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침묵

다양한 감정 담으려다 초점 놓친 법정 스릴러

손홍뢰와 곽부성이 팽팽한 대결을 펼쳤던 중국 영화 '침묵의 목격자'(2014)를 '해피엔드'(1999)와 '은교'(2012)의 정지우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사랑의 엇갈림과 오해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한 정지우 감독이 자신의 장기인 멜로드라마에서 벗어나 법정 스릴러에 도전했다. '침묵'은 오리지널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지만,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에서 감지되는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 보다 더 초점을 둔다.

재력가 임태산(최민식)은 약혼을 앞둔 젊고 아름다운 연인인 가수 유나(이하늬)를 딸 미라(이수경)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유나가 살해당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용의자로 지목된 미라는 음주 상태여서 당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딸을 무죄로 만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임태산은 최희정(박신혜) 변호사를 선임한다. 한편, 임태산은 유나의 광팬이던 김동명(류준열)이 사고 당일 CCTV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태산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복잡하게 얽힌다. 아내가 죽은 뒤 홀로 키운 딸 미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고 아름다운 약혼녀, 기업가인 태산을 조사한 전력이 있는 검사, 미라와 마음을 진심으로 나누도록 고용한 변호사, 태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비서, 가수 유나의 사생팬. 이들 모두가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움켜쥐고 있다. CCTV, 인터넷,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들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고, 그 기기들로 진실이 밝혀지는가 하면, 또한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는 우발적인 범죄와 범인을 추적한다는 표면적인 이야기 이면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가족, 돈, 뉴스라는 키워드 안에서 태산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딸을 진심으로 위하는지, 약혼녀를 진짜 사랑하는지,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믿는 게 사실인지, 태산이 딸이나 약혼녀, 돈을 대하는 태도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자꾸 미끄러진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은 태산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관객은 미스터리의 퍼즐을 맞추는 데 집중하는 동시에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알게 되는 인물들의 감정에 눈길이 가게 될 것이다. '사랑니'와 '은교'같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을 감당하는 캐릭터들의 복잡한 감정선을 유연하게 따라가는 정지우의 연출력이 이 영화에서도 발휘된다.

영화는 임태산을 연기하는 최민식의 영화다. 자유자재로 바뀌는 그의 다양한 얼굴이 관건이다. 그는 훨씬 오래전 '해피엔드'에서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가 복수하고, 냉정하지만 또한 후회하고, 그리고 절망하는 얼굴을 다양하게 표현해냈었다. '침묵'의 임태산은 '해피엔드' 때와 비슷한 결의 감정선을 가진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묵직해진 위치에 올라선 배우가 되어서인지, 극적인 변신을 보여주는 그의 감정 연기는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오히려 미친 건지 영특한 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게 행동하는 광팬 역 류준열의 재간 넘치는 등장과, 앙칼지거나 애처로운 딸 미라 역의 이수경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영화에 활력을 준다.

법정의 팽팽한 대립, 변호사조차 알 수 없는 피의자의 정체, 몰래 카메라의 진실 유무 등 영화는 장르 규칙을 충실히 따라가며 후반부로 향한다. 반전의 연속은 진실 게임 속으로 관객을 적극적으로 유인한다. 화려한 캐스팅은 인물 하나하나가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음을 예측게 한다. 영화는 좋은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있음에도 '유주얼 서스펙트'와 같이 허를 완전히 찔러버려 관객을 당황하게 할 만큼 유연하게 서사를 주무르지는 못한다. 법정 스릴러라는 냉철한 게임의 규칙에 인물 간의 관계라는 감정이 흘러넘치게 들어온 까닭이다.

아버지와 딸의 애증, 계모와 딸의 반목, 검사와 변호사의 사적 관계 등, 이 많은 다양한 감정들을 한데 담으려고 하다 보니 초점을 놓쳐버린 듯하다. 장르 법칙에 정서와 여운이 엇박자가 나는 느낌이다. 법정 스릴러에서 차가움과 뜨거움의 조화가 쉽지 않은 도전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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