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품위 있는 죽음

아버지와 통화를 끝낸 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버지는 2주 전부터 대구의 한 요양병원에 머물고 있다.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쇠약해진데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던 날, 4남매는 연명의료는 하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아버지는 평소 시신은 기증하거나 화장을 할 것이고 연명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어요. 가족들도 편안하게 보내드리자는데 동의했죠."

기자의 30년 지기는 지난여름 아버지를 황망하게 떠나보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친구의 아버지는 횡단보도에서 시내버스에 치였다. 머리를 크게 다친 친구의 아버지는 두개골 일부를 개방한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친구는 침통한 얼굴로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라고 읊조렸다. 갑작스러운 죽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족들의 선택. 충분히 이해됐다. 친구의 아버지는 한 달을 더 견디신 뒤 영원히 가족 곁을 떠났다. 예상되는 죽음과 갑작스러운 죽음의 차이만큼, 영원한 이별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이토록 달랐다.

환자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이 내년 2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은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멈추는 것을 허용한다. '존엄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셈이다. 사실 연명의료를 하는 환자의 몸에는 각종 생명 유지 장치가 붙는다. 입에 관을 넣어 인공호흡기를 달고, 혈압을 높이는 승압제를 주사한다. 신장이 망가진 환자는 지속적으로 혈액 투석도 진행한다.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는 의식이 돌아올 기회가 거의 없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숨을 마음대로 쉬지 못하는 공포를 줄이고자 안정제를 계속 투여하기 때문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의 배경에는 '김 할머니 사건'이 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폐암 조직 검사 과정에서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자녀들은 김 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 이듬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대법원은 질병의 호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현 상태만을 유지하려는 연명치료는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우리나라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한 것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이 대법원 판결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여러 요건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우선 회생 가능성이 없는 임종기나 말기 환자만 해당된다. 임종기와 말기의 판단은 주치의와 해당 분야 전문의 등 2명이 내린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내릴 환자 의사도 중요하다. 환자는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거나 의료기관에서 자신의 의지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없고,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없다면 평소 연명의료를 거부했다는 가족 2명 이상의 진술과 전문의 1명의 확인이 필요하다.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면 직계가족 모두가 중단에 합의해야 한다.

논란이 많았던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선 생명 경시 풍조다. 상속 목적이나 치료비 부담 등 경제적 이유로 환자의 뜻과 상관없이 가족들이 일방적으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종기에 접어들었는지 일괄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환자의 경우 생명 유지 장치를 달면 계속 생존할 수 있다. 만성폐쇄성폐질환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가 호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했다가 연락이 끊겼던 자녀가 갑자기 찾아와 중단을 거부하고 병원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시급하다. 자신의 죽음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하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 품위 있게 맞으려면 스스로의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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