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일호의 에세이 산책] 고향 가는 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 효와 조상숭배를 으뜸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해마다 추석, 설 명절에는 고향 가는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1950, 60년대 가난한 그때도 고향 가는 길은 하나의 의무이자 즐거움이었다.

그때는 토, 일요일도 없이 자는 시간 외에는 열심히 일했다. 직장인들의 며칠 휴가는 추석, 설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추석, 설에만 새 옷을 얻어 입었기 때문에 손꼽아 기다렸다. 어른들은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이발도 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헌 옷도 사 입고, 어설픈 넥타이도 매고 머리에 포마드 기름도 번들번들하게 바르고 멋을 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모르겠다. 5, 6명이나 되는 자식들 먹는 것이 걱정이었기 때문에 어린 딸 가진 부모는 식모살이라도 보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이 식모살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월급은 고사하고 밥만 먹여주고, 명절 때 옷이나 한 벌 얻어 입고, 차비나 얻어 명절에 고향 다녀오는 것이 최고의 보람으로 생각했다.

남자는 취직자리가 좋고 나쁘고가 문제가 아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어쩌다 취직을 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같이 일을 해야만 했다. 봄이 오면 보릿고개가 다가오고, 좁은 농토에 희망이 없는 농사일은 죽어도 못하겠고, 예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으나 갈 곳 없는 처녀는 유흥가에 팔려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때는 기차나 버스 예매가 없었기 때문에 표를 사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야 했다. 고향 가는 완행열차는 문자 그대로 콩나물시루였다. 창문으로 뛰어들고, 물건 올리는 선반에 사람이 올라타고, 상이군인들의 물품 강매와 혼잡을 틈탄 소매치기들의 공포에 지쳐 졸음이 오지만 그래도 고향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다.

몸 돌릴 틈조차 없이 혼잡한 열차 안에서도 잘못하여 깨어지지나 않을까 내 몸보다 더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됫병으로 된 '월계관' 정종이었다. 뒤에 '백화수복' 정종이 나왔지만 당시 '월계관' 정종이야말로 조상 모시고,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최고의 술이었다.

고향 가는 길은 열차에서 내려 또 8㎞를 걸어가야 했다. 어쩌다 소달구지라도 얻어 타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집 앞까지 다 왔을 때 마중 나온 조카가 좋아서 술병을 받아들고 뛰다가 넘어져 대문 앞에서 박살 내고 말았다. 순간 나는 술이 아깝기보다 부모님을 무엇으로 대접해야 하나가 더 걱정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지금같이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길에 자가용 몰고 고향 갈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잘살게 됐다. 이제 민족 대이동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할아버지 세대가 끝나면 손자 세대들은 고향 갈 일이 없어질 것이다. 왜? 아파트가 고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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