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상인도시 대구 명암

'한반도는 옥토(沃土)…대구는…일본 민족이 큰 날개를 펴고 활동하며 비약하려는데 가장 적당한 지반이 될 것인즉, 달리 어디서 이런 땅을 구할 수 있으랴. 대구는 수운(水運)만 없다 뿐이지 육상교통은 일찍이 개척되어 사통팔달의 도로망이 한국 제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일본인은 한반도 특히 대구의 장점을 일찍 간파했다. 나라에서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허용하지 않았지만 자연재해 없고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천혜의 살기 좋은 대구를 겨냥, '불법' 체류했다. 이들 뒤에는 일본군과 박중양 같은 친일파가 버텼다. 군대와 친일파는 일본인의 대구 점령을 위한 창이자 방패였다. 대구 상권은 잠식되고 일본 오사카 상권에 포함되었다.

1920년대 '대구는 자산가의 집중지로 서울에 다음가는 전 한국의 제2위를 굴지(屈指'손가락으로 헤아림)'했고, '대구시장'이라 불린 서문시장은 '한국 아니라, 일본을 합해서도 최대 시장'이었다. 대구 주변 풍부한 농산물 생산으로 미곡(쌀) 거래도 최고였다. 대구미곡거래소 규모가 '매년 1천만석(1석 144㎏, 144만t)을 밑도는 일이 없어 오사카, 동경 다음 대구가 그 지위를 확보'했다. 1928년, 대구의 한국인 5만5천245명에서 상인(교통 포함)은 2만2천842명으로, 거의 2명 중 1명꼴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대구 지위다.

숫자상 대구는 분명 상인도시였다. 대구의 농업(어업 포함) 종사자가 1만699명으로, 2천만 명의 전 국민 80%가 농민이던 사실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대구 경제의 대부분은 소수 일본인(2만4천248명)과 일부 한국인 자산가의 몫이었다. 90년 전, 1927년 11월 9일 대구 상공인이 대구상공협회를 만든 까닭이다. 그들이 그렇게 힘겹게 일본인에 맞서 시장과 상권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금융의 경색과 기술의 유치, 경영 방법의 불합리, 대자본의 압박 등'으로 '나날이 시들고 때때로 파탄되어 백척간두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대구의 상권 특히 전통시장과 골목 상권을 둘러싸고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와 거대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이 대구의 중소 상권을 압박하고 있어서다. 지난 5일 대구의 상인들 200여 명이 이마트의 '노브랜드' 매장 개설 추진에 맞서 대구신세계를 찾아가 시위를 벌인 사례도 그렇다. 일본인 자리를 한국 대기업이 대신했을 뿐,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상인도시 대구, 함께할 삶터로 가꿀 상도의(商道義)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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