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시절 우리 부대장은 사병들의 인성 함양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어디서 편지쓰기가 인성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와서 저녁 시간이나 점호 전 정훈교육 시간에 편지쓰기를 장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려까지만 하면 문제가 없었는데, 중대별로 월별 편지쓰기 실적이 가장 우수한 분대에 포상 특박을 내걸면서 문제는 달라졌다. 포상이 군인 특유의 승부욕을 자극하면서 처절하고도 참혹한 편지쓰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열심히 편지를 썼었는데, 상병 밑으로 하루 의무적으로 5통씩을 쓰게 한 분대가 첫 포상 특박을 나가자 다른 분대들도 똑같이 하기 시작했다. 군사우편은 보안 검열이 있었기 때문에 몇 줄만 써도 안 되고, 군대 생활 이야기를 써도 안 되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제대로 쓰려면 하루 1통도 힘들었다. 그때 나는 기본 할당량 5통 이상에 글을 못 쓰는 고참의 편지까지 떠맡아야 했다. 나중에는 편지 보낼 데가 없어서 당시 인기 있던 가요책 뒤에 있는 펜팔난에 있는 주소마다 다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훈련과 작업, 내무생활에 야간 경계 근무까지 피곤한 생활 중에 편지쓰기까지 더해져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편지쓰기로 인해 일어난 구타 사건이 알려지면서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편지쓰기 광풍이 지나고 나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군대에 들어오면 군대화된다는 것이다. 편지쓰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었고, 인성을 함양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도 맞았다.(엉뚱하지만 나는 그때의 혹독한 편지쓰기로 필력이 상승해서 공장 기계 돌리듯 쉽게, 빨리 글을 쓰는 기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좋은 것도 경쟁 체제 안에 들어오면 본질은 사라지고 경쟁의 한 수단이 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사용하는 사자성어가 바로 귤화위지(橘化爲枳)이다. 귤화위지는 귤이 풍토가 다른 곳에 가면 탱자가 되듯, 사람이나 제도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좋은 사람이나 좋은 제도도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장점이 드러날 수 없다는 것과, 장점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풍토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사고 운동, 학교 폭력 제로 운동 같은 것은 취지는 좋을지라도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 들어가면 작은 사고들을 은폐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것은 선진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접했을 때 무엇을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지금 교육계에서는 교육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핀란드식 교육 방법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 풍토에서 그쪽의 수업 방법이 좋아 보인다고 우리나라 학교에 그대로 가져온다면 혼란만 가중될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리가 핀란드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교육 방법이 아니라 교육 풍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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