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천년의 생명을 품은 성주] <4>생명의 성지가 된 성주 선석산

세종대왕자태실 수호사찰 선석사서 단종의 극락왕생 빌어

신라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종대왕자태실의 수호사찰인 선석사.
신라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종대왕자태실의 수호사찰인 선석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다가 파헤쳐진 단종 태실. 실제 단종의 태는 없으며, 석물만 복원돼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다가 파헤쳐진 단종 태실. 실제 단종의 태는 없으며, 석물만 복원돼 있다.

해는 벌써 산에 걸렸다. 왕실 내의녀였던 영이와 단이의 발바닥은 까지고 발은 퉁퉁 부어올라 더 이상 발이 바닥에서 안 떨어졌다. 영이와 단이는 어둠이 어둑어둑 내려앉을 때 태봉(胎峰)을 내려왔다. 그렇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저 멀리 불빛이 비친다. 영이와 단이는 무작정 불빛을 따라 걸었다.

◆깨진 태 항아리 조각을 찾다

땡그랑! 땡그랑! 풍경 소리가 저 멀리서 귓전을 맴돈다. 영이와 단이는 선석사(禪石寺'성주군 월항면)에 다다랐다. 다리에 힘이 풀린 단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마당으로 걸어나오던 스님이 쓰러진 단이를 보고 뛰어온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저희들은 내의녀인데, 상감마마의 태를 찾으러 왔다가 이렇게 절까지 오게 됐습니다."

비에 젖고 입고 있던 옷마저 해어진 몰골을 본 스님은 영이와 단이를 일단 요사채로 안내하고, 장작을 지피기 시작했다. 장작은 금방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방 안의 온기가 따스해지자 영이와 단이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선석사의 종소리가 산과 계곡에 울려 퍼졌다. 새벽을 깨우는 소리였다.

종소리에 눈을 뜬 영이는 "단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지? 상감마마의 태는 이미 불에 타 없어져 버렸는데…"라며 걱정했다. 단이는 "아침 공양을 하고 태봉 골짜기에 가서 돌들이라도 찾아 태가 묻혔던 자리에 다시 묻어주자"고 했다.

영이와 단이는 태봉 골짜기를 샅샅이 뒤졌다. 산에서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팔이 가시에 긁혀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영이와 단이의 가슴에도 피멍이 들어가는 듯했다. 태봉 골짜기에는 세월이 가도 썩지 않는 굳센 돌들이 망치와 곡괭이에 맞아 깨져 흩어져 있었다. 영이와 단이는 맨손으로 돌들을 헤집으며 상감의 태항아리 조각들을 찾기 시작했다. 가녀린 영이와 단이의 손에는 이미 물집이 잡혀 진물이 났다.

돌에 피었던 연의 꽃잎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 땅에 처참하게 떨어져 있었다. 두 꽃부리가 머금고 있던 중동석은 수박을 가르듯 두 쪽을 내놓고, 태비(胎碑)는 엿가락처럼 끊어놓았다. 지붕돌 위에 달려있던 보주(寶珠)도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돌들이 울부짖는 듯했다. "천년만년 세월이 흘러도 끄떡없어 보이는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다니. 상감마마! 저희들이 너무 늦었습니다. 불쌍한 상감마마를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상감마마! 수양대군이 모조리 쳐 없애버렸습니다. 상감마마! 원통해서 어찌 삽니까?" 영이와 단이는 단종의 태를 묻었던 항아리 조각들을 가슴에 안고 울부짖었다. 깨진 태항아리의 날카로운 부분이 희고 뽀얀 영이의 가슴에 상처를 내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선석사에서 천도재를 올리다

영이와 단이는 태항아리 조각과 깨진 돌들을 모아 태실(胎室)에 올랐다. 왕자들의 태비가 줄지어 있는 한쪽 끝으로 가더니 단종(端宗)의 태가 묻혔던 땅을 팠다. 땅을 파던 영이는 깜짝 놀랐다. 구덩이 안에는 흰 돌이 있었다. 영이는 돌에 묻었던 흙을 손으로 정성스럽게 긁어 냈다. 태지석(胎誌石)이다.

영이와 단이는 단종의 태지석을 끌어안고 또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皇明正統六年 辛酉 四月二十三日 辰時生 元孫阿只氏胎 皇明正統六年 辛酉 閏 十一月二十六日 藏' (명 정통 6년 신유 4월 23일 진시에 태어난 원손아기씨의 태를 명 정통 6년 신유 윤 11월 26일 묻다) 태지석을 태비 옆에 가지런히 세우고 흙을 덮었다. 영이와 단이는 여덟 번 절을 올렸다.

선석사로 돌아온 영이와 단이는 궁을 나올 때 가져 온 패물을 가지고 큰스님을 찾았다. "큰스님, 이 패물로 천도재를 지내주십시오." "누구의 천도재를 지내란 말입니까?" "상감마마의 천도재입니다."

큰스님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되옵니다. 어찌 역적의 천도재를 지낸단 말이오."

영이와 단이는 그때부터 곡기를 끊고 매일 태실을 향해 108배를 올렸다. 새벽 예불을 올리고 작은 스님이 큰스님에게 말했다. "큰스님, 젊은 처자들이 식음을 전폐한 지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이러다가 산 사람 목숨을 끊겠습니다. 조용하게 천도재를 지내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불쌍한 상감마마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큰스님은 결심한 듯 "요사채에 있는 처자를 데려오시오."

그날 저녁 선석사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쨍! 쨍! 요란한 징소리가 선석사의 법당에서 울려 퍼졌다. 영이와 단이는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큰 스님 옆에서 연이어 절을 한다. 천도재를 마친 영이와 단이는 큰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큰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저희들이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상감마마를 따라가는 수밖에요…." 영이가 울먹이면서 말을 하자 큰스님이 만류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인생의 괴로움(고),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의 모임(집), 그 번뇌에서 벗어난 열반(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도)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질긴 목숨을 함부로 끊지 마십시오. 당분간 여기에 머물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영이와 단이는 선석사에서 머물면서 아침저녁으로 태실을 찾아 재를 올렸다. 선석사에 머문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영이와 단이는 머리를 깎고, 불가에 이름을 올렸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