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전해오는 그날의 흔적
일선군의 들판에 가을이 깊어갔다. 강가의 모래톱에는 갈대가 물들었다. 겨울이 오면 갈대는 빈 몸으로 사나운 바람을 견뎌야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잠들어 가는 뿌리의 의식을 흔들어 깨우며 안간힘을 쓴다. 봄이 오고 뿌리가 새싹을 밀어올렸음에도 바스락대는 제 한 몸을 함부로 누일 수 없다. 자신이 겪은 바람의 위력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어린싹이 몇 개의 마디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땅을 짚고 꿋꿋이 일어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편히 잠들 수 있는 그것이 갈대의 운명이다. 전장이 되어버린 일선군의 들녘이 갈대의 혹독한 시간을 맞고 있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바람의 심술을 견디며 들판은 핏빛 울음을 울었다. 그 처절한 현장을 내려다 봐야 했던 나무들도 저무는 가을 산을 붙잡고 통곡하듯 붉은 울음을 토해냈다.
구미시 고아읍과 지산동 들녘에는 그날의 흔적이 '어갱이들' '점갱이들' '발갱이들'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갱이들'은 고아읍 관심리 앞의 들판에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왕건이 군사를 주둔시켰다고 하여 '어검(禦劒)평'에서 유래했다. 그때 진을 쳤던 곳을 '장대'(새도방)라 불린다. 송림리 앞들에서 진을 쳤던 신검이 전세가 불리하자 군사를 괴평리로 옮겨 배수진을 쳤다.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점검(占劒)평야', 곧 '점갱이들'이라 전해왔다. 신검은 다시 지산동 앞들과 사기점(신평2동) 뒷들에 진을 쳤으며, 이곳에서 왕건이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시켰다. 신검의 부대를 칼로 물리쳐 발본색원했다 하여 '발검(拔劒)들'이라고 불렀다. 즉 신검의 군대를 궤멸시켰음을 뜻하며 그곳에서 왕건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발검들'은 오늘날 '발갱이들'로 불리고 있다.
936년 가을, 일선군의 들판에서 고려 왕건과 후백제 신검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소리를 신호로 삼군과 후방군을 합친 고려군은 일리천을 건넜다. 후백제의 신검이 있는 중군을 향하여 일제히 돌격했다. 후백제 군사들은 적진에 있는 견훤과 항복한 장군들을 보고 당황했다. 옛 주군을 향하여 칼을 겨누어도 될 것인지, 활시위를 당겨도 될 것인지 판단할 수 없던 군사들은 하나 둘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기가 꺾인 후백제 군인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다. 고려군의 칼날 아래 수많은 후백제 군사들이 무너졌다. 반전을 꾀했던 계획도 무너지고 자중지란(自中之亂)에까지 이르렀던 신검의 부대는 패색이 짙었다.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많은 군사를 잃은 후백제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움으로 별이 되신 어머니
왕건은 신검을 치기 위해 고아의 관심리 앞들에 군사를 배치했다. 어둠은 소리까지도 지배하는 것인지 밤이 오니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병사의 울음소리는 밤의 정적을 깼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왕건이 막사 밖으로 나왔다. 보초병에게 잡혀 온 후백제 병사 하나가 꿇어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고개 숙인 목덜미에 솜털이 뽀송뽀송했다. 그는 후백제 병사들의 눈을 피해 적국인 고려군으로 투항해온 어린 병사였다. 그의 처지가 궁금해진 왕건은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한 나라를 지켜야 할 소임을 맡은 자로서 어찌 자기만 살겠다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버렸느냐?"
왕건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칼끝처럼 예리했다.
"이미 부모를 버렸는데 무엇인들 못 버리겠사옵니까. 제 한 몸 죽는 것은 그리 두려울 것이 없사옵니다. 다만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을 하면 꼭 살아 돌아가야 하옵니다. 자식 여섯을 가슴에 묻고 남편까지 묻었던 분이옵니다. 마지막 남은 소인이 어머니의 전부이옵지요. 허리를 다쳐 꼼짝할 수 없는 분을 빈방에 뉘어 놓았으니 그 뒷일이 한없이 두렵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어서 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소인을 꼭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옵소서."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던지겠다는 굳센 의지가 그에게서 엿보였다. 전쟁터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가 어찌 저 어머니뿐일까. 전장으로만 떠돌던 자신을 기다렸을 어머니의 외로움이 그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왕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은 오순도순 다정도 하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곳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왕건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못난 아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어머니는 별이 되셨을까? 밤마다 남몰래 아들을 훔쳐보고 계셨을 어머니를 왕건은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전쟁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을 깊이 가슴으로 새겼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더는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 병사를 일으켜 세웠다.
◆신검의 고군분투
한편 신검은 어둠을 틈타 군사들을 다시 집결시켰다. 6만이 넘던 군사 중 반 이상을 잃어버린 후백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아침이 되자 신검은 이미 싸울 뜻을 잃어버린 병사를 끌고 고려군을 맞아야 했다. 관심리 들판에서 맞이한 적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자신을 버리고 적과 손잡은 아버지 견훤에 대한 증오심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싸움으로 이끌었다. 반드시 이겨서 아버지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꺼져가는 불빛을 다시 일으키려는 듯 신검은 군사들에게 두려워 말고 싸우라고 고함을 쳤다. 사기 진작을 위한 그의 목소리는 부딪치는 칼날 소리에 묻혀버렸다. 고군분투하던 신검은 가소로운 듯 자신을 노려보는 견훤의 눈길과 마주쳤다.
"고려군의 갑옷이 잘 어울리십니다. 아버지,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신검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는 강한 원망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네 이놈 신검아, 잘 만났다. 네놈이 한 짓을 벌써 잊은 게야? 어찌하여 피를 나눈 동생을 무참히 죽였느냐?"
"금강은 아버지가 죽인 것이옵니다. 적통도 아닌 자에게 권력욕을 키우게 한 결과이옵니다. 아버지를 금산사에 모셔두고 소자의 마음이 편했겠사옵니까? 아버지께 끊임없이 부당함을 간청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직접 치는 기분이 어떠하옵니까? 그토록 애써 키운 나라이온데 근간이 흔들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옵소서."
신검은 오직 금강의 억울한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예리한 판단력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군왕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음이 서글퍼졌다.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전세가 불리해진 후백제의 군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왕건은 관심리 들판을 넘어 후백제군을 쫓아 남으로 내려갔다. 관심들과 괴평들의 경계를 지으며 가로놓여 있는 매봉산이 멀리 보였다. 몇 년 전, 공산 전투의 패배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다친 매 한 마리가 그의 품으로 날아든 적이 있었다. 동병상련을 나누며 치료해 주었고 '능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치료를 끝낸 매가 날아간 곳이 매봉산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매의 소식을 김선궁에게 들었지만, 자신이 부르면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봉산을 향하여 능산의 이름을 크게 불러 보았다. 무심한 빈 하늘에 구름만 흐를 뿐이었다.
'네가 떠나면서 그 이름의 주인인 숭겸을 내게 다시 보내 주었구나.'
왕건은 죽은 줄 알았던 신숭겸이 살아 돌아온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나 또다시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바빠졌다. 이 전쟁을 얼른 끝내고 싶은 그는 능산의 체취가 묻어 있는 매봉산이 운명의 장소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난날, 김선궁과 함께 매봉산의 지형을 미리 익혀두었던 왕건이었다. 운주 싸움에서 견훤의 갑사 부대를 꺾었던 유금필은 여진의 기병을 앞세워 매봉산의 서쪽 낮은 구릉 쪽으로 적을 몰았다. 왕건은 낙동강과 맞닿은 매봉산의 동쪽으로 진입했다. 남쪽을 향하여 활처럼 굽어 있는 매봉산의 양쪽에서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려는 계획이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
신검은 아버지 견훤에게 울분을 토해 냈지만, 속이 편치 않았다. 그는 운명의 날이 머지않음을 느꼈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고려군이 당장에라도 뒷덜미를 잡을 듯 가까이 있었다. 겨우 그들을 피해 송림리 앞들에 와서 숨을 돌리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그늘에 있던 때가 새삼 그리워졌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이 외로움을 어찌 견디며 사셨을까?'
당당하기만 했던 어른이 적군의 왕에게 스스로 고개 숙였던 것을 생각하니 원망의 마음보다 측은지심이 앞섰다. 멀리서 고려군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신검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싸움에 지친 용검과 양검을 불러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제 때가 온 것 같구나. 혹시 이 형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너희들은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해야 하느니라."
"폐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어찌 저희만 살자고 폐하를 버리라 하시옵니까."
"고려왕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야. 꼭 살아남아서 아버지를 보살펴야 할 것이야. 혹 아버지를 뵈옵거든 이 불효자가 용서를 구하더라고 전하여라."
신검은 담담한 마음으로 두 동생에게 연로하신 아버지를 부탁했다. 그는 곧 당도할 유금필의 기병을 피해 매봉산 동쪽에 있는 괴평들로 군사들을 몰아갔다. 왕건이 이끄는 군사들은 매봉산의 동쪽을 넘어 괴평리 강가의 갈대숲에 몸을 숨겼다. 날쌘 유금필이 적을 몰아올 때까지 숨을 죽였다. 하늘이 투영된 강물엔 흰 구름이 흐르고, 물들어 가는 갈대숲 사이에는 운명의 순간으로 향하는 시간이 소리 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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