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일본 도쿄의 어느 늦은 저녁, 조선인 김소운이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집을 방문한다. 손에는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김소운은 스물두 살로 도쿄 노동판을 떠도는 노동자였고 기타하라 하쿠슈는 마흔네 살로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일본 최고 시인이었다. 두 사람은 초면인데다가 약속이 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기타하라 하쿠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모든 모임을 취소하고 쉬고 있었다. 스물두 살 조선 청년의 무례함을 기타하라 하쿠슈는 패기와 열정으로 느꼈던 것일까. 만남은 이루어졌다.
허름한 복장의 김소운이 보따리에서 꺼낸 것은 고생스럽게 채집한 조선민요 가사 하나하나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기록한 원고였다. 원고를 훑어보던 기타하라 하쿠슈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는 "이처럼 멋진 시심(詩心)이 조선에 있었네요"라는 찬탄이었다. 기타하라 하쿠슈는 자신이 속한 유명 시 모임에 김소운을 소개했고, 김소운이 채록한 조선민요 출판을 주선한 것은 물론, 서문까지 써주었다. 식민지 조선의 민요를 모은 '조선민요집'(1929)은 이렇게 일본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선민요집'은 말 그대로 조선 서민들의 노래를 수록한 책이다. 그리운 임이 오는 줄 모르고 잠이 든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담을 넘어 여인과 함께 누웠지만 너무 짧은 시간 탓에 제대로 회포를 풀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등,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이 주된 내용이었다. '남녀상열지사'를 주제로 하고 있어서인지 민요를 채집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 집단 거주 지역을 걸어다니면서 노래 한 곡을 부탁해도 누구도 이 '쌍스러운 노래'를 불러주려고 하지 않았다.
김소운은 포기하지 않고 비 오는 날이면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동네에 가서 그들에게 두고 온 고향의 노래 한 곡을 부탁했다. 갠 날에는 일 다녀온 노동자들이 피로에 지쳐 노래 따위 할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김소운이 민요나 채집하고 다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세 살 무렵 부모도 없이 일본으로 흘러들어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 혹은 조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김소운의 열정과 집요함이 없었으면 '조선민요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소운은 '조선민요집' 이후에도 조선 근대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조선시집' 등을 발행하는 등 조선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을 다했다.
김소운은 일본에 조선 문화를 소개한 최초의 문화기획자이자 최초의 한류 조성자였다. '조선민요집' 발행으로부터 90년이 지났다. 밤늦게 보따리를 들고 조선 문화 소개를 위해 일본 거리를 헤매던 때와는 많이 다른 시대가 왔다. 일본 젊은 세대가 한국 아이돌 그룹에 열광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한국 사극에 빠진 일본 기성세대를 위해 알기 쉬운 한국사 연표까지 일본어로 출판되었을 정도로 한류는 일본 사회에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전파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한류' '한류'를 목청껏 외치는 대신 차분하게 우리 대중문화의 힘과 한계를 되짚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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