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 발검들, 1천 년의 전설] <10'끝>붉게 물든 저녁노을 또 다른 내일의 약속

왕건 앞에 무릎 꿇은 신검…일선군 들녘서 후삼국 통일 완성

구미정에서 바라본 구미시내 전경. 구미시는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북의 중심도시이다. 내륙 최대의 첨단산업단지를 기반으로 세계와 호흡을 같이해 나가는 세계 속의 명품도시로 인구 50만 시대를 목표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그린시티 평가 전국 1위, 전국 복지정책평가 11년 연속 우수기관 선정, 한국 지방자치 경쟁력 평가 전국 종합 1위 등 대내외 평가에서 우리나라를 선도하는 도시로 공인받고 있다.
구미정에서 바라본 구미시내 전경. 구미시는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를 선도하는 경북의 중심도시이다. 내륙 최대의 첨단산업단지를 기반으로 세계와 호흡을 같이해 나가는 세계 속의 명품도시로 인구 50만 시대를 목표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그린시티 평가 전국 1위, 전국 복지정책평가 11년 연속 우수기관 선정, 한국 지방자치 경쟁력 평가 전국 종합 1위 등 대내외 평가에서 우리나라를 선도하는 도시로 공인받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어진.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인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해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 어진.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인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해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역사는 복잡한 길 위에 걸린 도로 표지판

분립과 대립으로 반세기를 끌어왔던 후삼국의 시대는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짓밟고 간 들녘의 걸음걸음에 고인 피는 바람이 되어 수시로 불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 짓밟힌 것이 들판뿐이랴. 자신과 무관한 인간들의 전쟁에 방심한 탓이었을까? 무거운 등짐을 지고 길을 떠나던 달팽이 한 마리가 어느 병사의 발아래 처참히 으스러졌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길 위로 무작정 들어선 그것이 달팽이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그날의 흔적을 이름으로 간직한 일선군의 들녘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떠돌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역사는 복잡한 길 위에 걸린 도로 표지판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때로는 경고의 몸짓으로, 더러는 규제를 하기도 하고 달팽이처럼 무지한 길 위에 선 이들에게는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기도 한다. 다만, 바람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법. 매봉산 동쪽에서 신검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던 왕건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 길은 역사가 되어 바람처럼 속삭였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바람의 경고 앞에 왕건은 숙연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 부대를 피해 괴평들로 향했다. 왕건은 잠시 숨을 고르며 기회를 노렸다. 적이 코앞에 당도하자 공격을 단행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왕건을 만난 후백제 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때야 신검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병사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던 신검은 군사들을 향하여 눈짓을 보냈다.

후백제의 군사들은 하나 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무리 속에는 용검과 양검도 있었다. 신검의 무겁던 마음은 체념으로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수선한 틈을 타 말을 달렸다. 도망이라기보다는 훨훨 날아서 세상 끝까지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의 마지막 전쟁인 일리천 전투는 신검이 마침표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지산들을 지나 사기점 뒤뜰에서 사로잡혔으니 길고도 지루한 전쟁은 끝을 맺었다.

◆민족 재통일의 대업을 이룬 왕건

935년 왕건은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하고 민족 재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일선군의 넓은 벌판에서 후백제의 왕인 신검은 두 아우와 함께 왕건에게 항복의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견훤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후백제를 다스려왔다. 그 나라가 망하는 순간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패망에 일조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의 눈물일까? 패배자가 되어 꿇어앉아 있는 자식들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분노를 삭이지 못한 증오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뒷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왕으로서의 능력이나 통솔력은 왕건을 능가했지만, 통일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까닭은 후계자 문제로 인한 내분과 신라의 경애왕을 죽게 한 사건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왕건은 신라를 존중하였으며 신라 백성들과 호족의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로 왕실의 항복을 지혜롭게 끌어냈다. 견훤의 불 같은 성정보다 물처럼 부드러운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왕건은 승전의 기쁜 소식을 안고 신숭겸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용하다는 의원을 수소문해 치료하게 했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걱정이었다. 막사에 누워있는 숭겸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왕건의 모습을 보자 초점 잃은 눈망울에 생기가 서렸다. 그토록 열망했던 대업을 이룬 왕건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질긴 목숨을 놓지 못한 것은 오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였나 보옵니다."

"이 사람 숭겸이, 어서 털고 일어나게나. 궁금한 이야기는 그때 들음세."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숭겸이 걱정스러웠던 왕건은 그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 숭겸을 돌보던 의원이 왕건에게 말을 걸어왔다.

"폐하. 냉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있사옵지요?"

"아니 그것을 자네가 어떻게 …."

"신숭겸 장군이 폐하를 못 뵙고 떠날 것을 염려하여 소인에게 부탁했사옵니다."

"그래, 사람 참, 천천히 이야기해도 될 것을 뭐가 그리 급하다고…."

왕건은 그 옛날 자신의 발바닥 점을 두고 능청스럽게 농담하던 그때의 신숭겸으로 돌아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한마디 말조차 떼기가 힘든 숭겸을 뉘어 놓고 왕건은 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신숭겸을 보내고

왕을 피신시키기 위해 어마(御馬)로 적을 유인하려 했던 숭겸은 김락 장군에게 말을 빼앗기다시피 넘겨주어야 했다. 숭겸은 왕건을 찾아서 동분서주했다. 폐하를 꼭 지켜야 한다는 김락 장군의 부탁이 아니어도 마땅히 그래야 했다. 적의 눈을 피해 겨우 왕건을 찾았는가 싶었는데 그 순간 후백제군의 칼날이 숭겸의 팔 하나를 거두어 갔다.

어느 민가에서 상처를 동여맨 그는 왕건을 찾아 무작정 헤매다가 도리사에 이르렀다. 의식을 차려보니 사흘 밤낮이 흘러 있었다. 도리사 주지의 정성스러운 간호에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건과 김락 장군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는 깊은 시름에 젖었다. 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자신이 기거하는 도리사로 왕건이 나타났다. 그 많던 군사를 모두 잃어버리고 혈혈단신이던 왕건의 등장은 숭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왕의 축 처진 어깨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 그때 도리사의 피리 소리가 숭겸이 자네가 맞았구나."

왕건은 안타까운 듯 숭겸의 떨어져 나간 쪽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의원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데 제 한 몸 주체할 수조차 없던 숭겸으로서는 쉽게 왕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다만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던 어느 날, 냉산 정상에서 화살 맞은 호랑이 한 마리가 왕건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급한 마음에 돌덩이 하나를 주워 맹수를 향하여 힘껏 던졌다. 거꾸러진 호랑이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숭겸은 공산 전투에서 왕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팔을 하나 내주었을 때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왕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생을 그를 위해 살 것을 다짐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또 숭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살아 있기를 그토록 바랐던 김락 장군이 시신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그때 장군을 말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김락의 목 없는 시신을 자신으로 알고 슬퍼하던 왕건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자신의 옛 이름인 '능산'을 매에게 붙여주며 외로움을 나누는 왕건의 모습을 보며 그의 앞에 나서고 싶은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얼마나 허망했으면 말 못 하는 어린 새에게서 위로를 받고자 했을까.

매봉산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창마을에 터를 잡은 숭겸은 매를 통하여 왕건과 간접적으로라도 교감하고 싶은 마음에 능산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냉산에 산성을 쌓고 낙산리에 창고를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다가올 기회를 기다렸다.

힘겹게 버티고 있던 숭겸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찬바람을 쐬고 싶다는 그를 위해 막사의 장막을 걷었다. 날은 저물어가고 서쪽 하늘에 낀 검은 구름에 가린 석양이 간간이 그 빛을 드러냈다.

"폐하, 태양이 걸어온 하루는 저녁노을을 보고 점칠 수 있지요. 붉게 빛나는 저녁노을은 내일을 향한 약속이옵니다. 저 하늘에 어둡게 드리워진 구름은 오늘 제가 다 걷어갈 것이옵니다. 폐하의 하늘은 이제 언제까지나 찬란한 빛을 담아내게 될 것이옵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숭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왕건을 향한 충심으로 절절했다.

"하늘에 태양이 존재하는 한 저는 영원한 폐하의 시곗바늘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옵소서. 태양이 비추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제가 있을 것이…."

숭겸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영혼이 어느새 하늘에 닿은 것일까? 불현듯 구름이 걷히더니 석양의 붉은 기운이 서쪽 하늘을 신비롭게 물들였다. 마치 또 다른 내일을 위한 축복의 언어인 듯.

◆진흙 속에서 향기를 길어 올리는 구미의 들녘

일선군은 후삼국 최후의 격전지였다. 왕건은 일리천 전투로 인해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고려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대업의 꿈을 이룬 왕건은 숙연한 마음으로 어둠이 내리는 들판을 둘러보았다. 가까이는 신숭겸과 김락 장군을 비롯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불려 나왔던 수많은 병사의 희생이 있었다. 피폐한 백성들의 한숨으로 얻은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기로 한 어린 병사와의 약속을 먼저 실행한 왕건은 전쟁포로 수천 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교훈삼아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34대에 걸친 475년간(918~1392) 지속한 고려의 역사는 일선군의 들녘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천 년 전에도 불었을 바람이 들녘을 훑고 지나간다. 아픔을 딛고 일어선 땅은 많은 생명을 보듬었으며 기름진 들을 이루었다. 적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등장시켰던 소리꾼의 노랫가락은 끊어지고 풍년을 기원하는 농요는 지산동 발갱이들소리 보존회원들의 입에서 세상을 향하여 퍼져 나간다. 샛강에는 물이 흐르고 연꽃이 자란다. 진흙 속에서 향기를 길어 올리는 구미의 들녘으로 들어서 보자. 천 년 전에 불었던 바람이 다시 돌아와, 바람처럼 살다 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지도 모른다. 발검들 그 천 년의 전설을.

◆연재를 마치며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역사를 풀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유적을 찾아 나섰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드러난 진실의 뼈대 위에 상상의 옷을 입혔다. 45년간에 걸쳐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전쟁의 역사였다. 그 중심에서 처참하게 유린당했던 구미의 들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 오늘날 풍요의 땅으로 거듭났다. 그날의 진실을 인식하여 새롭게 바라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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