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여성 시인하면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을 떠올린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사대부 집안의 여성인 만큼 현대에 와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은 것이고, 황진이나 매창과 같은 기녀 시인도 유명 인사와의 교류를 통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으므로 인해 평가가 활발했다. 하지만 조선 선조 때 승지 조원(趙瑗'1544~1595)의 첩실이었던 이옥봉(李玉峯)이나 경북 봉화 출신 여성 시인 설죽(雪竹)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그들의 신분으로 인한 이유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봉화 닭실 청암정에서는 경상북도 주최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이 마을 출신인 설죽의 삶과 시에 대해 이원걸 박사의 집중적인 조명이 있었던 것이다.
설죽은 권벌(權橃)의 손자였던 권래(權來'1562~1617)의 여종이었다고 한다. 권래는 시로 문명을 떨쳤던 권필(權韠)의 인척이었고, 권필은 성로(成輅'1550∼1615'호는 석전)와 절친한 친구였다. 권필과 성로는 송강 정철(鄭澈)에게서 학문을 배운 동문수학의 친구였다. 권필이 광해군 때 필화사건으로 귀양을 가다 울분에 차서 죽자, 석전 성로가 자신의 시를 불태우고 세상을 한탄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우정을 알 만하다.
상상을 펼쳐본다. 벼슬보다는 시에 뜻이 있어 한평생을 시와 술과 친구와 더불어 사는 풍류객이 바로 성로였다. 성로는 아내와 사별하고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권필의 고향인 닭실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어여쁘고 재기 발랄한 설죽을 만났다. 그는 첫눈에 설죽에게 반했다. 설죽 역시 감수성 뛰어난 시인이었던 성로가 좋았다. 그들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금방 사랑에 빠졌다. 친구의 사정을 눈치 챈 권필은 친척인 권래에게 부탁해 설죽의 신분을 해방시켜 성로에게 시집갈 수 있게 한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와 서호(西湖'현재의 양화나루 근처)에서 십 년을 살았다.
"십 년간 석전과 짝하여 한가히 노닐며/ 양자강 가에서 취해 지냈어요/오늘 홀로 떠난 임 계신 곳 찾아오니/ 옛 섬엔 백빈향만 가득합니다.(十年閑伴石田遊, 揚子江頭醉幾留, 今日獨尋人去後, 白蘋香滿舊汀洲)"
둘의 행복은 석전의 사망으로 인해 10년 만에 끝이 났다. 이때 설죽의 나이가 26세로 추정된다. 이후 설죽의 행적은 호서지방에서 보인다. '해동잡기', '패관잡기' 등의 여러 문헌에서 설죽은 호서 기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때 설죽이 지은 시 중의 하나로 '완산 객사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라는 작품이 있다.
"피리 소리에 원망이 가득 담겼고/ 밤중의 창가엔 달이 기울어요/ 매화곡 연주하지 마세요/ 외로운 저의 애간장을 태우니까요.(逐秦龍吟怨思長, 月斜窓外夜中央, 遊人莫弄梅花曲, 獨妾天涯易斷腸'한시 번역은 이원걸)"
설죽이 어떻게 해서 호서의 기생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는 약 20년 정도 호서지방에서 생활하다가 한양으로 올라온다. 한양에서도 고향 닭실을 그리워하는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설죽 생의 마지막은 닭실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걸 박사에 의하면 설죽이 남긴 시는 놀랍게도 167편이나 된다. 권상원(權商遠)의 시집인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뒤편에 166수, '청장관전서'에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다른 조선의 여성 문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또한 그녀의 시는 대부분 깔끔하고 산뜻하다. 앞으로 설죽 시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설죽을 봉화와 경북의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대구경북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가진 시'도도 드물다. 어떻게 잘 꿰느냐 하는 것이 바로 후손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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