 식으로 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생전에 그 때의 집안 살림 형편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회상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뭔가 책임감과 의무감 속에서 산 것 같다. 누가 특별히 가르치거나 강요한 적은 없다. 내가 느꼈을 뿐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답지 못하고 늘 집안 걱정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면,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애비는 어렸을 때 고집이 세 혼나기도 많이 했지"라고 하셨다. 밖에서는 대범하면서 집에 돌아오면 좁쌀영감 행세를 했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할 때, 동생을 돌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그래야 어머니가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성화에 동생을 업고 나갔다. 동네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야트막한 사직산이 있었다. 동생을 반은 걸리고 반은 업고 찾아간 곳은 사직산 과수원 옆에 있는 아카시아 숲이었다. 아카시아는 꽃향기가 진하고 서늘해서 그 숲에서 놀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번은 책을 펴들고 한참 골몰히 읽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황한 마음으로 어린 동생을 찾았으나 동생은 보이질 않았다. 울며불며 집으로 달려와서 어머니께 알렸고, 어머니와 나는 정신없이 다시 산으로 올라가 동생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산 너머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리로 내려가는 흙길 한가운데가 소낙비에 깊이 패여 황토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왼쪽 과수원 너머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저수지 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한 어린애가 멀리 보였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된 동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저수지 관리사무소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눈물, 콧물, 빗물이 온통 범벅이 돼 울고 있었다. 그 동생을 안고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울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외출하시며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를 가리키며 내게 당부하셨다. "비가 오면 걷어 놓아라."그런데 책 읽는 재미에 빠져 그만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는 고추가 반쯤 떠내려갔을 때였다. 정말 혼쭐이 났다.
광복이 되자 압록강 수풍발전소에서 보내오는 전기가 끊겨서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책상이 없어 밥상을 펴 놓고 공부했다. 졸다가 머리칼이 지지직거리며 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곤 했다.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생계를 도왔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나는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겨울 밤, 공부하다가 창 밖에서 "메밀묵 사려"하면 어머니 허리춤을 잡아당기곤 했다.
몇 년 전, 미국 국립공원 옐로우스톤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 동생의 초청을 받아 세 가족 내외 여섯 명이 캠핑카에 몸을 싣고 콜로라도 고원지대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두어 시간을 달려도 사람 사는 마을 하나 없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갑자기 도로 가에 우뚝 솟은 표지판을 발견하고 차를 멈췄다. 놀랍게도 그 표지판에는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한반도 중간 허리에 38선이 있고 '잊혀진 전쟁'이란 뜻의 'THE FORGOTTEN WAR' 영어 대문자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38선을 그어 놓고 '1950. 6. 25∼1953. 7. 27'라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와 끝난 날짜도 눈에 들어왔다. 누가 이러한 푯말을 이역만리 미국 땅 이 벌판에 세워 놓았을까. 누구 보라고 세운 푯말인가. 한반도 지도를 알아보는 미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국계 미국 시민을 생각했다면 로스앤젤레스의 잘 알려진 거리를 택했을 텐데, 왜 하필 외딴 벌판인 이곳에 세워 놓았을까. 인적 드문 콜로라도 벌판에 세워진 한국전쟁을 알리는 표지판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궁금증은 꼬리를 이었다. 소리 없는 푯말의 외침에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었다. 한 맺힌 누군가가 푯말을 세웠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 낯선 미국 땅에 와서 6·25 한국전쟁을 잊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숙연해졌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누이동생이 떠올랐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1·4 후퇴 때, 아버지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가시고 어머니는 어린 자식 넷을 데리고 엄동설한에 피란길에 올랐다.
나는 열세 살, 내 아래로 아홉 살, 일곱 살 남동생과 네 살 난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눈 쌓인 산을 넘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 우리는 남쪽을 향해 자꾸만 걸어갔다. 신작로는 피란민 물결로 가득 찼다. 손잡고 가던 동생을 잃고 울며불며 찾아 헤매기도 했다. 누군가 피란 가라고 한 사람도 없었고 누군가 오라고 해서 집을 나선 것도 아니었다. 남쪽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너도나도 집을 떠난 것이다. 해가 저물면 아무 곳이나 빈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냈다. 눈을 뜨면 어머니가 솜을 넣어 누벼 만든 두터운 겉옷을 걸쳐 입고 까만 고무신을 끌고 또다시 걷기를 계속했다. 발은 얼어 부풀어 올랐고 손은 동상으로 터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산군 칠성면 어느 한옥 집에서 네 살짜리 누이동생이 한창 퍼진 돌림병 홍역에 걸려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숨을 거두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대한 추위 날, 서른넷 젊은 엄마와 열세 살 된 나는 양지바른 야산을 찾아 언 땅을 파고 누이동생을 묻었다. 병원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약 한 첩 써보지도 못했다. 물 한 모금 떠 넣어준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는 산토끼 똥이 홍역에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구해오지 못했다. 눈 덮인 산을 헤매며 산토끼가 산신령처럼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빌었건만 허사였다. 그때 산토끼 똥을 구해왔더라면 누이동생은 살았을지도 모른다. 누이동생을 업고 밖에 나가 말을 안 듣는다고 야단을 치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여동생은 오빠에게 아양을 떨거나 어리광 한번 부려보지도 못하고 그만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그 누이동생이 살아 있다면 위로 오빠가 셋, 아래로도 남동생이 셋이니 공주 노릇하며 사랑을 독차지 했으리라.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누이동생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지혜롭고 현명한 분이었다. 약 하나 입에 넣어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했을까. 남아 선호사상이 지배했던 시절, 어머니는 주위로부터 아들 부자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불행한 분이다. 무뚝뚝한 사내아이들이라 어머니를 제대로 도와 드리거나 위로해 드릴 줄도 몰랐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져 십년 이상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하나뿐인 당신 딸자식을 피란길에 잃지 않았다면 그렇게 외롭게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달간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누이동생이 묻힌 곳을 찾아갔다. 그 곳에 지금은 칠성댐이 생겨 삼막골 파란 호수가 넘실대고 있었다. 내 고향 충주에서 승용차로 기껏 한 시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인데,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을 구석구석 돌고 돈 뒤에야 이곳을 찾아 온 것이다. 그것도 반세기, 오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그 옛날엔 그렇게도 멀고도 먼 험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지척이었다. 남쪽에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시커먼 높은 산이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 산을 넘으면 경상도라 했고 피란길에 그 산을 넘기 위해 여기까지 왔었다. 열세 살 적 내가 누이동생을 묻은 그 야산을 찾아갔으나 묻힌 장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해마다 봄이면 뻐꾸기가 찾아오고 가을이면 기러기가 찾아오는 마을 동산인데도.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가고 눈보라치는 겨울이 오기를 오십 해가 더 흘렀건만 그동안 동생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왔어요."
누이동생이 백발이 된 나에게 묻고 있었다.
"누이야, 정말 미안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방황의 계절
충주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있었던 일이다. 1955년 11월 하순,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을씨년스런 초겨울 날씨였다. 2교시가 끝난 후 사친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은 운동장에 전부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풀죽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걸어 나왔다.
"오늘까지 사친회비를 내지 않으면 내일부터 시작되는 학년말 시험을 못 보니 그리 알고, 지금 집에 가서 사친회비를 갖다 내라"는 최후통첩을 받고 우리들은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3학년 학생들은 교육 실습 중이라 학교에 없었고, 우리 2학년과 1학년, 그리고 병설중학교 학생들만 교내에 있었다. 나는 사친회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고 앞장서서 한없이 걸어갔다. 논둑 밭둑을 걸어 찾아간 곳은 교현국민학교 옆의 벼를 베고 난 논바닥이었다. 그 날, 그 곳에서는 민주당 충주지구당 창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켜 민심이 뒤숭숭하던 때에 독재 정권과 싸워야 한다며 신익희 선생을 필두로 많은 분들이 민주당을 창당 중에 있었다. 사복형사들이 길에 쫙 깔려 시민들의 민주당 대회 참석을 공공연히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 외의 민간인들은 그 곳에 별반 없었다. 민주당은 논바닥에 빈 드럼통을 여러 개 세우고 합판을 깔아 임시 연단을 만들어놓고 당 대회를 하고 있었다. 당시 경찰들은 어린 학생들이 설마 그런 곳에 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나는 같이 간 학생들을 연단 바로 앞줄에 정돈시켜 앉혔다.
단상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 유석 조병옥 박사, 운석 장면 박사, 그리고 백남훈 씨, 박순천 의원, 조재천 의원, 이민우 의원, 신정호 의원 등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학생들만 모아놓고 지구당 창당대회를 하는 모양새였다. 서슬 퍼런 경찰들도 그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여러분 오셨다. 박광성 선생님이 나를 설득했다. "진성아,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가자"고 하셨지만, 나는 이를 뿌리치고 그곳을 지키다가 당 대회가 끝나고 나서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이튿날, 우리는 교련 선생님에게 불려가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나는 주동자 취급을 받아 곤혹을 치렀지만 민주당과 학부모의 항의가 있었고, 특히 박광성 선생님의 노력으로 간신히 퇴학은 면할 수 있었다.박선생님은 전국 검도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경찰서 검도 사범으로 봉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얼마 뒤 12월 10일의 세계 인권 선언일을 기념해 충주검찰지청 주최로 열린 인권옹호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우승을 하고 검찰지청장상을 받았다. 학교에서 학생이 몽둥이세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인권 유린이라고 목청을 돋웠다.
나는 "학생회 회장은 학생 대표인데 왜 학교가 임명하느냐"고 항의했다. 학생들이 직선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해 드디어 관철시켰다. 학생회장 선거가 치러졌다. 요새 말로 선거 유세를 한 뒤,전교생이 투표에 참가했는데 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선거 때 청주사범학교와 일 년에 두 번, 봄가을에 친선 구기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공약을 했다. 1956년 봄, 충주사범학교는 축구 배구 농구 정구 탁구팀을 만들어 청주사범학교로 원정을 갔다. 충북선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 안에서 청주사범학교 교지 학생 기자를 만났다. 난생 처음 기자 회견을 하고 나니 어깨가 으쓱하였다. 청주역에 내렸다. 당시 청주역은 북문로 3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청주사범학교는 꽤 먼 거리였다. 걸어서 갔다. 청주사범학교(현 청주교육대학) 정문을 들어서니 악대가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충주사범 선수단 앞에 서서 보무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그 당시는 관제 데모가 많았다. 툭하면 시민과 학생이 한 곳에 모여 궐기대회를 하고 시가행진을 했다. 중학교 때는 휴전 반대 시가행진과 대회가 주일마다 계속되었다. 우리는 항상 동원의 대상이었지 행사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나는 6․25행사 때, 학생 대표로 연단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했다. 내가 강력히 요청해서 관철시킨 것이다. 난생 처음 대중 연설인데다가 나를 바라보는 시민, 학생의 눈빛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북한 만행을 규탄하는 외침 소리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골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사범학교에 몰려들었다. 사범학교는 학비가 크게 들지 않았다. 나는 고교 시절부터 장차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멋져보였다. 식사 한 끼를 거른 적은 있었어도 하루라도 신문 보기를 건너뛰는 일은 없었다. 동아일보 '단상단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이름을 반쯤은 기억하고 있다. 시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활시간에는 시사반 반장으로 '대만은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와 같은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 흉내를 내고, 다그 함마슐드 같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겠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졸업이 가까워오자 고민이 깊어졌다. 대학 진학 공부도 제대로 못했고 교육실습 역시 점수가 바닥이었다. 전체 일등을 하던 성적이 추풍낙엽이 되어 이십 등 밖으로 밀려났다. 첫 발령지는 시내에서 시외버스로 사십 리를 나가 내려서 이십 리를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골 학교였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 무렵 걸핏하면 서울에 올라갔다. 방황을 했다. 서울운동장 건너편 을지로 6가에 있던 경기여객이나 중앙여객터미널에 내렸다. 서울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비바람을 막아줄 방 한 칸만 있어도 대학에 다닐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버스를 타고 왕십리를 지날 때 산꼭대기에 빨래 널어놓은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 곳에 사는 사람이 부러웠다. 당시 내가 받는 월급은 쌀 두가마니 살 수 있는 돈도 안 되었다. 쥐꼬리 월급에서 친구 만나기 위한 다방 커피 값, 우표 값, 버스비 빼고는 어머니께 꼬박꼬박 다 갖다 드렸다. 어머니는 아들 대학 입학금을 마련한다면서 그 어려운 살림 형편에도 계를 들었다. 곗돈을 타서 그 이자로 월부금을 부어준다 해서 맡겼는데 계주가 야반도주하였다. 앞이 캄캄했다. 상경해서 계주를 찾아 헤맸다. 계주는 교육열이 남달리 높았다. 아이를 서울 종로에 있는 모 학교로 전학시켰을 것이라는 내 예측은 적중했다. 그 학교를 찾아가 아이를 발견하고 뒤를 밟아 마침내 보문동에 숨어 살고 있는 계주를 잡았다. 그러나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그러나 내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노력하면 안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독학으로 내 뜻을 펴보리라 결심했다. 정치인이 되려면 지지 기반이 확고해야 한다. 우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책을 읽는다고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누구에게 물어볼 때도 없었다. 마음만 성급했지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분교장을 자원해서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교사가 두 명, 학생 수 이십 명인데 시간을 만들었지만 집 걱정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고민만 깊어갔다. 고향이 나를 버렸다고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다. 고향집을 가려면 달래강을 건너야 했다. 강 건너기 전에 멀리 대림산 너머 월악산 주봉인 영봉이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가까이는 계명산이 다가온다. 그럴 때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도 공휴일이 되면 집이 궁금해서 버스에 몸을 싣곤 했다. 그때 마다 꼭 성공해서 고향 땅에 나타나리라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부엉이 마을
5·16 혁명 후 청주 변두리에 있는 재직 학교에서 밀려났다. 내 나이 스물넷 때의 일이다. 기실 속마음으론 교직에 큰 미련이 없었지만, 당장 호구지책이 문제였다.
나야 무엇을 하던 어떻게 되겠지만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중학교 때 나와 1, 2등을 다투던 한 친구가 서울법대에 들어가더니 고등고시에 합격해 나를 찾아왔을 때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때,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 김병환이가 나를 불렀다. 친구가 근무하는 시골 학교를 찾아갔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에 양산국민학교 분교장이 있었다. 분교장이라고는 하지만 별도의 학교 건물도 없이 동네 이장 댁 사랑방을 빌려 쓰고 있었다. 교사는 친구 병환, 달랑 한 명뿐인데 학생은 1학년과 2학년을 합쳐 11명이 복식수업을 하고 있었다. 환이는 나에게 너나 나나 대학갈 형편이 안 되니 거기서 함께 독학으로 공부해 보자고 말했다.
친구는 일부러 산골 분교를 근무지로 정해 놓고 나를 부른 것이다. 환이의 제의가 반갑고 고마웠다. 나는 그 곳에서 결판을 내리라 마음을 굳게 다잡고 눌러 앉았다. 고향집 걱정은 당분간 잊기로 했다. 친구 아버지가 그곳 세무서에 근무하셨지만 박봉이었고 환이가 받는 교사 봉급도 뻔했다. 우리 집은 6형제지만 그 친구는 8남매나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친구가 나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은 친구 부모님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보낸 3년의 세월은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가선리加仙里에 가곤 한다. 뒤에는 월룡산月龍山이 자라잡고 앞에는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경치가 절경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때의 그 길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영동읍에서 버스를 타면 양산면 면소재지가 종점이 된다. 거기서 다시 가선리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거리. 강물을 따라 걷다보면 강 건너 산마루에 정자가 보이는데, 그곳이 '양산 8경'의 하나인 강선대다. 왼편의 깎아지른 높은 산에는 기암괴석이 금방 떨어질 듯하여 간담이 서늘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손바닥에 담아 목을 축이곤 했다. 이십 리 길을 걸어도 오고가는 차는 한 대도 볼 수 없고, 지나가는 길손도 드물었다. 가선리는 그만큼 깊은 산골 마을이었다. 산골 처녀들은 모두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겐 낯설기만 했다. 남자애들은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물안경을 끼고 물속 깊이 들어가 작살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잡아 온 쏘가리 회 맛은 일미였다. 그물을 쳐서 잡은 물고기로 어죽을 끓여 강가에서 술 한 잔 하면 천하가 다 내 것 같았다. 우리는 가끔 다슬기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송이버섯을 따러 산에 오르기도 했다. 강가에는 늘 빈 나룻배가 누워 있었다. 나룻배 젓는 요령을 익혔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면 산딸기, 산머루, 다래가 지천으로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월룡산에 오르면 저 멀리 산들이 첩첩이 이어지는 사이로 무주구천동에서 흘러오는 금강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가선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남폿불 밑에서 책을 읽었다. 라디오가 있는 집이 동리에선 한 집도 없었다. 얼마 후에 이장 집으로 가선리 자매학교인 서울 대동상고에서 금성라디오를 보내왔다. 밤이면 동네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으려고 이장 댁에 모여들곤 했다. 아마도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놀라운 문명의 혜택이었을 것이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땅을 파서 물길을 내느라고 온 동네가 야단이었다. 방안에 들어앉아 공부만 한다는 것이 참으로 민망했다. 그 때, 갑자기 큰비가 내려 온 동네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친구와 같이 일손이 부족한 논에 나가 난생 처음으로 모를 심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손톱 양 옆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을철이 되면 싸리버섯이나 송이버섯을 딴 동네사람들이 '공부하는 선생님 좀 먹어보라'며 들고 오기도 했다. 내가 머물던 하숙집은 가선분교 후원 회장댁으로 집 주인은 교육열이 높은 이 마을 유지였다. 우리에게 극진히 잘 해주었다. 세 끼 더운밥을 꼭 차려주었고, 계란도 밥상에 자주 올라왔다.
거의 매일 찐 고구마가 나왔는데, 얼마간 지나니 그것에 물려 먹을 수가 없었다. 먹지 않고 그냥 상을 물리자니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주인 몰래 하숙집에서 기르는 개(메리)에게 던져 주었다. 메리는 사랑채에 밥상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내가 거처하는 사랑방 문 옆으로 달려왔다. 문을 열면 영락없이 메리가 와 있었다.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갈 때면 메리가 꼭 따라나섰다. 메리를 데리고 산길과 강변을 싸돌아다니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가끔은 친구와 함께 강가에 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강모래에 발자국을 내며 한참을 걸을 때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산과 강을 향해 노래도 불렀다. 내가 부르는 십팔번 노래는 뻔했다. '바위고개'와 '고향생각'이었다. 바람이 없는 조용한 날이면 멀리서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했다. 그럴 때는 그 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기도 했다. 밤이 되면 부엉이가 하염없이 울었다.
그 해 어느 여름날, 달 밝은 밤에 양산국민학교에 근무하는 여선생님 둘이서 우리를 찾아왔다. 뜻밖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부근에서 자취하는 여선생님인데, 전에 한번 인사한 적이 있다. 젊은 여인들이 인적도 없는 산길 이십 여리를 어떻게 밤중에 걸어왔을까. 반갑고 고마웠다. 전부터 두 여선생님 중에 누구는 환이를 좋아하고, 누구는 나를 좋아한다는 눈치를 채고는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그럴 때인가 싶어 애써 외면했다. 옥수수차를 마시고는 밖으로 나와 달밤을 함께 걸었다. 우스갯소리도 하고 학교생활 이야기도 나눴다. 나는 단테의 신곡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정신적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그 때까지 주워들은 이야기는 고작 그것뿐이었으니까. 사실은 그런 이야기는 분위기 깨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주책이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여선생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그 날 밤, 이십 리 산길을 따라 여선생님들을 바래다주었다. 밝은 달빛 아래서 강물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그 날도 부엉이는 밤새 울었다. 왕복 사십 리 길을 걸어 돌아와 보니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외로워서 찾아 온 여인을 그렇게 보내고 돌아오니 나는 갑자기 두 배로 더 외로워져 있었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여선생님은 따로 있었다. 청주에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부산 어느 초등학교 여선생님이었다. 그녀와는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사진 교환도 없었지만, 여선생님이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것이 내게는 큰 위안이고 기쁨이었다. 3년 가까이 수십 통의 편지가 오고 갔다. 그녀는 가끔 드롭프스 사탕이 담긴 양철통을 산골로 보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혼담이 있어 누구를 한번 만나보란다는 글을 보내왔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산으로 달려갔다. 광복동 뉴욕제과에서 홀로 앉아있는 여인을 처음 대면했다.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던 여인이었던가. 부산이 초행길이었던 나는 그녀와 함께 광안리 해수욕장을 같이 걸었고 동래온천 마을도 둘러보았다. 동백섬을 돌아 해운대 백사장을 함께 걸었다. 한가한 가을 바닷가에 마주 앉아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지나온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조그마한 손으로 모래위에 글씨를 써 보였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기대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너무 인색하십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약속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내가 한 말은 멋 적은 말 한 마디뿐이었다.
"내 뜻이 이뤄질 때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번 꼭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지만 참고 또 참았다. 그 녀에게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해운대 바다에는 갈매기가 날고, 어디선가 구슬픈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홀로 쓸쓸히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직접 만든 도시락을 들고 그녀가 부산역으로 나왔다. 그 무렵 부산역은 바닷가에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는데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 흘러나왔다. 창 밖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그 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시락 위에는 손수건 한 장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꼭 뜻을 이루어 주세요."
눈물이 쏟아졌다. 도시락을 펼쳤는데 목이 메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추풍령을 넘어왔다. 나는 가난뱅이였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경남 군청소재지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큰형부가 세무서장이라고도 했다. 산골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선리 부엉이 마을에서 보낸 그 때의 3년이란 세월은 가늠할 수 없이 긴 시간이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이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주었던 마을 사람들과 하숙집 식구들, 강가에 나갈 때면 내 뒤를 따라오던 메리, 그리고 달밤에 찾아왔던 여선생님, 멀리서 아름다운 글로 위로와 격려를 보내준 문학소녀인 부산 여선생님, 남폿불 아래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 내 인생의 그리운 한 편의 빛바랜 그림이다.
그 후, 대학교 3년 수료의 학력을 인정하는 고등고시 예비시험에 합격해 사법고등고시 응시자격을 얻었다. 곧이어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으나 마지막 2차 시험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 당시는 일 년에 이삼십 명 정도 합격자를 냈다. 무한정 친구 신세를 지면서 기약 없는 책과의 씨름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와 교사 채용시험에 합격해 교직으로 되돌아왔다. 그 후 주경야독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학위도 땄다. 하지만 부엉이 마을 가선리에서 은둔의 수도생활을 하던 그 때가 가장 소중하고 보람 있었던 시기였다. 나의 진짜 학력은 두메산골 부엉이 마을에 있는 '가선대학교'라고 내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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