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획 페테르부르그를 가다] 1.러시아혁명 전야

1876년 "짜르 타도" 최초 대중시위…이후 매년 수천명 시베리아 추방

1881년 3월1일 알렉산더 2세가 젊은 혁명가들로부터 폭탄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은 장소에 짜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1881년 3월1일 알렉산더 2세가 젊은 혁명가들로부터 폭탄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은 장소에 짜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피흘린 구세주 교회'.
넵스키 거리의 페테르부르크 시민들
넵스키 거리의 페테르부르크 시민들
데카브리스트의 봉기가 일어났던 상원광장
데카브리스트의 봉기가 일어났던 상원광장
하영식 국제분쟁 전문기자
하영식 국제분쟁 전문기자

▷편집자 주(註)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매일신문은 '혁명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가다'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1917년의 10월 혁명은 수백 년간 통치해온 절대적인 절대군주 체제였던 차르 체제를 몰락시켰고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표방하는 소비에트제국을 탄생시킨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70년이 지나면서 소비에트제국은 붕괴됐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번 연재는 혁명의 장소를 따라 이동하면서 당시에 일어났던 상황과 함께 혁명가들과 민중들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더불어 당시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민중들이 원했던 미래의 러시아상은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봄으로써 격변하는 한국의 현재 상황을 비추어 본다.

필자 하영식 씨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2003년 아시아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쿠르드 게릴라 기지를 방문해 취재했으며, 세계 각지의 분쟁 문제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굿바이 바그다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 '남미인권기행'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 'IS, 분쟁 전문기자 하영식 IS를 말하다' '난민-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행자' '난민-희망을 향한 끝없는 행진' 등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 교수인 파벨이 나를 옆에 태우고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운전하면서 관광 안내원 흉내를 냈다. "지금 우린 마르크스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길이 끝나면 곧바로 엥겔스가로 이어지겠습니다." 이에 나는 "그럼 엥겔스가가 끝나면 레닌가가 나오겠네요?" 하는 농담을 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지하철역도 "프롤레타리아역, 레닌역, 볼셰비키역…" 등의 이름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동상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공산주의 시대와 관계된 광장과 거리의 이름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된 지 거의 30년이 지났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문화적으로는 공산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를 가면 여전히 차르(러시아 황제)가 지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압제자였던 차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차르 시대 때 지어진 교회들이나 궁전들을 모두 헐어낸다면 공산주의 시대 때 지어진 볼품없는 단출한 건물들만 남게 될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 역사는 100년 전에 일어났던 러시아혁명(1917년)이 지배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져 대립하던 시대였다. 무엇보다도 일제에 대항해 싸웠던 조선의 독립운동가 중 95%가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인 넵스키대로 양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화려한 의상들과 구두들, 화장품들이 전시된 상점들과 식당, 극장, 미술관, 거대한 은행들, 박물관들이 집중돼 있다. 이곳은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라 할 정도로 국제적이며 다양한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출근길에 바삐 서두르는 사람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으면서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감상하는 사람들, 길거리의 한구석에 앉아 손을 벌리는 거지들도 눈에 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양쪽 머리를 땋은 위에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정장 차림을 한 유대인들도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유학생들, 시베리아에서 이주해 온 몽골계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검은 법복에 큰 십자가를 목에 두르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러시아정교회 신부는 길거리에 서서 스카프를 머리에 쓴 러시아 여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모델로 해서 반쪽짜리로 지었다는 카잔성당을 등지고 운하를 따라 눈을 들면 맞은편에 화려한 형형색색의 양파 모양의 웅장한 돔들이 우뚝 솟은 그림 같은 교회가 보인다. 추운 겨울날, 교회가 눈에라도 덮이게 되면 영락없이 동화 속 그림이다. 하지만 이 교회는 '피흘린 구세주 교회'라는 이름처럼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881년 3월 1일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젊은 혁명가들로부터 폭탄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은 장소에 차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

페테르부르크만큼 화려함의 극치와 더불어 혁명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야누스 같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넵스키 프로스펙트 대로와 그곳에 늘어선 화려한 건물들을 적셨던 피만 해도 큰 호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왜 페테르부르크가 혁명의 중심지가 됐을까?" 혼자서 질문을 던져본다. 유럽으로 지향하겠다는 의지와 유럽으로부터 방어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세워진 도시였기에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러시아혁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혁명의 어머니인 프랑스대혁명(1789년)이 근원이 되고 프랑스대혁명을 전파시킨 나폴레옹도 등장한다. 1812년, 나폴레옹은 10만의 병사를 동원해 모스크바를 침공한다. 그러나 10만의 병사는 추위와 허기에 대부분 죽어나갔고 3천 명만 살아남아 프랑스로 퇴각하게 된다. 이에 러시아 군대는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해 1814년에는 파리에까지 점령군으로서 입성했고 그곳에서 반년을 주둔하기도 했다. 당시 생존해 있던 프랑스대혁명의 주역들에게서 혁명을 전수받았던 귀족 출신의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러시아를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고 귀국한다.

차르 니콜라스 1세가 권좌에 오르던 날인 1825년의 12월 14일, 3천 명의 병사들이 차르 체제에 대항해 봉기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지도자 중 다섯 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120명이 시베리아로 추방된다. 이를 '데카브리스트혁명'이라 한다.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로 차르 체제 변화, 농노해방과 토지 분배를 혁명의 과제로 삼았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제기했던 세 가지 과제는 이후 100년 동안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투쟁했던 이슈들이기도 했다.

1870년대에 들어오면서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대중운동으로 전환된다. 지식인들만의 독서모임에서 벗어나 민중들과의 결합을 시도한 나로드니키 운동(민중 속으로 운동)이 확산됐다. 많은 학생이 혁명적인 선동을 위해 농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결국에는 1876년 12월 6일 카잔성당 앞에서 대중적인 시위로 드러난다. '토지와 해방' 그룹이 조직한 당시의 시위는 러시아 최초의 대중시위였다. 수백 명의 학생과 노동자농민들 앞에서 '플레하노프'는 열정적으로 농노해방과 토지 분배, 이를 위한 차르 체제의 타도를 주장했다. 당시 카잔성당을 지나던 시민들은 젊은이들이 모두 술에 취해 고함을 지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시위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곧 경찰들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됐고, 20대 초반의 젊은이 31명이 체포됐다. 체포된 5명은 10년에서 15년의 '카토르가'형(시베리아에서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고 10명은 시베리아로 추방됐으며, 다른 3명은 수도원에서의 5년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플레하노프는 현장을 탈출했지만 결국에는 유럽으로 망명해야 했다. 훗날 그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쳤다.

알렉산더 2세는 농노제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1861년)했지만 토지 분배 없는 농노해방은 현실적으로 농민들의 삶을 더 피폐화시켰다. 반면에 토지 분배를 주장하는 혁명가들에 대해 정부는 강경 탄압으로만 일관했다. 이에 혁명가들은 차르의 암살을 목표로 하는 테러활동을 주요 전술로 채택하게 된다. 다수의 혁명가는 테러를 선호하던 '인민의 의지' 그룹으로 갔고 소수는 테러를 반대하던 플레하노프 그룹으로 갈라졌다. 당시 두 그룹의 분리는 러시아혁명운동의 미래를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1881년 3월 1일, 인민의 의지 그룹에 의한 폭탄테러에 의해 차르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차르의 암살은 당시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까지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혁명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차르 체제는 붕괴는커녕 이전보다 더 완고하게 변해 갔다. 더구나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더 3세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혁명가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당시 차르의 암살을 주도했던 다섯 명의 혁명가 중에는 최상류층의 귀족 출신인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딸이자 크레미아 총독의 손녀인 '소피아 페로브스카야'라는 이름이 들어 있어 귀족 사회는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체포돼 구속됐다 풀려나온 전력이 있으나 이 사건으로 교수형을 피해가지 못했다.

또한 1887년에는 레닌의 형이자 페테르부르크대학의 학생이던 알렉산더 울리아노프가 알렉산더 3세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형이 교수형에 처해지던 바로 그날, 레닌은 대학 입학시험장에서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앞날은 형의 죽음으로 인해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70년대부터 매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돼 갔지만 혁명운동의 바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러시아에서는 차르 체제의 균열이 드러나면서 혁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 혁명 원인은 잔인한 농노제도

17세기 중엽, 러시아 정부는 농민들의 이동을 금지시키고 이를 범죄행위로 간주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지주는 농노들 중 누구라도 강제로 군대에 보낼 수 있었다. 당시 군의 복무 기간은 25년으로 누구도 군대에 가는 건 원치 않았다. 지주들은 위의 권한을 이용해 농노들의 삶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러시아의 전체인구 6천만 명 중 5천만 명이 농노들이었다. 반은 국가에 속했고 나머지 반은 개인에 속한 농노들이었다. 당시 지주 계급의 숫자는 십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백 명의 농노를 거느렸고 광활한 농토를 소유하면서 살았다. 농노들은 지주에 속한 소유물로 취급당했고 자식들까지도 지주에 속했다. 당연히 지주는 농노나 농노의 자식들을 다른 곳으로 팔아넘길 수도 있었고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야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노예로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야 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농노제도를 러시아혁명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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