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아베 마리아

수많은 작곡자들이 한 번쯤은 손을 댔던 노래, 같은 곡목이 워낙 많아서 작곡자와 함께 기억해야 하는 노래, 그리고 노래에 얽힌 뒷이야기가 오해였음이 여러 번 밝혀진 노래…. 이쯤 하면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분들은 금방 알아맞히실 것이다. 아베 마리아(Ave Maria), 그러니까 성모송이다. 여러 기도문 중에서도 성모송은, 아무래도 아버지 하느님보다 어머니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을 쉽고 편하게 여기는 대중 신심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 많은 아베 마리아 노래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슈베르트, 구노, 그리고 카치니의 것일 터이다. 공교롭게도 세 노래 모두 사연이 얽혀 있는데, 먼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원래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대작가 월터 스콧 경의 서사시 '호수의 연인' 중에서 엘렌의 노래(Ellens Gesang)를 가사로 삼았다. 그런데 이 시의 서두와 후렴구가 성모송과 일치한 덕분에 노래는 곧 라틴어 성모송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고, 오늘날 아베 마리아 하면 떠올리는 대표곡의 반열에 올랐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한국 가톨릭교회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던 곡이다. 작곡가 구노가 친구 성 엥베르 주교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며 지은 노래라고 알려졌지만, 확인되지 않은 낭설이다. 구노가 기해박해로 순교한 성 엥베르 주교, 성 모방, 성 샤스땅 신부를 기리며 작곡한 것은 현재 가톨릭 성가집 284번 '무궁무진세에'로 실려 있는 순교자 찬가이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도 후에 작곡자가 바로잡히는 곡절을 겪었다. 줄리오 카치니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그러면서 바로크 음악의 시대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한 음악가다. 지금은 '레치타티보'나 서정가곡, 모노디와 오페라의 개척자로 음악사적 중요성을 인정받는 데 비해서 그의 음악은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과거의 대가가 쓴 곡이 수백 년간 묻혀 있다가 1987년에야 이리나 아르키포바의 연주로 소개된다. 어찌 된 일일까.

사실 이 곡은 1973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의 작품이었다. 가난 속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가 익명으로 발표했던 곡이 그냥 묻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한 오르가니스트 마크 샤킨이 카치니의 이름으로 소개한 탓에 잘못 알려졌을 뿐이다.

아베 마리아는 이렇듯 많은 이들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고 암송되는데, 그 범위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정교회와 성공회까지 망라한다.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차이 때문에 글자 하나까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루가 복음서 1장의 내용을 뼈대로 하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여기에 가톨릭과 성공회는 "Ora pro nobis peccatoribus, nunc et in hora mortis nostrae"(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를 덧붙여 기도문을 맺고 있는데,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바로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가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석한다. 이 라틴어 구절을 평이하게 번역하자면 지금, 그리고 임종의 시점이라고 따로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아리에스에 따르면 중세 사람들은 일상의 시간과 임종의 시간을 구별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한 인간의 삶은, 평소에는 제 욕망대로 살다가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잠깐 회개하는 것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임종의 시간인 것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중세인들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마치 임종의 순간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보내는 것,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죽음을 묵상하는 천주교인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이 깊은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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