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문명의 오랜 관성 속에서 평온한 세월을 영위하던 조선은 19세기 거센 서양문명의 파도 앞에 낙엽처럼 흔들렸다. 문명 충돌과 국권 침탈, 망국을 넘어 망천하의 위기를 맞은 조선의 선비들은 여럿으로 갈렸다.
상투와 도포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선비가 있었는가 하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선비도 있었다. 개화와 개혁에 전념해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친일 매국노'의 오명을 감수한 선비도 있었다. 유교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며 쇄신의 길을 모색한 선비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뒤엉키고 휩쓸리며 비틀비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이 책 '최후의 선비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신념으로 서양을 온몸으로 반대한 최익현부터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전우, 조선을 개혁하는 것이 선비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던 김옥균,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 유길준, 1905년 을사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박제순, 세상을 '아(我)와 비아(非我)', '소아와 대아'의 대립으로 보았던 신채호, 불굴의 독립투사 이육사 등 선비 20명의 삶을 이야기한다.
◇"서양인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다"
최익현의 근심은 '더러운' 서양 문물이 조선의 강토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 문물에 대해 극단적인 배척을 주장하면서, 1866년 75세의 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 앞으로 나와 '척화'를 외쳤다.
도끼를 지고 궐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뜻을 밝힌 상소문(持斧伏闕斥和議疏:지부복궐척화의소)은 그의 염려를 절절하게 토해낸 글이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곧 서양이며, 서양인은 삼강오륜도 모르니 곧 사람 탈을 쓴 짐승이나 같다.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놀아야 하는데 이제 강화하고 개국한다면 기(氣)가 이(理)를 이기는 것이며,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조선선비 최익현에게 서양과 강화는 한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외세를 받아들이느니 세상을 버리겠다.
전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크게 통탄하며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분개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섯 역적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請斬五賊疏: 청참오적소)'를 올렸다. 그는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했다.
황현은 나라가 외세에 먹혀들어가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천분(天分)은 글 쓰는 일에 있으며,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글을 쓰는 것이 선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국권 상실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자결했다. 그는 목숨을 끊으면서도 "이 행동은 개인의 뜻일 뿐, 충성이 아니다"고 했다.
◇ 군주에 불충하고, 경전에 불순했던 선비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한다. 그러려면 경장(更張:부패한 제도를 개혁함)해야 하고, 경장하려면 개화의 법을 세워야 한다. 개화의 모델은 일본이다.' 김옥균의 개화사상이다.
그는 급진 개화파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했다.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경장이라는 목표 아래 그는 군주에게 불충했고, 경전(經典)에 불순(不順)했다. 그런 인물을 선비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나 김옥균은 기회주의적 모리배들처럼, 자기 일신(一身)의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경장'이 중요했다. 어쩌면 일본을 등에 업고 턱도 없는 쿠데타를 벌인 친일 몽상가였는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 이완용이 친일파 대명사가 된 까닭
'친일파'의 대명사처럼 낙인찍힌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7일 경운궁 증명전에서 을사조약에 대한제국 대표로 서명한 사람은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이완용이 친일파의 대명사가 됐을까.
박제순은 오랫동안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나라를 말아먹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의 순간, 그는 주저했다. 오히려 저항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종용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맞장구를 치며 조약장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이완용이었다. 그가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박제순은 나약한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책임을 회피하고 고개를 숙이며 평생을 살았다. 26세에 서기관으로 중국 톈진에서 근무했고, 7년 뒤에는 전권대신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5개국을 순방했다. 36세였던 1893년 당시 청나라의 떠오르는 별 위안스카이와 청의 원병을 두고 단독 회담했다. 1899년에는 전권대신으로 청나라와 '한청통상조약'을 맺었다. 대한제국의 외교사령탑이었다. 그가 그처럼 외교에 빼어났던 것은 뛰어난 어학실력뿐만 아니라 유연성 덕분이었다. 그의 약점인 나약함에서 비롯된 유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
◇ 유교의 경장과 구신(救新)을 모색한 선비
구한말 선비들 중에는 개화를 일절 거부하고 절의를 위해 죽음을 택하거나 세상과 연을 끊어버린 사람, 개화에 전념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매국노라는 오명을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유형의 선비들이 나타났다. 유교정신을 계승하되 사회적'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면서 유교의 경장과 구신(救新)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대표적 인물이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이상룡이다.
이상룡은 '민간단체를 잘 수립하고 잘 운영하는 것이 구국과 경장의 급선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가야산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1907년에 전통 예교와 신식 학문을 교육하는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에 대한협회의 안동지회를 설치했다. 그는 병학 연구에 골몰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승리하려면 사람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신흥무관학교를 꾸려 그 병력으로 한반도의 경찰서, 면사무소, 악질 친일파의 집 등을 습격했다. 이상룡은 유교를 버리지 않으면서 긍정과 포용의 자세로 새 시대에 임했던 최후의 선비였다.
◇ 한마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살다 떠난 선비
심산 김창숙은 국내에서 독립운동'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장지연'남궁억'오세창 등이 주동해 설립한 대한협회에 가입하며, 경북 성주군에 지회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섰다. 중국에서 쑨원을 만나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홍콩에서 '한국독립후원회'를 만들고 의연금을 모금했다. 광저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걷는 등의 일에 힘썼다.
김창숙은 엄격하고 맹렬한 사람이었다. 불의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비타협적이었고,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찮다고 여기는 일(자신의 외모, 지위, 재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마음으로 평생을 산 선비였다.
김창숙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1879년 7월 경북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오랜 감옥살이와 밤낮으로 이어진 고문에도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태산처럼 굳건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 글로벌 표준만 추구하는 현대…선비 없는 세상
북송(北宋)의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제시한 인간상, 즉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는 정신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과 한국 선비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지배 수단은 칼과 총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에서는 선비들이 붓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조선과 중국이 민법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며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지은이는 "동양의 정신이나 전통의 가능성이 무시되고 오직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같은 시세에 따라 선비들은 사라졌다. 선비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떠한가. 유학이 예전처럼 유일한 삶의 법도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큰 가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 가치가 인간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고 말한다. 368쪽, 1만6천원.
▷ 지은이 함규진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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