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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연 10% 고도성장 '열매'…강압적 유신체제 '채찍'

공과 뚜렷한 박정희 전 대통령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대통령 생가. 구미시 제공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대통령 생가. 구미시 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구미시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성빈(朴成彬) 씨와 모친 백남의(白南義) 씨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부임해 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1946년 귀국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육군 대위로 임관됐다. 6'25전쟁 동안 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가 1953년 장군이 됐다. 이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5개월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단일 후보인 윤보선(尹潽善)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됐다.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했다.

사회경제적인 악순환을 지양하고 자립경제 확립을 위한 기반구축을 목표로 한 제1차 5개년계획은 당시 후진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했다. 박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대일 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군정 기간인 1961년 10월에 일본 도쿄에서 제1차 한일회의가 열렸다. 이와 함께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됐고, 박정희는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일본 총리와 회담하는 등 한일 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해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 대통령은 ▷고성장 ▷수출드라이브 ▷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해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이와 함께 점차 독재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한일회담 타결, 월남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 개헌으로 나타났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했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도 한국의 강압 정치를 비난했으나 박정희는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 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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