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산업화로 다시는 볼 수 없는 농촌 풍경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전가(田家) 박지원

늙은이는 남쪽 둑에 참새 쫓고 앉았는데 翁老守雀坐南陂(옹로수작좌남피)

개꼬리 조 이삭엔 노란 참새 조롱조롱 粟拖狗尾黃雀垂(율타구미황작수)

맏이도 그다음도 모두 다 밭에 가고 長男中男皆出田(장남중남개출전)

초가집은 하루 종일 사립이 닫혀 있네 田家盡日晝掩扉(전가진일주엄비)

솔개가 병아리를 채러 왔다 허탕치고 鳶蹴鷄兒攫不得(연축계아확부득)

박꽃 핀 울타리에 놀란 닭들 꼬꼬댁 꼭 群鷄亂啼匏花籬(군계난제포화리)

밥함지 인 젊은 아낙 시내 건널 걱정인데 小婦戴棬疑渡溪(소부대권의도계)

벌거숭이, 누렁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赤子黃犬相追隨(적자황견상추수)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그림처럼 그려낸 조선 후기의 농촌 풍경이다. 환갑을 지난 기성세대가 코흘리개 시절에 최후로 목격했던 고향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근년에 와서 기겁할 속도로 전개된 산업화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우선 요즈음 시골에는 장대를 들고 참새 쫓는 늙은이가 아예 없다. 누렇게 드리워진 조 이삭에 참새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다. 조 이삭마다 비닐봉지를 아주 완벽하게 덮어씌워서 참새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옛날 가을철 들판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수확기를 맞아 온 동네 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 들판에서는 농부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트랙터 두어 대가 온 들판을 도맡아서 수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립문이 종일토록 닫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혀 딴판이다. 옛날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들판에 나갔지만, 요즈음은 문 열기도 힘에 부치는 홀몸노인들만 살고 있으니까.

아니, 뭐라고? 노는 병아리를 채어가려고 솔개가 마당으로 내려온다고? 물론 옛날에는 그런 일이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노는 병아리가 없어서 솔개가 내려올 일도 없고, 제2급 멸종위기 동물이 되어 내려올 솔개도 없어졌으니까. 박꽃이 하얗게 핀 울타리 밑에서 꼬꼬댁거릴 닭들도 없다. 그들은 이제 진드기가 득실대는 양계장 닭장 속의 계란 낳는 기계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니까. 음식물이 담긴 함지박을 이고 들판으로 나가던 아낙네들도 다 사라졌다. 중국집 오토바이가 철가방에다 짜장면과 탕수육을 담고 들판을 가로질러 우당탕 배달을 하고 있으니까. 킬 힐에다 새빨간 핫팬츠를 입은 아가씨가 스쿠터를 타고 다방 커피를 나르기도 하고. 몇 년째 출생신고가 전혀 없는 마을이 수두룩한데, 누렁이와 뛰어놀 벌거숭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 높푸르구나(정지용, '고향'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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