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약장수

팔순의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을 하신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몇몇이 모여 화투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시더니 언제부턴가 꼬박꼬박 약장수한테 출근해서는 밀가루, 설탕, 화장지 등 생필품을 선물받았다며 수북이 갖다 놓는다.

가끔 우리가 들르면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배급처럼 나누어 주기도 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방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값이 비싼 약탕기, 전기 매트, 사용처도 알 수 없는 기기들이 쌓여 있었다. 보다 못한 동생이 "할머니들을 꼬드겨 물건 파는 사기꾼"이라며 약장수를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그랬더니 엄마는 오히려 약장수를 두둔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매일 공짜로 선물 주는데 가끔 물건을 팔아줘야지"라며 약장수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 약장수들은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에게 유익한 강의, 이를테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잘 쓰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라.' 또는 '할머니들이 죽으면 아무도 벌초하지 않는다. 그러니 깔끔하게 화장하고 가시라.' 등등 할머니들의 당면한 과제를 풀어 주신단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 주고는 돌아갈 때 작은 티슈 한 통이라도 선물이라며 준단다. 그러니 동네 할머니들에게는 그들이 예쁘고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 당뇨 수치가 높아서 며칠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엄마한테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성은 "이모 잘 계시냐?"라며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그때 엄마는 화색이 만면해서 내일 당장 퇴원시켜 달라고 하셨다. 병원 신세 지느라 며칠 출근(?)하지 못한 엄마의 안부를 묻는 약장수 전화였다.

아, 그렇다. 약장수라고, 노인네들을 꾀어서 쌈짓돈이나 뺏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폄훼한 나의 무지렁이.

약장수야말로 엄마에게 아들딸 못지않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한다. 매일 출근할 수 있는 근무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작은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모라며 부둥켜안고 반갑게 맞이해 준다. 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안부 전화까지 하면서 관심을 가져 준다. 엄마는 선물을 받는 기쁨과 당신의 뜻대로 작은 물건을 살 수 있는 즐거움, 또 가끔 찾아오는 자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수 있는 그 몇 가지의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약장수한테 가면 알면서 속고 모르고도 속지만 즐겁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우리는 엄마가 즐거우면 되는 것이었다.

부디 약장수님, 물건은 제대로 된 것 갖다 놓고 우리 엄마 잘 돌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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