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2년 7월 16일부터 17일 사이 어린이 4천115명을 포함해 1만3천152명의 프랑스 내 외국계 유대인이 체포돼 파리 제15지구에 있는 동계 경륜장(일명 벨디브)에 수용됐다. 이 중 1만2천884명이 파리 근교의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압송돼 대부분 학살됐다. 프랑스인들은 이를 '벨디브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런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집단은 독일 점령군이 아니라 프랑스 경찰이었다. 이를 지휘한 인물이 독일에 협조한 비시 정부의 경찰 총수였던 르네 부스케다. 벨디브 사건 희생자를 포함해 독일 강점기 동안 독일 절멸수용소로 보내진 프랑스 내 유대인 7만6천 명 중 5만9천 명이 부스케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해방 뒤 부역자 재판에서 가벼운 형만 살고 나온 뒤 재계 유력자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978년 시사 잡지 '렉스프레스'의 추적 보도로 그가 벨디브 사건의 주역임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그의 기소는 차일피일 미뤄지다 11년 만인 1991년 3월에야 이뤄졌다. 그 이유는 부스케 재판을 원치 않는 정치인들의 압력 때문이며 그중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인되지 않은 '설'이지만 미테랑과 부스케가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부스케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1993년 재판을 앞두고 부스케가 한 정신이상자의 총격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미테랑의 전력(前歷)에서 비시 정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비시 정부의 관리를 지냈으며 최고훈장도 받았다.
프랑스 해방 후에도 비시 정부 수반인 페탱 원수를 추종하는 '페탱주의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페탱 원수의 무덤에 계속 꽃다발을 갖다 바쳤다. 이런 그의 '성향'을 감안할 때 그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것도 신념의 변화가 아니라 독일의 몰락이란 정세 변화를 고려한 변신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인물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대통령이 되기는커녕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민족 반역자'로 불리며 조리돌림을 당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은 그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를 비판하는 세력은 이를 근거로 그가 "독립군을 때려잡았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해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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