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경주에는 친구를 만나러, 등반대회를 하러, 한식 때 어머니 산소를 찾아뵈러 매년 10차례 이상 가지요. 경주에 가면 예기청소라고 있어요…."
예기청소(藝妓淸沼). 경주시민들에겐 '애기소'로 꽤 알려진 곳이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 실리기도 했다. 무녀 모화가 예수가 진짜인지, 신령님이 진짜인지 증명하는 굿을 하다 빠져 죽은 곳이다.
섬뜩한 기분이 들 만하지만 만화가 이현세의 안식처는 형산강 물이 쉬어가는 이곳이다. 경주예술의전당 맞은편. 2012년 재건된 금장대가 터줏대감이었던 것처럼 예기청소 위에 앉아 있다.
"어린 시절 성건동에 살았어요. 물이 쉬어가는 곳이다 보니 형산강 상류에서 누군가가 익사하면 꼭 이곳에서 발견됐지요. 아이들은 애기, 청소년, 소마저 빠져 죽는다며 애기청소라 불렀어요. 꼬맹이들이 담력을 시험하던 곳이기도 했어요. 여름이면 거기서 다이빙을 해야 용맹을 입증하게 되는 수험장이었죠. 4m 높이 거북바위에서 1m 남짓한 키의 꼬맹이들이 하나둘 뛰어들어 담력을 재고 사나이로 인정받던 곳이었어요. 못 뛰어내리면 몇날 며칠을 놀림에 고생해야 했으니까요. 저도 초등학생 시절 홍수가 지나고 물이 많던 한여름에 큰마음 먹고 뛰어내렸죠."
금장대 울타리에 막혀 예기청소의 수심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알려준 푸르스름한 공포가 폐부로 스몄다. 푸른 물빛은 검푸른 입술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지나친 상상이 스스로를 질식시키듯 시신 없는 영안실에 들어갔을 때처럼. 엄습한 공포감이 고조될 즈음 철길을 지나는 기차 소리가 주변을 깨웠다. 어린 이현세에게도 물귀신, 4m 높이의 고소 공포보다 무서웠던 건 무리의 따돌림이었으리라.
또래에게 인정받기 위한 시험대는, 철이 들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 곳이 됐다. 경주 산과 들, 강에 흩어졌던 아버지의 노력과 땀은 죽지 않고 살아나 예기청소에 모여든다.
"아버지는 제가 9살 때 돌아가셨어요. 둘째 삼촌이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연좌제로 온 식구가 곤욕을 치렀기에 아버지는 이렇다 할 일을 할 수 없었어요. 봄이면 나무를 하러 다녔고, 수도산 건너까지 가서 나무를 해 왔죠. 여름에는 형산강에서 다슬기를 채취해서 팔아 생계를 이어가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0년. 아버지의 모습은 예기청소에도 비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을 먹여 살리려던 아버지의 흔적이 이곳에 유적처럼 묻혀 있다.
"나무 한 짐 가득 하시고 저를 지게에 올려 태우셨죠. 진달래꽃을 지게에 꽂아 산에서 내려가시던 아버지 어깨가, 그 늠름하시던 모습이 아직 어른거립니다."
조각조각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예기청소에서는 희한하게도, 바특한 삶에 자리를 찾지 못했던 기억들이 모양새를 갖춰 나타난다.
"물이 쉬어가는 곳에 사람도 잠시 쉬면서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어린 시절 모습은 물론 지금의 모습도 정리되지요. 예기청소는 어린 시절 삶의 지지대였고 지금은 안식과 회상의 공간인 고마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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