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대구시장 현수막 어디 갔노?

김해용 논설위원

"내 현수막 어디 갔노?" 지난 추석날 대구 도심을 둘러보던 권영진 대구시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명절 하루 전 대구시내 주요 관문과 네거리에 자신의 이름으로 명절 인사말 현수막을 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도심엔 하나도 눈에 안 띄었기 때문이다.

권 시장은 이 현수막들이 중구청에 의해 모두 철거됐다는 사실을 연휴 이후에야 알게 됐다. 광역단체장 명의의 현수막을 구청 공무원들이 철거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구청 공무원들은 법과 규정에 따라 일을 한 것이었다. 명절 때마다 정치인들이 인사말 현수막을 곳곳에 내거는 것이 관행이지만 대부분 불법 게시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 명의의 현수막 철거는 이제 대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과 원칙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세상이 왔다고 반색할 만한 일이다. 권 시장도 내심 당황스럽고 서운했겠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아니라며 별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간에는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현수막 철거가 내년 지방선거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공교롭게도 윤순영 중구청장은 내년 대구시장 선거에 뜻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른정당 소속인 윤 구청장은 자유한국당 소속인 권 시장과 당적도 다르다. 이 때문에 지역 정가에서는 대구시장 명의의 현수막 철거가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견제구가 아니냐는 말들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대구 정치 생태계의 최근 변화가 빚어낸 생경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보수의 위기 시대다. 보수의 본산이라는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 보수 정치권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갈라져 있고 공교롭게도 두 당의 대표는 둘 다 대구에 정치적 기반을 자처하거나 둔 인물이다. 자유한국당 사정도 친홍과 친박, 비박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정 정당에 대한 지역민의 일편단심도 예전 같지 않다. 향후 선거에서 대구 유권자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가늠키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대구시장 선거는 전례없이 흥미진진한 경쟁 구도가 될 것 같다. 최초의 비(非) 경북고 출신 대구시장이라는 지평을 연 권영진 시장은 지난 3년 6개월 재임기간 동안 시정을 비교적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정작 압도적 지지율 우위를 점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더구나 자신의 대표적 역점 사업인 통합대구공항 이전과 대구취수원 이전 문제가 의도와 달리 성과가 아니라, 경쟁자들로부터 공격받는 카드가 되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보수의 위기를 틈타 더불어민주당은 대구에서의 약진을 도모하고 있다. 다른 지역만큼은 아니어도 민주당은 대구에서도 의미 있는 교두보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김부겸 장관의 내년 대구시장 선거 차출설도 숙지지 않는다. 김 장관은 이미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사실상 자력으로 40%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다. 민주당은 보수진영 후보들과의 양자 대결에서 김 장관이 우위에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고무돼 있다.

민주당 고위 인사들이 대구 현안에 귀를 깊이 기울이거나 대구 예산을 챙기려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보수 궤멸을 막기 위해서 내년 대구시장 선거만큼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어쨌거나 내년 대구에서의 지방선거가 전국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특정 정당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되는 후진적 정치 풍토가 그동안 지역의 미래를 갉아먹어왔기 때문이다. 지역민의 선택이 아니라 중앙당 낙점을 받아 정치 생명 연장의 꿈을 꾸는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다. 누가 되든지 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되는 것이 지역과 유권자들에게도 좋다. 지금 대구는 '묻지 마 지지' 불모지에서 정치적 생태계 다양성이 피어나는 초입 길목에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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