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획 페테르부르그를 가다] 2. 차르체제의 몰락

노동단체란 이유로 무단 해고…15만명의 노동자 들고 일어나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나르바 개선문에서 수백 명이 학살됐다.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나르바 개선문에서 수백 명이 학살됐다.
가폰신부
가폰신부

지금은 키로프 공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혁명기에는 '붉은 푸틸로프' 공장이란 별명을 가졌던 유명한 곳이다. 혁명기 때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공장으로 한 때는 4만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중심에서 당시 러시아의 미래를 결정했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푸틸로프 공장의 역사를 보기 위해 공장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물관은 공장의 길 건너편 건물에 설치돼 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필자의 방문에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인들도 지우기를 원하는 푸틸로프 공장의 과거 역사를 한국인이 알기 원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굳게 닫혔던 박물관이 열렸고 조명등이 켜졌다. 박물관에는 공장의 초기 역사와 혁명기 때 공장 노동자들의 사진들, 소비에트 시절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나의 눈은 1905년 혁명기의 사진들에 멈췄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상 러시아의 차르 체제는 1905년의 혁명에서 이미 붕괴됐다고 할 수 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그전 해인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시작됐다. 전쟁의 패배는 차르의 위신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사기마저 현저히 떨어뜨렸다. 또한 전쟁물자의 충당으로 인해 발생한 식료품의 부족과 높은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1905년 1월 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4명의 노동자가 노동자단체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된다. 가폰 신부가 설립한 노동자단체는 회사 측과 정부에 노동자들을 즉각 복직시키고 해고를 명령한 관리자를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노동자단체의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1905년 1월 15일이 되자 600명의 노동자들이 푸틸로프 공장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 조직의 인정과 더불어 사측의 협상대상으로의 인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에서는 이것마저도 묵살해버렸다. 다음 날(1월 16일)에는 페테르부르크의 총파업을 위한 파업대책위가 만들어지고 파업이 시작된다. 푸틸로프사의 1만2천 명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서게 된다. 1월 17일에는 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1월 20일과 21일에는 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 총파업이 실행된다.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동참하면서 교통, 우편, 신문 등이 모두 중단됐고 도시 전체는 기능이 아예 마비돼버렸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푸틸로프 공장의 경영진이나 정부 측에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에 노동자들의 대부로 불리던 가폰 신부는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만들어 차르에 직접 전달하는 대규모 노동자들의 행진을 계획하게 된다. 겨울 궁전에 1월 22일(일요일) 오후 2시, 시위대가 모두 도착해 차르를 만나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전달한다는 것이 가폰 신부의 계획이었다.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서명한 청원서에는 8시간 노동시간과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일반투표를 통한 의회 소집과 러일전쟁의 종결을 담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 시내 4곳으로 노동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토요일 늦은 밤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들의 기대는 컸다. 1월 22일 일요일 오전 3시가 되자 모인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성화와 십자가, 차르의 초상화 등을 들고 차르가 사는 겨울 궁전을 향해 천천히 행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카자크 군대와 수도방위군, 다른 도시들에서 지원을 나온 무장 군인들까지 모두 1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집결했다. 이들은 시내 곳곳에 대포와 기관총 등을 설치해놓고서 군중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가폰 신부가 선두에서 선 시위대열은 페테르부르크 남동부 지역의 나르바 개선문을 향하고 있었다.

가폰 신부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성화와 아이콘, 황제의 초상화와 배너를 앞세우고 찬송가와 애국가 등을 부르면서 행진해나갔다. 나르바 개선문까지 행진해오자 군의 지휘관이 시위행렬을 막아서면서 더 이상 오면 발포하겠다는 경고를 했다. 이에 가폰 신부는 비무장의 노동자들과 어린이와 부녀자들, 노인들이 행진하고 있다면서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뒷줄에서 행진하던 군중들은 계속 앞줄을 떠밀었고 행렬은 앞으로 계속 떠밀려 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카자크 기병들이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들고서는 군중들에게 달려들어 베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흰 눈 위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카자크 기병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도 가폰 신부와 일행들은 다시 일어나 걸어나갔다. 그때부터는 군인들이 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배너, 초상화나 성화를 들고 앞에서 행진하던 노동자들은 모두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모두들 눈 위에 엎드렸지만 총탄은 계속 날아왔고 사상자는 계속 늘어갔다.

시내의 네 곳에서 집결한 노동자 대열 중에서 가폰의 대열은 아침부터 나르바 개선문에서 수백 명이 학살당하면서 행진이 중단됐다. 가폰 신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작가 막심 고르키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다른 대열들도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사격을 당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겨울 궁전과 가까운 넵스키 대로에서 행진하던 수만 명도 카자크 기병들의 검과 병사들의 총탄에 의해 수백 명이 쓰러져나갔다. 군대는 쓰러진 시체들을 썰매에 싣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를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 하며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이날 군인들의 발포와 카자크 기병들의 무자비한 살해로 거의 1천 명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차르는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는 파업과 무장투쟁이 일어나 민중들과 러시아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심지어는 병사들의 반란도 뒤따랐다. 1905년에 한 해 동안 러시아 전역에서는 1만3천 명이 죽고 7만5천 명이 구속됐다. 사실상 러시아는 1년 내내 내전상황에 처해 있었다. 차르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초로 국민들과 권력을 나누는 양보를 하는데, 바로 두마(의회)의 승인이었다. 이로써 러시아에서는 최초로 의회가 수립되고 선거제도가 도입됐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민중들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점심시간 중에 박물관 앞의 공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세 명의 키로프 공장 노동자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100년 전처럼 그런 상황이 온다면 혁명에 앞장설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을 보그단이라고 밝힌 노동자는 "더 이상 혁명은 원하지 않는다. 당시 혁명에서 우리 노동자들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렇다고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월급이나 올랐으면 좋겠다. 지금 월급은 4만루블(80만원)이지만 굶지는 않는다"고 말하자 모두들 크게 웃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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