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도착했다. 덴마크에 입국한 지 한 달이 다 된 시점이었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여름옷에 겨울 등산점퍼 정도만 챙겨왔던 나는 바람 많고 습한 코펜하겐의 10월을 견디며 짐 속에 꾸려둔 겨울 옷가지와 두터운 이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유럽에서 추위를 타는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일반 가정집에서보다 낮게 설정된 실내온도 때문이다. 덴마크의 실내온도는 대체로 20℃이다. 스웨덴도 20~21도의 실내온도를 권장하고 대부분 이를 지키고 있다. 겨울이면 약간 높아지기도 하지만 큰 차이가 없다. 왜 20도 기준일까? 건강에 바람직하다는 보건상의 규범도 있지만 에너지 측면의 현실적 이유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혹독한 겨울을 경험한 북유럽은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 에너지 자립국가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걸었다. 덴마크 정부가 원자력을 대안으로 고려하자 대규모의 찬반 논쟁과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10여 년간 이어졌다. 1985년 의회는 마침내 자국에 원자력발전소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통과시켰고 천연가스 및 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 위주의 정책 틀을 확정했다.
스웨덴 역시 1980년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와 국민투표를 거쳤다. 결과는 원전을 즉각 폐기한다는 안이 근소한 차이로 밀려나고, 당시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인 원자력발전소는 그대로 운영하되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며 에너지소비 총량을 함께 줄여나간다는 안이 채택되었다. 현재 덴마크와 스웨덴 모두 에너지 구조의 50% 이상을 재생에너지 중심의 친환경에너지로 운영하고 있다.
덴마크의 난방 시스템은 이러한 정책적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지역난방체제로 일반화된 저온식 모형은 각 가정이 45도의 온수를 사용하고 20도의 실내온도를 기본으로 유지할 것을 상정하여 설계되었다. 이 방식이 재생에너지를 활용하여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면서도 가장 에너지 효율적이라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친환경에너지 중심과 탈원전주의의 이면에는 이렇듯 소박한 시스템을 채택하여 한겨울을 나는 시민들의 굳건한 행태가 자리하고 있다. 덴마크가 원자력에너지를 포기할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시민단체인 원자력정보조직(Organization for Information on Atomic Power, 1974~2000)과 그에 호응한 시민들이었는데, 그 시민들의 정체는 혹한에서도 실내온도 20도를 유지시켜낼 실천과 의식의 집합체였다.
추위를 못 견디고 감기로 고생하는 동양인을 두고 이곳 대학의 동료들은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저마다의 추위 극복 비법을 일러주기도 했는데 아침마다 냉수샤워를 해보라는 진지한 권고에는 함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자연스레 한국의 생활습관, 에너지 정책에 대한 대화가 오갔고 안일하고 나태한 우리의 에너지 구조와 과소비 행태에는 스스로도 새삼 아연했다.
원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권고안이 발표되고 정부는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 권고안과 유사한 내용을 30년 이상 집행해오고 있는 나라들에서 겨울을 몇 차례 경험해 보니,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라는 첫 번째 결론보다 앞으로 원자력에너지 비중을 줄이라는 두 번째 권고의 무게가 더 중하게 다가온다. 사회 구성원 모두 교통방식, 소비생활, 건강활동 등에서 불편하다 싶게 부지런한 일상을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겠지만 그것이 먼 미래 세대와 삶을 나누는 방법임을 받아들인다면 겨울 실내온도 20도 '정도'를 행복온도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비유한 '덴마크로 가는 길'은 성숙한 시민의 행태와 가치가 동행해야만 가능한, 미래가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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