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절정이다. 독서의 계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독 책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커피와 함께 놓인 책이 더 자주 눈에 들어오고 책으로 산을 이룬 서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의 탐험을 한다. 책은 우리 생활의 일부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노랑에서 갈색까지 농도가 다른 가을 색감으로 가득한 파주 출판단지 지혜의 숲에서 권기봉 작가를 만났다.
-황: 독서가 삶을 바꾼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
▶권: 독서를 통해 한정된 시간에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고, 동시에 작은 변화라도 추구하다 보면 변해가는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황: 독서문화도 바뀌지 않았나. 전자책이 등장했고 대형 서점은 마치 종합 놀이공간 같다. 독서의 개념이 달라지는 건가.
▶권: 내게 전자책은 문학작품이나 실용서, 잡지를 읽을 때 요긴하다. 인문, 교양, 사회과학 영역은 필요한 부분을 다시 찾아보기 쉽지 않아 전자책으로 읽는 데 한계가 있다. 전자책의 효용성은 아직 제한적인 듯하다. 또 대형 서점들이 책을 소재로 많은 공간을 꾸미지만 독서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책이 장식 소재로 쓰일 뿐이다. 최근 촬영 때문에 홍대 경의선 책거리에 간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서점에서 기념사진이나 찍을 뿐 책을 사거나 읽지는 않더라. 책을 읽는다는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기보다는 지금도 여전히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 아닌가 싶다.
-황: 대형 서점의 순위, 추천도서가 책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책의 내용보다 마케팅의 힘이 더 큰 것 아닌가.
▶권: 어느 사회에나 베스트셀러는 있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 대두되는 문제라고 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한다. 비록 읽지 못하더라도 이른바 '뜬다' 하는 책은 일단 사고 보는 이도 있다. 우선 책이 팔리니까 좋을 수도 있겠지만 독서문화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얄팍한 사회적 단면이 아닐까. 본질적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내 관심사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서점에 가면 책을 눕혀놓고 진열하는 평대가 있는데, 대부분 출판사가 서점에 돈을 주고 임차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잘 팔리는 책과 잘 팔 수 있을 책을 더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그 책의 가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많은 독서를 통해 스스로 책을 고르는 혜안을 기를 필요가 있다.
-황: 작가의 삶이 궁금하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영감을 얻는가.
▶권: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20대에는 과학을 공부했고 또 사회부 기자 생활을 했는데, 삶의 모습과 고민, 그리고 그 고민들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가 내 관심사였다. 나아가 그것이 현재적으로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우리의 미래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탐구해왔다. 그것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수한 현장 답사를 다녀야 했고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야 했다. 텔레비전, 영화, 신문도 많이 보려고 하고 깊이 읽으려 한다. 글을 쓸 때만 골방에 앉아 있을 뿐 평소에는 늘 현장을 지향한다.
-황: 지상파 방송사 기자로서도 멋지게 활약했고 현재는 작가로서도 '잘나간다.' 요즘 부쩍 자기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도 많은데 조언을 해 줄 수 있나.
▶권: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책을 쓴다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게 책은 사회현상에 대한 내 입장과 생각을 공유하고 의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이다. 책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예컨대 나의 경우 기자에서 작가로 직업이 바뀌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기자 시절에는 사회적 관심사를 마이크를 이용해 말의 형식으로 전했다면, 지금은 활자를 이용해 전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예전보다 긴 호흡으로 기승전결 맥락을 전달하고 소통하기에 책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요즘 한창 인기인 각종 책 쓰기 강좌나 아카데미 등을 보면 책을 쓰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을 내면 전문가 대접을 해주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책을 쓰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 자신이 왜 책을 내고자 하는지 곰곰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기만족이나 성찰을 위한 거라면 책보다는 일기를 쓰는 것이 낫다. 책은 불특정다수의 독자와 대화하기 위한 매개체, 즉 도구다. 그래도 책을 내고 싶다면 사비(자비) 출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내고 끝내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환경적으로도 나무에게 미안한 일 아닌가. 관객 없는 영화가 외롭듯 독자 없는 책도 쓸쓸할 뿐이다.
-황: 왜 근현대사 답사기나 역사기행이라는 흔하지 않은 분야의 책을 쓰는가.
▶권: 어린 시절을 깡촌도 그런 깡촌이 없을 정도로 궁벽한 시골에서 살다 보니 바깥세상에 대한 궁금함이 컸다. 대학에 진학하며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전국의 문화재를 찾는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심지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집에 안 가고 답사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다. 우리의 답사여행 주제가 대부분 삼국, 고려, 조선이란 시공간에 집중돼 있었다. 정작 지금의 우리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교육문제, 입법과 사법제도, 언론지형 등 여러 문제를 잉태한 지난 100년의 시간이 과연 어떻게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니 근현대사의 공간들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근현대사의 공간들은 어디에서나 흔한 철근콘크리트 소재이고 도심에 위치해 있다. 그 때문일까, 적잖은 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도심에서 개발압력을 버티지 못해 철거되는 경우도 많았다. 명동에 있던 한국 최초의 증권거래소도, 남산과 세종로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지금은 없다. 근현대기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 등 부끄럽고 어두운 시기라고 여겨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했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도 많이 없애버린 결과다. 미래 세대들은 이제 보고 싶어도 못 본다. 더 훼손되기 전에 알리기 위해서 글을 썼고, 또 강연과 현장 답사 안내를 통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책, 강연, 현장 답사는 그런 수단이다.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한.
-황: 근현대사 기행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권: 얼핏 보면 역사는 갖은 시행착오로 점철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근현대사 기행의 힘이 있다. 기본적으로 인류 역사는 인권이 신장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고 진보해간다. 그런데 그게 늘 그렇게 직선처럼 진보해 가느냐. 그렇지는 않다. 온갖 시행착오를 비롯해 퇴보, 반동, 그리고 진보가 반복되며 간다.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양상이 바뀌기는 하지만 마치 나선형처럼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즉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갈등과 고민의 순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전에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다를지라도 과거 비슷한 경험으로부터 정답까지는 아닐지언정 해답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적이다.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기에 동시에 미래적이기까지 하다. 근현대사 기행을 통해 그러한 지혜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
-황: 인지도 있는 작가의 책도 이제 100만 부 베스트셀러는 불가능한 시대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작가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 아닌가.
▶권: 예나 지금이나 책으로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한국 작가는 극소수다. 시장이 일본 정도만 돼도 모르겠다. 인구도 1억 명이 넘고 출판물에 대한 호응도도 높다 보니 기본적으로 팔리는 부수가 있다. 각급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양도 꽤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심지어 도서관이 덤핑을 요구할 때도 있다. 이런 현실에서 출판문화 증진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독자들도 줄어들고 있다. 커피 서너 잔 값의 책 사는 것을 아까워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사서를 책 정리나 하는 이들로 오해한 탓인지 사서직급의 인원 고용마저 등한시하는 실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작가가 돈을 좇아야 하느냐. 돈만 보고는 작가 일 못한다. 돈 보고 이 일을 하면 작가가 아니라 작자 되기 십상이다.
-황: 요즘은 학생들에게 필수 도서목록을 정해주고 독후감을 쓰게 한다. 또 책 읽기 학원도 있다. 바람직한가.
▶권: 결론부터 말하면, 과하다. 그러나 권장도서는 필요하다. 지능발달 수준에 맞는 책을 권장한다는 전제 아래, 독서 경험이 쌓여 습관이 되고 습관이 쌓여 일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책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또 독후감을 써보는 것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내 생각을 머릿속에만 가지고 있기보다 그것을 기록하려 노력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라도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파생되는 발견과 배움이 있다. 책을 읽으며 메모하는 습관도 권한다. 내 생각을 구조화하고 정리하는 데 더없는 훈련이다.
-황: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독서교육을 하면 좋을까.
▶권: 독서교육에 대한 질문을 하는 부모에게 도리어 묻고 싶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거기에 해답이 있다. 아이가 만화만 읽는다며 걱정하는 부모가 많은데 만화 안에도 내용과 구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본질이다. 만화를 봐도 자신의 일상과는 다른, 또 다른 내용과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책도 다양하게 경험해 봐야 한다. 소설, 시, 자연과학, 공학, 역사, 인문과학, 사회과학, 심지어 '빨간 책' 등 다양한 책을 보는 것이 좋다.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는 창구를 하나로 좁힐 필요는 없다. 세상에 '악서'는 없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이 시간낭비인지 스스로 깨우치는 순간이 온다. 옥석을 가려내는 일깨움을 줬으니 더 이상 악서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유다. 그러나 이런 여유를 우리 부모들은 많이 갖지 못한다. 남과의 비교 때문이다. 옆집 누구는 뭘 읽는다는 식의 경쟁심은 의미 없다. 아이 스스로 책이 주는 흥미와 다채로움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부모의 욕망이 투영되는 순간 자발적인 성장판은 닫혀 버린다. 아이에게 독서교육 할 생각일랑 차치하고 함께 책을 들고 앉아 읽는 게 먼저다. 부모가 책을 멀리하는데 아이라고 가까이할 까닭이 없다.
-황: 작가로서 행복한가.
▶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관심 가지고 있는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과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행복한 순간만 있겠나. 매사가 행복의 연속인 듯하고 동시에 매사가 불행의 텃밭인 듯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쓰는 이 한 문장이 충분을 넘어 만족스러운가, 내일의 강연 준비가 완벽한가, 현장 답사 안내는 충분히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하루하루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행복하다기보다 애초 꿈꾼 작가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매진할 뿐이다.
-황: 대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비전을 소재로 책을 펴낸다면 무엇에 집중할 수 있을까. 대구 독자들을 위해서 한마디해 달라.
▶권: 사실 대구는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초반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해 국채보상운동, 1946년 미군정의 쌀 정책에 저항한 10월 항쟁도 대구가 시발지였다. 이승만 독재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곳도 대구다. 예술적으로도 대구는 가수 김광석만 있는 게 아니다. 이육사, 이상화 같은 저항시인의 고장이었다. 말 그대로 대구는 한국 근현대사 투쟁의 역사가 있었고 시대의 모순에 저항한 지역이었다. 사회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혁파함으로써 내 후손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심지어 목숨도 걸었던 곳이 대구였다. 대구는 그런 자존심이 있던 도시다. 한 번쯤 대구시민들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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