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설자리 못 찾은 TK 중진의원들] 정치적 생존 골몰…득표 도움되는 지역구 사업에만 관심

대구경북 '보수정치권' 위상 추락

2007년 정권교체와 2012년 정권 재창출의 주역이었던 대구경북(TK) 보수정치권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전(前) 정권과 대구경북이 적폐로 몰리고 있는데도 이렇다 할 반발조차 못 하면서 지역 정치인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지역의 정치적 위상이 위축되면서 지역의 주요 현안을 해결할 기회도 멀어지고 있다. 중진'재선'초선 의원들이 모두 우왕좌왕하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유한국당은 물론 보수개혁을 주장하는 바른정당,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필두로 하는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지역 정치권이 건전한 경쟁을 통해 자생력과 힘을 키워 제 역할을 해야 지역현안 해결과 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게 지역민들의 요구다.

◆지역 정치권 이끌 지도력 부재

후배 정치인들을 규합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할 TK 중진들이 자기 앞가림하기에 급급하다 보니 지역 정치권을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없다. 지역 정치권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4선 의원들이 국정 농단 사태를 거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동반몰락의 길을 걷거나 후폭풍에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을 넘어 친박계 전체를 진두지휘했던 최경환 의원(경산)은 정권교체 이후 한국당의 과거 청산 과정에서 희생양이 될 처지다. 당 대표가 최 의원과 서청원 의원의 탈당이 당의 쇄신과 환골탈태의 핵심이라고 공언하는 상황이다.

박 전 대통령과 결별한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대구 동을)는 보수개혁의 초석은 놓았지만,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한 당의 살림 걱정으로 여념이 없다. 보수정당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선 대구경북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지만 여전히 지역정서의 벽이 높다.

14일 바른정당에서 한국당으로 복당하는 주호영 의원(대구 수성을)은 '당적변경'에 따른 자숙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분간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향후 최 의원의 운신의 폭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고, 유 의원 역시 선택지도 별로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유 의원은 바른정당 대표로 선출되긴 했지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통합 제안을 제외하면 정국 돌파를 위한 마땅한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 현안을 챙기거나 지역으로 눈을 돌리기엔 갈 길이 너무 바쁜 상황이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중진들 내년 지방선거 공천 눈치

대구경북 3선 이상 중진 국회의원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TK 3선 이상 현역 국회의원 중 강석호'김광림'이철우 의원은 경북도지사를 꿈꾸는 터라 이들의 시선이 내년 지방선거 공천에 쏠리면서 당 지도부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 제명과 서청원'최경환 의원 출당 문제를 두고 지도부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철우 의원은 박 전 대통령 탈당 권유 징계 당시 "섣부른 조치로 불필요한 정치적 분란만 야기했다"며 "지금이라도 박 전 대통령과의 접촉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징계를 강하게 밀어붙인 홍준표 대표와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도 이내 사그라졌다.

정치권에 따르면 그 변곡점은 홍 대표가 지난달 23일 오전 4박 5일 일정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이날 인천공항에서 홍 대표는 이 의원에게 "이 의원, 경북도지사 하겠다는 사람이 뭐가 무서워서 눈치를 보느냐. 박근혜가 그렇게 무서우냐. 나를 도와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 공천권을 쥔 홍 대표 눈치를 보며 그의 '친박 청산' 드라이브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는 것이다.

반면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는 '박근혜 구출'에만 매몰돼 무너진 TK 정치력 회복에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힘 못쓰는 허리…일병이 병장 역할 맡은 꼴

TK 중진들이 눈치게임을 하는 터라 허리 역할을 해야 할 재선 의원들마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다.

대구에서 한국당 소속 최다선 국회의원은 김상훈'윤재옥 두 재선 의원이다. 군대로 따지면 계급이 일병인 이들이 상병'병장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의 군 생활 경험이 짧다 보니 이등병(초선 의원)들을 아우르며 TK 정치력을 상병'병장이 즐비한 중앙 정치권에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역 초선 의원을 끌고나가기에도, 당 지도부에 지역 입장을 강하게 관철시키기도 모두 쉽지 않은 모양새다.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정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지역 정치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옳은 일에 목소리를 내는 의원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지역민이 지켜주는 정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과거 총선을 되짚어 보면 경쟁력 있는 현역 국회의원이나 후보자가 당이나 대표에게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공천을 못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며 "이런 두려움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한 요인일 수 있다. 지역민이 똑똑한 지역 정치인을 키워준다는 분위기가 있다면 TK 정치인들도 중앙 정치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눈치만 보는 초선 의원

장수를 잃은 군사들은 오합지졸이 되기 십상이다.

정치권에선 최근 대구경북 초선 의원들을 '장수 잃은 군사'에 비유하곤 한다. 진박(眞朴) 감별사의 낙점을 받아 낙하산 공천으로 당선된 지역의 상당수 초선 의원들이 국정 농단 사태 이후 복지부동과 함구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을 꼬집은 표현이다.

정치권에선 지역의 초선 의원 상당수가 친박 공천의 수혜자인데다 지역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도 적지 않아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다수 초선 의원들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일절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사안은 계파의 입장을 확인하기 바쁘다. 총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정국이 어떻게 변하는지 일단 지켜보자며 주저앉아 있는 셈이다.

생존을 위한 정치적 계산에 골몰하다 보니 지역 현안은 뒷전이다.

당장 득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지역구 사업에만 관심을 가질 뿐 대구경북 전체를 아우르는 사안에는 관심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들로 인해 대구경북 정치인에 대한 이미지가 소신과 강단으로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만 좇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게 생겼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보수정권이 국정 농단 사태와 현직 대통령 탄핵으로 막을 내리면서 주축이었던 대구경북 정치권도 함께 타격을 입었다"며 "지역의 차세대 주자 부재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우려가 크다"고 내다봤다.

◆현역 의원 태도변화 촉구해야

지역 정치인들의 무력기력증이 지속됨에 따라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신속한 상황 반전을 위해 현역의원들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정치인의 생살여탈권을 가진 유권자가 나서는 방법이다. 마침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효과도 괜찮을 전망이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현역 의원은 임기가 보장돼 있어 이들을 견제할 장치가 마땅치 않다"며 "내년 지방선거를 지렛대로 유권자운동을 통해 지역 정치인들의 태도 변화를 촉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지역의 정치지형을 경쟁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특정 정당의 묻지마식 패권정치가 계속되면서 지역 정치인들이 안일함에 빠지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양한 정당에 지역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도 나온다.

정치권에선 여당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더불어민주당과 개혁보수를 지향하고 있는 바른정당의 공세가 거셀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른정당은 개혁보수의 면모로 지역민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는 전략을 준비해 두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치는 궁극적으로 유권자들의 선택에 의해 변한다"며 "김부겸-홍의락 의원이 놓은 교두보를 적극 활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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