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곳, 내 마음의 안식처] <19> 서예가 권창륜-예천 초간정

마음 숨길 필요가 없다, 붓을 든다

초간정은 물소리, 풀 냄새, 소나무 향이 어우러진 동양화 한 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간정은 물소리, 풀 냄새, 소나무 향이 어우러진 동양화 한 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정자를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홀로 우뚝 있겠거니. 산이나 언덕을 등지고 있을 테고. 병풍처럼 나무들이 정자를 호위하면서 그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겠지.

서예가 초정(草丁) 권창륜이 일러준 마음속 안식처, 초간정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과수원 들판과 지방도로 사이에 숨어 있는 모양새였다. 도로에서 내려선다 해도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몇 걸음 발품을 팔았더니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걸어 들어가는 짧은 시간, 산수화 한 폭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단풍나무가 입구에 도열해 있어 가을 색을 입혔다. 마침 노을 질 때라 하늘빛도 거들었다. 낙조에 키 큰 소나무들의 위엄이 성스럽기까지 했다. 초간정을 받친 바위 옆으로 돌아가는 개울은 쪼르륵, 콰르르, 끌끌끌. 바위 낙차와 폭을 이용해 제각기 소리를 냈다.

'이건, 그냥, 그림이다.'

"서예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는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터놓고 한숨을 내쉬어도 물소리가 숨겨주고 송림이 가려줄 것 같았다.

초간정은 조선 중기 선비 권문해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두 차례 난리(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불타버렸다. 왜란에 불타 다시 세운 것을 호란이 또 없앴다. 지척에 있는 금당실마을은 큰 난리를 다 피했다는데 이곳은 그렇지 못했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라 했다.

"별호를 초정(草丁: 초간 사내아이)으로 쓰는 이유도 초간 권문해 선생이 도학을 닦던 곳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분의 학덕과 저술을 기리는 뜻에서다. 서예도 도를 닦는 것이다. 마음을 드러내는 도학이다."

그는 제자들과도 이따금 이곳에 올라 풍류를 즐긴다고 했다. 올라가 보니 '이야' 소리가 절로 났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음치가 노래를 부르고, 문맹도 시를 읊겠구나 싶었다. 초간정 주변은 2008년 명승 제51호로 지정됐다. 물론 초간정 역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다.

초정은 "어릴 때부터 소풍 가는 곳이었고 경관과 유서가 깊은 500여 년의 요람으로 칭찬이 전국에 자자하다"고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찬미를 뒤로하고 머릿속을 채운 궁금증은 '왜군과 청군은 왜 이곳을 없앴을까'였다. 침략자의 심정으로 아무리 상상해도 '질투'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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