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각과 전망] '전쟁은 없다'는 믿음은?

생의 막바지에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야말로 한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이 아닐까.

80대 후반의 아버지를 병시중 중인 한 지인의 얘기다. "치매 증세인지 날마다 '차를 빨리 치워라'며 산불 진화에 나선 얘기를 합니다. 똑같은 말을 지겹도록 반복하는데 공무원을 하신 아버지가 산불 진화 때 아마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평생을 바친 직업의식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기자의 선친은 6'25전쟁 참전 용사다. 전쟁 때 압록강에 가장 먼저 진격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물을 떠 바친 육군 6사단 소속으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후퇴하다 다쳐 의병 전역했다.

선친은 돌아가시기 전 한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입버릇처럼 "울산에서 차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올 때가 됐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알고 보니 울산은 6'25전쟁 때 국군통합병원이 있던 곳이었고, 선친은 부상당한 뒤 그곳에 이송돼 치료를 받고 의병 제대했다. 병문안을 갔을 때도 군대 얘기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른 일과는 달리 뚜렷한 기억으로 아들의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연유로 자식들은 유해를 조상이 잠든 선산 대신 국립영천호국원으로 모셨다. 삶의 기억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이 6'25전쟁 참전이었던 만큼 참전 용사들이 잠든 호국원을 택한 것이다.

전쟁의 고통과 참상은 전 세계적으로 참전 용사들의 증언과 수많은 책'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참전 용사들을 비롯해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얘기는 하나같이 비참하기 그지없다.

6'25전쟁은 휴전 상태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 수년간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전쟁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를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전쟁에 대한 생각은 세대에 따라, 군대 경험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얼마 전 부산의 한 70대 할아버지가 현금 1천만원을 은행에서 찾아가다 잃어버린 게 뉴스가 됐다.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경험한 이 어르신은 북한과의 전쟁을 우려해 적금을 깼다고 한다.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한 70대 이상 어르신들에게 전쟁이란 말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군인에게 전쟁은 바로 죽음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곧바로 대응해 싸워야 하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최전방 철책사단에서 GP장으로 복무 중인 아들이 얼마 전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면서 "몸조심하고 또 보자"는 말에 "살아 있으면요"라고 답해 뜨끔했다. "전쟁 나면 총 든 군인이 가장 안전하다"며 말을 돌렸으나 위로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우리 국민 대다수는 전쟁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핵무기가 존재하고 화력이 집중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인류의 파멸까지 몰고 올 수 있기에 북한이 도발할 수 없을뿐더러 미국도 선제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의 절대적인 믿음이다.

우리는 전쟁을 남의 일 취급하는데, 왜 일본과 미국 등 남들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예고하며 대비하는 것일까. 일본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쏠 때마다 경고 방송으로 방공호 대피를 유도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둔 미국은 자국민을 일본으로 대피시키는 훈련을 강화하고 있다. 호들갑일까. 전쟁 위기가 처음이 아닌 만큼 이전처럼 돌풍으로 끝날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전쟁은 없다"고 하는 것은 어설픈 믿음이다. 북한과 마주한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은 "오발에 주의하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듣는다. 오발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전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국 보호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예방 공격은 언제든 가능한 상황이다. 상대의 뜻을 고려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지극히 자국 이기주의로 이기려고 상대를 깨어 부수는 게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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