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최종 심사가 진행됩니다. 올해 대구시는 국채보상운동 기념일인 2월 21일부터 2'28 대구학생의거 기간을 '대구시민주간'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시민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동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아카이브를 대폭 확대해 전 세계인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가 되었던 국채보상운동이란 역사적 사건을 발굴'선양하자는 뜻을 세운 것은 1990년대부터이지만,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란 공식법인이 출범한 것은 2002년 5월이다. 신 상임대표는 이때부터 대구 여성계의 대표로 부회장으로 참여했고, 2015년 이후 상임대표를 맡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최초의 여성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7부인회' '기생 앵무' 등 모든 계층의 여성이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비춰볼 때 획기적 사건이었다. 대구 여성계를 대표하는 신 상임대표가 '국채보상운동 정신의 세계화'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술은 인술의 시작, 명의를 꿈꾸다
팔순을 훨씬 넘었지만 신 상임대표는 현역 의사이다. 여성메디파크병원의 의무원장으로서 소아과'가정의학과'종합건강검진센터를 책임지고 있다. 그냥 상징적으로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료를 직접 담당한다. 진료 시간은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건강에는 지금도 자신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을 30, 40분 가벼운 조깅으로 시작하는데요. 병원 7층까지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면 젊은 의사들도 따라오기 힘들어합니다.(웃음)"
매주 열리는 콘퍼런스도 여중규 대표원장과 함께 신 상임대표 주도로 진행된다. 전공별 협진과 새로운 의학 지식을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애로 사항을 청취하는 소통의 자리이기도 하다.
"저의 기본이 되는 것은 인술입니다. 인술의 시작은 의술이었고, 의술의 인술 다음은 교육자였고, 교육자의 인술 다음은 어린이집 원장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풍족한 것이 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상임대표는 일제강점기 성주군 용암면 선암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딸만 넷이었고, 그중의 장녀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울타리에 살았던 큰집은 5형제에 딸이 두 명이었다. 손자들이 많았지만, 할아버지는 둘째네 집 맏이가 딸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학이 안기는 태몽을 꾸고 아들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던 차에 맏딸이 태어난 터라 더욱 실망감이 컸다.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딸도 아들 못지않게 잘 키우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는지 모른다.
"방학 때 집에 가면 할아버지는 객지(대구)에서 공부하느라 힘들었다며 보신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살코기는 손자들에게 가고, 손녀들에게는 껍데기와 뒷고기만 배정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신현탁 옹은 당시 명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임금님이 지방을 순회하다 아플 경우 진료를 담당하는 의원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환자들이 마루에 줄지어 대기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배가 아파 마당에서 나뒹굴던 환자들도 할아버지한테 침을 맞거나 처방을 받고 난 뒤 30, 40분쯤 지나면 멀쩡하게 웃으면서 나오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찌감치 '의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정한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너는 꼭 성공한다. 목표를 가져라. 하면 된다'고 어머니께서 용기를 많이 주셨습니다."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과대학)에 입학했을 땐 정말 당황스러웠다. 낯선 서울 생활에다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45명의 신입생 중 경기여고 출신이 2분의 1이었고, 나머지 2분의 1은 이화여고 출신이었다. 부산경남 출신이 3, 4명이었고, 대구와 호남 출신은 각각 1명씩이었다. 소심하고 여린 신 상임대표는 외톨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유학에서 배운 '배려'와 '생명 존중'
의과대학 졸업반 때 교수가 호출해서 가 보니, "너는 딱 교수 스타일이다"면서 조교 발령을 냈다. 그러고는 하버드 의대 동창생인 황용운 병원장이 있는 "동산병원에 가서 인턴 1년만 하고 오라"고 했다. 이것이 다시 대구로 온 계기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기초와 임상은 선호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인턴 생활 중에 팔이 10㎝ 이상 찢어진 환자가 왔는데, 인턴 7명이 아무리 낑낑대도 도저히 봉합할 수 없었습니다. 환자는 아파 죽겠다고 난린데 정말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죠. 그런데 선배 의사가 오더니 5분도 안 돼 간단히 봉합하여 해결했습니다. '역시, 의사는 임상의사가 진짜 의사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친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모습은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는데요. 그래서 '이게 내가 갈 길이다' 하고 소아과를 선택했습니다."
소아과 레지던트 4년 생활 중 1, 2년 차 때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힘들었다. 일본뇌염이 유행한 탓이다. 초보 의사였던 신 상임대표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응급실에 들이닥친 10명 중 6명이 일본뇌염에 걸린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고열과 경련, 의식장애 증세를 보였습니다. 척수액 검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자칫 바늘이 구부러지기라도 하면 치명적이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이런 검사를 하루에도 평균 10여 명씩 실시했습니다. 그래도 완치된 뒤 웃으며 퇴원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게 의사의 보람이구나' 하는 뿌듯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 상임대표는 요즘 의사로서의 보람이 더욱 크다고 했다. "수십 년 전 치료받았던 아이들이 법조인, 사업가 등으로 훌륭하게 성장한 뒤 찾아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고 할 때,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고마운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동산기독병원에는 외국 유학을 2년 다녀와야 정식 '과장'을 맡을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덕분에 신 상임대표는 미국 존스홉킨스의과대학과 동경대학에서 유학하며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은 우리와 달리 의사가 하루에 2, 3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하루 종일 환자와 대화하고 철저한 검사로 상세한 상담을 했습니다. 또한 소수인종인 동양인 의사(신 상임대표)에 대한 각종 배려는 정말 감동적이었는데요. 미국 생활을 통해 '나도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1년 8개월의 미국 생활에 이은 일본 유학은 딴판이었다. 동경대학은 우월주의와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었다. 당시 일본의 개인주의와 더치페이 문화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옆 사람에게는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자기 혼자 도시락을 먹는 모습도 이상할 뿐만 아니라, 교수와 수련의가 더치페이를 하는 것도 정말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도 분명했다. 신생아 분야의 최고를 자랑하는 이다바시병원(일본대학)에서 근무하면서 일본 의사들의 철저한 직업정신과 생명 존중에 놀랐다.
"생존 가망이 없는 환자도 식사를 거르고 밤을 새워가며 집중 치료해 살려내는 광경은 놀라울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다섯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900g에 불과한 막내를 결국 일본 의료진이 살려냈습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의과대학 교수로서 신 상임대표는 상당히 엄격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의과대학이다 보니, 자칫 자신감이 오만으로, 자부심이 비인간성으로 변질되기 쉬운 탓이었다.
"어느 것이든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라. 대단한 사람은 부담을 주지만 좋은 사람은 행복을 준다. 전문적 의료 지식은 의사의 기본에 불과하다. 인간미를 갖춰라."
▶어린이집을 연 유일한 의사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정의학과는 서울대와 연세대 2곳뿐이었다. 국가의 의료 체계 개편에 따라 학교 측에서 가정의학과를 신설하기로 하고 신 상임대표에게 책임자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소아과 전문의와는 별도로 1987년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새로 취득했다.
신 상임대표와 동료들의 노력으로 가정의학과는 국내 최초로 의과대학 커리큘럼에 포함되는 정식 '학과'로 인정받았고, 또 국내 최초로 석'박사 과정을 개설했다. 후배들을 위해 가정의학과 교과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한국 가정의학과의 새 장을 연 것이다.
세월이 흘러 신 상임대표는 정년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개원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지만 "그것이 과연 최선일까?" 고민이 생겼다.
"하루 평균 수십 명씩 30년을 진료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할머니가 업고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주로 저소득층 가정이 많았고, 할머니들은 아이 돌보기가 너무 힘들고,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곤 했습니다."
고민은 남편인 고 김상진 교수(전 영남대 정행대학장)가 해결해 주었다.
"정년퇴직하고 개원하지 말자. 그 대신 남은 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노력하자."
남편의 따뜻한 배려 덕에 어린이집 터 660여㎡(200여 평)를 구입했고, 정년퇴직 다음해인 1995년 7월 본인의 이름을 딴 사회복지법인 동학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의사가 설립한 국내 유일의 어린이집이다.
"개원식을 준비하려고 어린이집 인근 미장원에 갔더니, 미용사 아줌마가 등에 갓난아이를 업고 양쪽에는 5, 6세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끼고 머리를 만져주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보여 근처에 어린이집을 개원하니 아이들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무료 원생들로 인해 적자가 나자, 남편의 퇴직금으로 교사 월급을 주면서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봉사하는 삶, 행복한 삶
의과대학 재학 중 과대표를 맡은 박명숙(미국 거주) 씨가 "교회에 가 보자"고 제안했다. 신 상임대표는 "관심 없다. 나는 교회 안 간다"고 버텼지만, "그래도 가보자"며 무작정 끌어대는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명동에 있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날이었다. 제때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밥을 퍼주는 봉사는 뿌듯한 느낌을 주었다. "봉사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남을 기쁘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친구의 말이 가슴속 깊이 박혔다.
그 후 신 상임대표는 월드비전이 운영하는 고아 병원 책임자를 맡았고, 경북 오지와 남해 섬마을 등 무의촌을 방문해 열심히 의료봉사를 펼쳤다. 그렇게 봉사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2003년 3월에는 (사)일하는여성연합을 창립했다. 출범 당시 20명이던 회원은 현재 40여 명으로 늘었다. 교수, 공무원,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40~80대 여성이 구성 멤버이다.
"일하는여성연합은 대구양성평등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낙 보수적인 곳이라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는 '여자들이 뭐 하려고 저러나!'라며 나무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각종 봉사활동과 더불어 올해 10회째를 맞은 대구여성문화공연한마당 경연대회가 큰 행사입니다. 여성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 협동심을 갖게 해주는 멋진 축제입니다."
신 상임대표는 국채보상운동 정신의 세계화와 더불어 '엄마가 없는 조손가정 아이들'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모맺기 운동과 법무부 범죄예방위원 전국연합회 여성분과 대표로 활동하면서 엄마 없는 아이들의 어려운 생활을 목격하고 내가 더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남편이 생전에 대구 근교에 1만4천870여㎡(4천500여 평)의 땅을 마련해 두었는데, 이것을 어렵고 힘든 아이들을 위해 쓸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우리가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