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이주민, 어찌 차별하랴

'우리 어머니, 한국 어머니, 모두 같은 엄마입니다.'

지난 2월 10일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의 불난 집에서 90세 할머니를 구하고는 병원으로 옮겨진 스리랑카 출신 근로자 니말(38) 씨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고 정부는 그를 의상자로 인정했다. LG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의인상을 주었다.

그의 의로운 행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는 불법체류자였다. 하루하루 불안하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였다. 단속되면 480만원이라는 벌금도 내야 할 판이었다. 고향으로 쫓겨나면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그의 의로움에 마음을 열었고 그의 여러 고민도 풀렸다.

하지만 숱한 이주민에게 한국은 여전히 힘들다. 온갖 차별 탓이다. 지난주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가 공개한 '대구지역 이주민 차별 실태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일터, 관공서, 공공장소 등 사람 있는 곳이면 무차별적인 차별이 있었다. 차별의 꼴도 가관이다. 욕설, 반말도 모자라 임금 차별에다 아예 이름 대신 다른 단어로 불렀다. 출신국 낮추기와 수군거림도 서슴지 않았다. 대구 사람이 이주민을 대하는 민낯이다.

이럴 일은 아니다. 한반도는 일찍부터 이주민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인도 공주 허황옥이 가야로 왔다는 이야기는 두고라도 뭍과 바다로부터 삶터를 찾아 이주민이 몰렸고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학계의 귀화(歸化) 성씨(姓氏) 연구가 증거다. 신라 때 40여 개, 고려 60여 개, 조선 30여 개 성씨가 귀화했다. 1985년 기준으로 전체 257개 성씨의 136개가 그랬다. 전체의 53%다. 즉 태어난 곳을 떠나 이 땅에서 새 삶의 뿌리를 내린 이주민이 아주 많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는 또 다른 이주 아픔도 품은 민족이다. 35년의 일제강점기 때 2천만 중 500만 명이 강제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나라 밖으로 내몰렸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났다. 나라 없는 탓에 학살, 강제노동 등 탄압과 차별, 멸시의 세월을 보냈다. 광복에도 절반은 돌아올 수 없었다. 일제가 자국민 아닌 한국인의 귀환은 철저히 외면해서다. 250만 명이 그렇게 불귀(不歸)의 이주민이 됐다.

대구에는 자랑스러운 이주민이 여럿 있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대구에 뿌리를 내린 김충선과 두사충 같은 충신도 있다. 이주민에 대한 못된 차별은 안 된다. 지금도 3만 명 가까운 여러 나라의 이주민들이 대구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다. 그들 역시 대구의 소중한 구성원임을 배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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