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익어가는 어느 날 '청풍호' 자드락길을 따라 산행을 하게 되었다. 푸른 호숫가를 내려다보며 산을 오르는데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높이 올라갔다. 단풍나무는 아직 물들까 말까 고민을 하고 마른 굴참나무들만 슬그머니 내려앉고 있었다. 발아래 호수에서는 유람선이 둥둥 떠다니면서 가을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좁은 솔밭을 지나 정상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가니 적당히 땀이 밸 듯 말 듯하면서 아주 상쾌했다. '옥순봉'을 뒤로하고 '성벽길'을 걸으며 선선한 바람과 함께 가을 산행의 묘미를 한껏 누렸다. 내게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에서 도시락 먹는 것이었는데. 아뿔싸, 그제야 생각이 났다. 두고 온 도시락.
깜빡 잊고 도시락을 집에 두고 간 것이었다. 부랴부랴 서두르느라 아침도 먹지 못했다. 그날따라 주최 측에서 늘 주던 아침밥이나 떡도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비상식량으로 배낭에 갖고 간 빵마저 옆자리 사람에게 건넨 뒤였다. 꼼짝없이 굶어야 할 판이었다. 특별히 만만한 사람이 있어서 밥 좀 달라고 할 처지도 아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처량했다. 거의 정상에 다 온 지점이라 산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상에 가면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라 아무 데나 널브러지게 앉아서 함께할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가는 햇살만큼이나 외롭게 정상을 향해 오르는데 내 손을 꼭 잡으며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별로 크지도 않은 둥근 보온병의 도시락밥을 반 뚝 잘라서 내게 건네며 자기는 지난번에 밥이 많아서 억지로 다 먹었단다. 이 쓸쓸한 가을에, 자꾸 울먹울먹한 가을날에, 속으로는 양중해의 시 '떠나가는 배'를 외우고 있는데 이런 뜨거운 밥과 사랑을 주시다니. 밥 반 그릇의 정에 나는 그만 녹아 버렸다.
으슬으슬 추우면서 산 그림자가 냉정해지는 기슭에서 밥 반 그릇에 숙연해졌다. 지치고 배고픔보다 도시락을 잊고 온 부끄러움보다 서글픔이 밀려오는 가을 산정에서 뚝 자른 밥 반 그릇의 인연이 그와 나를 깊게 맺어 주었다.
우리는 흔히 밥이나 한 끼 하자고 겉치레 인사같이 말하지만 사실 밥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엄청난 인연이다. 좁은 공간에서 마주 앉아 음식 씹는 모습까지 보이며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훨씬 앞당겨 놓는다. 의자에 앉아 고급차를 나누는 딱딱한 사무적인 관계보다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서 쩝쩝, 밥을 같이 먹고 나면 식구처럼 정이 확 간다. 한 집에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식구가 아니던가. 그렇게 정을 나누고픈 사람한테 우리는 밥 한 끼 하자고 한다. 밥 한 끼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허전한 가슴을 채우는 것이다. 아, 가을날 밥 한 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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