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한의대학교 코어사업단은 수성구립 용학도서관과 손을 잡고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인물로 본 대구경북지역 항일독립운동'이란 주제로 시민과 함께하는 인문학교실을 열었다. 코어사업단은 대학교수로 강사진을 꾸려 주제별 10차례 특강과 4차례 현장답사를 진행해 잊혀가는 독립운동 정신을 새로 조명했다. 이번 인문학교실은 김병우 대구한의대 교수가 강좌를 기획했다. 역사에 관심 있는 어르신을 중심으로 인문학교실 특강, 답사에 600여 명이 몰려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조명된 인물로는 '빼앗긴 들에서 식민지 현실을 고뇌한 이상화' '투쟁적 문학과 문학적 투쟁사 이육사'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정칠성' '3대 독립운동가 김일식' '13도 연합의병부대 군사장 허위' 등 총 11명이 소개됐다. 김병우 교수는 지난 13일 용학도서관 시청각실에서 '대구경북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과 남자현'을 주제로 마지막 특강을 했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 펼친 김락
경북도가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제작한 창작오페라 '김락'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을 주인공으로 서울과 안동에서 초연했으며 작년 영호남 문화교류로 공연되기도 했다. 2019년엔 세계적 공연예술의 허브인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공연 계획도 세우고 있다.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에서 태어난 김락은 친정과 시댁을 포함해 3대에 걸쳐 2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문가문 출신이다. 김락은 예안면에서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됐다. 조사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두 눈을 잃었다. 아버지는 도사를 지낸 김진린으로 학문과 경제력을 가진 의성 김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 교수는 "대구경북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며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역경을 이겨낸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고 했다.
김락은 18세 때 명문가 진성 이씨 이중업에게 시집간 후 6년 만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퇴계 후손인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나라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 단식에 들어가 24일만에 송백 같은 선비정신으로 순국했다. 향산은 "나는 내 명으로 죽을 것이다. 나를 속히 죽이고자 한다면 총 쏘아 죽여라"며 강제로 죽을 먹이려는 순사들을 호통쳤다고 한다. 향산의 순국 충격에 김락의 큰 오빠 김대락은 자정적 삶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고 언니 김우락은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의 부인으로 만주 항일투사의 버팀목이 되었다. 1919년 남편 이중업은 서울에서 '파리장서' 사건 주모자로 체포됐고 이듬해 만주로 출국하려다가 병사했다. 아들 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다.
김 교수는 "김락은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아내의 길, 어머니의 길을 지키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직접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한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주체적인 삶이었다"고 했다. 이후 김락은 계속 항일투쟁을 벌이다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 교수는 "독립운동이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적이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사회적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 종래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은 대구경북의 큰 정신이다"고 했다.
◆일제를 저격한 여협 남자현
영화 '암살' 주인공으로 새롭게 부각된 독립투사가 있다. 그가 바로 일제를 저격한 여협 남자현이다. 일본은 1933년 하얼빈에서 만주국을 세운 1주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신부복을 입은 주인공이 권총이 숨겨진 신부 부케를 들고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을 암살하는 멋진 액션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 역사에는 조선인 밀정에 의해 탄로나 암살은 실패했고 남자현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는 옥중에서 9일간 단식으로 저항하다 인사불성으로 풀려났지만 곧바로 세상을 떴다. 남자현은 1919년 창덕궁에서 순종을 조문하러 오는 일본 사이토 총통 암살계획에도 참여했지만 실패했다.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은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의혈단 활동을 했다. 김 교수는 "남자현은 단순한 남편의 복수를 넘어 조국의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며 "일본 고관을 직접 제거하려한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유일무이하고 안중근 의사에 비견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영양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어릴 적부터 총명했다. 영남의 석학인 아버지 남정한에게 글과 학문을 배웠다. 남자현은 19세 때 의성가문 김영주와 결혼했다. 결혼 5년 만에 남편이 을미의병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남자현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항일운동에 나섰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망을 맺어 국내 공작을 도와 주었다.
김 교수는 "남자현은 누에를 치고 명주를 짜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한 효부였다"며 "의병 활동을 하다 숨진 남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여장부였다"고 했다.
남자현은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했다. 개신교로 개종해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상룡이 이끌던 서로군정서의 대원에 합류한 남자현은 부상병사 간호뿐 아니라 직접 전투에도 참여했다. 길림사건이 터지자 검거된 안창호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의 구명운동을 전개해 석방을 주도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여론이 악화됐다. 국제연맹이 리튼 단장을 파견해 하얼빈에서 일제의 대륙침략 사실을 조사했다. 여기서 남자현은 주저없이 왼손 무명지를 잘라 '朝鮮獨立願'(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와 함께 무명지를 리튼 단장에게 보내고자 했다. 김 교수는 "일본 경찰이 무명지 전달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민족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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